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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파리 그느넬 가 7번지, 부르주아 계급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진짜로 머리 좋은, 거의 천재 수준의 여자 두 명이 우연하게도 한 지붕을 이고 산다. 이 여자들에 대한 묘사를 한 번 옮겨보자.
내 이름은 르네. 쉰네 살. 이 건물의 수위 아줌마다. 나는 과부고, 못생겼고, 오동통하고, 발에는 못이 박여 있고, 나를 혐오하는 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아침엔 가끔 입에서 매머드 냄새가 풍긴다고 한다. 학교는 가보지도 못했고, 항상 가난했고, 말이 없었고, 남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나는 열두 살이고, 우리 부모는 부자이고, 우리 가족은 부유하고, 언니와 나는 당연히 잠정적으로 부자다. 아빠는 예전에 장관을 거친 국회의원이고, 결국 국회의장이 되어 국회의장 공관이 라세 관館의 포도주 저장고를 비우게 될 것이다. 엄마는 결코 석학은 아니지만 많이 배웠다. 엄마는 문학박사다. (얘 이름? ‘팔로마 조스’다.)
먼저 르네. 지독하게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 가난한 여자에겐 과하게 아름답게 생긴 것 못지않게 과하게 똑똑한 것도 큰, 크나큰 결점이었다(과거시제다. 오해 없기를). 20세기 중반까지도 너무 가난해서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여자에겐 과하게 아름다운 것도, 과하게 똑똑한 것도 오직 불행만을 예고할 뿐이었다. 이건 동서가 마찬가지다. 다행스럽게 르네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지 않았다. 열세 살에 끝나고 만 학교생활에서 르네는 알파벳의 무한 조합과 멋진 소리가 주는 아름다움을 단박에 알아채, 처음엔 몰래, 그 후엔 독서가 줄 즐거움과 이익을 마음속에 숨긴 채 만끽하는 한편, 독서가 줄 즐거움과 이익에 언제나 배고파하는 소녀였다. 자신이 또래들과 비교해 월등하게 우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숨겨야 한다는 지혜까지 습득한 애늙은이였던 거다. 그러나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도 하고, 부모 형제들과 함께 밭에서 일을 하다가 열일곱에 결혼을 했다.
이미 열다섯에 휜 등, 굵은 허리, 짧은 다리, 팔자걸음, 수북한 털, 탁한 인상 등으로 쉰 살처럼 보인 르네 앞에 뤼시앵이 나타나 너무나도 20세기답게 청혼을 한다.
“르네, 난 음탕한 여자가 될 뛰어난 여자들이나 예쁜 얼굴 뒤에 참새 뇌 이상의 것은 없는 여자 중의 하나가 내 처가 되길 원치 않아. 난 정조를 지키는 여자,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주부를 원해. 난 내 옆에 있어주고, 나를 지지해주는 조용하고 신실한 동반자를 원해. 반대로 넌 내게 성실히 일하고, 집에서는 조용하고, 좋은 순간에는 부드러운 사람을 바라도 돼. 난 나쁜 놈도 아니고, 최선을 다할 거야.”
이처럼 느릅나무 그루터기처럼 조그맣고 투박하지만 그래도 늘 미소를 띤 보기 좋은 얼굴을 한, 비록 교양은 없지만 모든 것에 재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예절을 갖춘 동반자, 그리고 지식인은 아니나 그보다 덜 영리하지도 않은 뤼시앵 미셸과 혼인을 하고, 27년 전부터 아파트 수위로 있다가 15년 전에 암으로 뤼시앵을 떠나보낸 뒤 수위실과 지하방에 터를 잡고 홀로 살고 있었다. 원래부터 문자가 만들어놓은 모든 업적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르네는, 파리에 널려있는 도서관과 미술관, 박물관을 순례하며 매우, 매우 상당한 수준의 철학, 역사, 미술, 음악적 소양을 완전한 독학으로 습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앞에서 얘기했듯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시골 출신의 여자가 부르주아들만 사는 아파트의 수위로 먹고 살면서, 자신이 그들보다 지적으로 한참 윗길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건 자신에게 오직 불행만을 약속할 뿐이라는 굳센 신념으로 자신을 은폐하고 스스로 폐쇄해버린다.
앞으로 국회의장이 될 것 같은 아버지를 둔 팔로마 조스는 이제 열두 살. 아무리 공부를 하지 않아도 국어, 수학, 역사 등등 모든 과목에서 일등을 먹는 특별한 존재지만, 자신만큼 똑똑하고 공부에 재능 있고, 다른 사람과 다르고,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뛰어난 존재마저도 역시 삶은 이미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이해해버린 조숙한 아가씨. 아직 사춘기를 맞지도 않았으면서도 세상은 너무 부조리하여, 겨우 열두 살밖에 먹지 않았으면서 세상살이란 마치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 같아, 투명한 유리벽에 머리통을 퉁퉁 부딪기만 할 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넘어갈 수 없다는 데 벌써 “절망”을 했다.
세상은 언제나 똑같을 것이고, 우둔함은 늘 뭔가를 꿈꾸는 반면, 자신처럼 뛰어난 사람의 성공은 인생을 씁쓸하게 만든다고 확신하는 이 꼬마 아가씨는 그리하여 돌이킬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할, 한 가지 결심을 하고 만다. 열세 살이 되는 6월 16일에 그르넬 가 7번지 아파트에 불을 질러버리고, 소방대에 전화를 해서 기술적으로 자기네 집만 불태운 다음, 외갓집에 가서 자살을 해버리는 거다. 어떻게 죽을까? 물에 빠져 죽거나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독극물을 삼켜 위와 장의 고통을 유발하거나, 심지어 혀를 빼물고 목을 매다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바람직하지 못해서, 수년간 정신분석에 매력을 느껴 일 년에 6천유로 씩 지불해가며 얻은 처방전에 의거해 거의 매일 수면제를 복용하는 엄마의 약병에서 역시 수년간 매달 딱 한 정의 수면제를 모아놓기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아, 수십 알에 이른 수면제를 한 번에 꿀꺽 삼켜 잠자는 듯 죽어버리기로 결정을 했다.
쉰네 살의 은둔 폐쇄형 천재 수위 아줌마와, 열두 살의 천재 꼬마 아가씨가 서로 이렇게 살고, 불싸지르고, 자살하면 그게 소설이야? 여기에, 책이 어느덧 중간쯤 도달했을 때, 한 명의 문제적 인물이 등장한다. 영상, 음향기기 수입업자였다가 이제 은퇴한 무지 돈 많은 일본인 가쿠로 오즈. 왜 여기서 생뚱맞게 일본 남자, 오즈, 오즈의 마법사가 등장하느냐고? 이 책을 쓴 뮈리엘 바르베리의 일본 선호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대목에서 바르베리의 전작 <맛>을 떠올렸다. 데뷔작이자 히트작인 <맛>에서 바르베리는 수다한 음식들을 열거하고, 각 음식들이 주는 아주 독특한 맛의 향연을 “문자화”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 <고슴도치...>에서도 여러 음식에 관한 촌평이 나온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음식이 한 점에 40유로씩 하는 ‘생선회’였다. 물론 이것 말고도 작가는 일본의 특정한 미학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외, 오주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무나카타 자매>에 나온다는 이끼 위에 핀 동백꽃, 교토에 있다는 진보라빛 산봉우리들 같은 것들. 왜 굳이 일본의 미학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을까. 바둑을 일본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아버지 친구한테 그건 중국의 것이라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다 아빠한테 꾸중을 듣는 팔로마의 예를 보면 꼭 바르베리의 일본 취향이라고 할 이유도 없는데. 혹시 외로운 철학자 르네 아줌마가 수십 년 간 지하방과 도서관에서 습득했던 문화적 경지가 유럽 권에만 머물지 않고 동양권역까지, 그러니까 거의 무한대까지 이르렀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실 일본 문화는 생선회, 영화 <무나카타 자매>, 그리고 소위 망가라는 일본 만화에 국한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톨스토이를 흠모하는 르네가 우연하게 던진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알아들은 일본인 오즈 씨는 그녀를 입주자 전부가 알 수 있게 내놓고 리모델링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사실 집 안에서는 특별한 일본식이라 내놓을 만한 것은 없다. 오히려 집에 들어서자마자 르네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에테르 클로스Pieter Claesz의 모사 정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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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오즈 씨의 아파트 벽에 걸린 그림이 이건 아니다. 클로스의 그림 가운데 설명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골랐다.)
이 그림이 모사품이라는 것도, 클로스가 그렸다는 것도, 화가가 17세기 네덜란드 사람이란 것도 한 눈에 알아보는 르네. “속을 편안하게 하는 곳은 어딘가요?” 라는 물음 끝에 화장실에 들어가 좁은 방광을 비운 르네는 또, 변기 물을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난데없이 터져 나온 포르테 시모의 “Confutatis”.
모차르트 미완성 진혼미사곡의 일곱 번째 곡 역시 비록 방광을 비운 뒤 옷도 올리지 못한 채 황망하게, 화들짝 놀란 상태로 들어서 그렇지, 귀에 선율이 닿자마자 곧바로 모차르트가 작곡한 어떤 곡인지 알아내는 지성을 (자신은 그리 숨기려 했건만)과시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거기다가 칸트 부터 에드문트 후설까지 온갖 철학적 소견을 떠르르 꿰는 다방면의 천재상태를 그나마 자연스레 보여줄 수 있게 만드는 '상대 인물'로, 바르베리는 (편견에 사로잡힌)유럽인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가장 먼 곳, 동양의 끝, 일본 아니었을까? 그중에서 난 생선회와 메밀국수 등 미각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에 만 원 건다. 실제로 그르넬 가 7번지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하는 한 입주자의 직업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맛 전문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렇다. 르네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국의 남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동의해주기 바란다. 프랑스의 오래 묵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여성” 또는 “가난하지만 영리한 여성”에 대한 편견 없이 접근이 가능한 50대 중반부터 60대 초반까지의 “돈 많은” 남자를 어디서 구해야 할까.
자, 얘기는 다 했다. 비록 48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이지만 바르베리의 감각적 문장들은 읽는 즐거움을 주기 충분하고, 가끔 숨어있는 간질간질한 장면들도 재미있는데, 420쪽을 넘기면서 적어도 콧잔등이 시큰해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도 아니라고 여기게 될 만큼, 한 여성이 편견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정 있게 그린 작품이라고 단정해도 무방하리라. 진짜배기는 언제나 마지막에 나온다. 그 진짜배기가 뭐냐고? 안 알려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