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부마을 이야기 1
제임스 캐넌 지음, 이경아 옮김 / 뿔(웅진)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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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뿔>. 마지막으로 책을 낸 것이 2012년. 그럼 일단 [뿔>이란 브랜드는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근데 문제는 엘러스데어 그레이의 <라나크>, 도리스 레싱의 대표작 <황금 노트북> 같은 것도 함께 사라져버렸다는 것. 웅진지식하우스라는 브랜드는 왕성한 작업을 하고 있는 바, 이런 것들도 좀 다시 찍어주시라.


 

 위키피디아에서 작가 제임스 캐넌을 검색해보면, 1968년 콜롬비아에서 낳고(구체적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자라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비리그 가운데 하나인 콜롬비아 대학에서 문예창작 MFA, 석사를 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 <과부마을 이야기 Tales from the Town of Widows>를 미국, 캐나다, 영국에서, 모국어인 스페인 언어가 아니라 영어로 발간했단다. 그러니 이 책을 러시아 문학 전공자 이경아가 번역했다는 걸 나처럼 의아해하지 않기 마시기 바람. 난 노문학자가 서문학 책을 번역한 걸로 단단히 착각하고 틀림없이 영어본의 중역 아니겠는가 짐작했었다.
 굳이 <과부마을 이야기>를 위키피디어까지 뒤져 검색해본 이유는, 책 뒤표지에 쓰인 찬사가 너무 과하다싶어서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콜롬비아 작가가 바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그이의 대표적 작품이 <백년의 고독>. 솔직하게 말하자면, <백년....>은 읽어본지 마치 백년은 된 거처럼 하도 오래 전이라 지금은 그냥 책에 대한 감정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여보 의사양반. 내 가슴에 심장이 어디 있는지 점 좀 찍어줘, 그러시지 않겠습니까요, 그래서 쇤네가 심장의 위치에서 1cm 옆에다 점을 찍어드렸습죠. 그랬더니 아니나 달라, 대령께서 거기다가 권총을 쏴버렸지 뭡니까요, 하는 장면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반군들과 마르케스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 내가 일컫기를 “아몰랑 주의” 작품의 특징을 흔히들 이야기하는 바, 그게 벌써 언제 적 환상적 리얼리즘이냐고. <백년...>이 1967년 아닌가 말이다. 196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소설문학에서 무수하게 쏟아진 아몰랑 주의 작품 또는 아몰랑 형식을 무려 40년이 지난 2007년에 다시 또 써먹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닌 거 같다.
 1992년 11월, 심심산골의 외딴 마을 마르키타에서 사건은 벌어진다. 공산주의 반군이 마을에 쳐들어와 늘 하던 대로, 그게 다 산골마을의 불쌍한 인민들을 위해 투쟁하려고 하는 충정어린 행위인 것뿐인데, 투쟁도 뭘 먹어야 하니 산골마을 인민들이 먹을 걸 싹 공출해가고, 투쟁도 리비도가 너무 쌓이면 도무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라서 동네 아무 여자나 그냥 겁탈해버린다. 여기까진 늘 해오던 식이니 뭐 그런가보다 했다. 그러나 그날은 글쎄 거기다가 하나를 더 보태, 열세 살이 넘은 남자들까지 몽땅 혁명군으로 공출을 해버린 것. 당연히 게릴라 대원이 안 될 방법도 있긴 있다. 그들이 쏜 총알을 피하는 재주만 있으면. 그리하여 적지 않은 남자들이 총 맞아 죽고, 죽은 사람보다 월등히 많은 사내들은 울며불며 게릴라 대원의 임명장을 받아들었으며, 딱 한 명,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 ‘앙헬 타마카’만이 공산주의 혁명의 완수를 위해 자진해서 게릴라 부대에 지원한다. 그리하여 마리키타에선 모랄레스 여사의 기지로 여자 옷을 입어 징집을 피할 수 있었던 십삼 세 훌리오 모랄레스를 포함한 어린 소년 네 명과 로마 가톨릭 신부 라파엘, 이렇게 다섯 명의 남자, 나머지는 전부 여자, 합해서 99명의 주민만 남아 외딴 산골에서 스스로의 삶을 살게 된다. 아, 두 명 더. 어느 깊은 밤, 혼자 떨어져 동네로 들어와 후임 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는 세뇨리타 클레오틸테, 비극의 밤에 근동의 커피농장에서 일을 하던 청년 산티아고. 클레오틸테는 과거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을 당시 반정부군에 의하여 능욕을 당했던 적이 있어 극도로 남성을 혐오하는 자칭 숫처녀. 산티아고는 전형적인 동성애자로 여성의 역할을 하는 소위 바텀 전문. 여성의 리비도와 인류의 영속을 위한 측면에선 전혀 필요 없는 남성.
 여자들만 남아 있는 마을. 시기는 비록 20세기 말이었으나 콜롬비아 산골이라는 지역적 구속은 여성들로 하여금 어떠한 일도 스스로 결정해서 행동으로 쉽게 만들어가지 못했다. 비록 여러 가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떠올릴 줄 아는 비교적 현명한 여성 로살바 파티뇨가 남자가 없는 와중에 피해조사 차 방문한 공무원으로부터 치안판사로 임명을 받았다고 해도 말이다. 마을은 길거리마다 각종 쓰레기와 집 없는 개와 고양이로 넘쳐나고, 당연히 냄새가 코를 찌르는 불결한 환경에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인플루엔자의 습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지긋지긋한 게릴라 부대의 공포와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떠나버려, 더욱 황폐해져버린 상태.
 작가는 애초부터 로마 가톨릭하고 맺힌 것이 좀 많았던 모양이다. G.K. 체스터턴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브라운 신부는 못생기고 머리 벗겨지고 배도 나와 겉으로 보기엔 참 인상 좋지 않은 인물을 엔간해선 악당으로 지목하지 않는 반면, 이 책의 작가 제임스 캐넌은 머리 벗겨지고, 배 나오고, 못생기기까지 한 라파엘 신부를 좌익과 우익 게릴라들보다 더 흉악한 악당으로 만들어버렸다.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종교, 종교라고 해야 콜롬비아에선 로마 가톨릭 말고는 없었으니 당연히 가톨릭이지만 하여간 종교를 배척하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긴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너무 했음. 사제와 예수와, 하느님과, 천국과 지옥을 빙자한 이리 상태가 너무 적나라하다. 그렇게까지 했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데, 뭘 가지고 그러는지 궁금하시지?
 기어이 여자들만 남아 16년 동안 거의 완벽하게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하는 마을. 그들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사회를 만들고 자연과 비슷하게 변모할 수밖에 없는데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이게 책을 읽는 핵심인데 그걸 알려드릴 수는 없지. 책은 재미있어서 술술 읽히기는 한다. 또 잘 쓴 아롤랑 기법을 쓴 소설들이 그렇듯이 자연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그건 지금이 1960년대가 아니라 21세기라서 그렇게 읽힐 수도 있는 것. 근데 나도 참 무식했던 것이, 콜롬비아의 내전은 20세기에 끝난 걸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세상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한테 관심을 더 가져야겠다.
 그리고, 아직도 이런 장르의 작품을 ‘환상적 리얼리즘’이라 칭하는 독자들과 평론가들이 있을까? 난 솔직히 모르겠다. 정말 <과부들....>을 리얼리즘 문학으로 줄을 그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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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의 죽음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소설 1
막스 갈로 지음, 이재형 옮김 / 예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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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를 보면 ‘막스 갈로’라는 사람은 어려서 이태리에서 이민 온 사람이라고 한다. 이태리 이민자가 프랑스에서 막강한 유명세를 탄 사람을 나는 한 명 더 안다. 이브 몽탕. 불세출의 선배 가수 에디트 피아프가 힘껏 밀어줘 유명세를 타고 스타가 된 다음에 입 싹 닦음.  몽탕은 나중에 정계에 입문하려다가 했나? 못 했나? 그건 기억나지 않는다. 반면에 막스 갈로는 이태리 출신 프랑스 인으로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 바로 아래 차관도 하고, 하여간 프랑스의 대표 지성으로 추앙받다 어? 바로 작년 2017년에 죽었단다. 원래는 공산주의자였다가 좀 온화한 사회주의자로 변신한 (남자의 변신도 무죄!) 사학자이자 소설가, 작가, 언론인, 정치가 등 이력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세계적 인물을 대상으로 소설을 쓴 이 양반의 작품으로 다섯 권짜리 <나폴레옹>도 있고,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도 있고,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도 있으며(이건 꼭 읽어봐야겠다), 내가 주시하고 있는 로마의 주요 인물 다섯 명에 관한 소설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시리즈도 있다. 번역물로 나온 역사책으론 <프랑스 대혁명> 정도.
 ‘막스 갈로의 로마 인물’ 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이 스파르타쿠스. 원래 책의 제목도 그냥 <스파르타쿠스>인데 번역을 거치면서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으로 꼬랑지가 붙었다. 작가 자신이 프랑스 사학계의 대표선수였던지라 영화나 드라마에서 필요 이상으로 영웅시되었던 한 인간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EBS든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든가에서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관해 다큐멘터리를 방송해준 기억이 나는데, 이태리 중남부에서 시작해 시칠리아와 실금 같은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둔 레기움에 이르기까지 검투사 출신의 노예가 이끄는 반란군의 장정과 전술에 관해 참 재미있게 봤다. 책을 읽으니 당시 TV에서 본 반란군의 행적이 새삼스레 기억나는 거다. 아니면 기억은 무슨 개뿔 같은 기억, 그냥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마치 전에 TV에서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을 수도 있었겠지. 하여간 그랬다.
 물론 이 책은 최고의 사학자 겸 소설가가 쓴 ‘픽션’이라서 등장인물 전원이 실제 당시를 살고, 투쟁하고, 피살을 당하든지 남아서 동료들의 행적을 기술하든지 했던 것은 아니다. 갈로가 생각하기로는, 로마는 스파르타쿠스와 노예들의 반란에 관한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기를 바란 것 같다. 아니면 반란을 일으키긴 일으켰지만 그들이 얻은 건 잔인한 보복과 죽음뿐이었다는 단편적 사실 정도를 당대의 로마 시민이나 노예들이 알기 바랐을 거라고, 실제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입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잔인하기로 이에 비교할 수 없다고 책에서 강조하는 장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아마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도 나오는, 영웅 수준의 전략가일 걸? 시선을 스파르타쿠스, 노예 신분에서 스스로 해방을 시켜 자유를 위한 투쟁을 벌인 자들의 입장에서 서술했기 때문에 실제보다는 과하게 잔인한 인물로 묘사했을 수도 있겠다. 왜 이렇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래도 영웅이라 후세의 역사가가 칭할 정도라면, 물론 책의 주인공 스파르타쿠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수많은 병사들을 한꺼번에 장악하는 매력을 동반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을 읽고,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해 경악을 했다. 흔히들 이야기하기를, 역사는 승자들의 것이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역사는 기록한 자들의 것이다. 또 얘기하는 바,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모두 아홉 번을 싸워 그 가운데 딱 세 번만 페르시아가 졌다. 근데 그리스에선 헤로도토스라는 특출한 역사가 또는 기록자가 있어서 그걸 <역사>라 제목을 붙여 그리스가 이긴 딱 세 번의 전쟁만 기술해놓았다. 결론은, 역사는 이긴 자가 아니라 기록한 자의 것이고, 기록을 유실하지 않고 보관해 성공적으로 후세에 전한 자들의 것이라는 진실. 중요한 건, 누군가가 끝까지 살아남아 투쟁의 전 과정을 기록하는 것. 이 책에서도 막스 갈로는 스파르타쿠스의 입을 통해 선언한다. “기록되는 사람은 죽지 않는 법이야.”
 나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매력을 느끼는 만큼 막강한 통일 진秦나라 군대의 말단 하사관 계급 진섭陳涉의 반란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 또 우리나라 역사에서 진정한 영웅은 스스로 밭을 갈고 똥지게를 날라야 했던 왜소한 체구의 잔반殘班 전봉준이라고 여긴다. 예속과 핍박과 노예상태 또는 노예상태에 준하는 착취에서 스스로 백성들을 규합하고 체제를 전복시키려했던 인물들. 이들의 공통점은 스스로 반란에 성공하여 권력을 탈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겉으로는 몰라도 진심으로는 해보지 못했으면서도 거세게 저항했다는 점. 이들이 진정한 혁명가 아니었겠는가.
 책은 생각만큼은 재미있지 않았다. 그건 정말로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생각해온 스파르타쿠스의 격랑과 폭풍과 투쟁은, 이제 다시 생각해보니, 삼국지연의에서 단칼에 목이 떨어지고 일마단기로 적진을 휩쓰는 무협지, 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긴박감 넘치게 보아온 드라마틱한 장면으로만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스 갈로라는 사학자는 결코 그렇게 쓰지 않았으며 그리 쓸 수도 없었겠지. 주어진 사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보다 객관적인 한 노예출신의 영웅의 삶을 자신의 역사관에 맞게 서술해나갔겠지. 언제나 진짜 인간의 삶은 드라마나 영화, 무협지보다는 덜 드라마틱하니까 당연히 생각보다는 재미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더욱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몇 달 후, 갈로의 두 번째 로마 인물 소설 <네로의 비밀>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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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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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그느넬 가 7번지, 부르주아 계급이 거주하는 아파트에 진짜로 머리 좋은, 거의 천재 수준의 여자 두 명이 우연하게도 한 지붕을 이고 산다. 이 여자들에 대한 묘사를 한 번 옮겨보자.


 내 이름은 르네. 쉰네 살. 이 건물의 수위 아줌마다. 나는 과부고, 못생겼고, 오동통하고, 발에는 못이 박여 있고, 나를 혐오하는 자들의 말을 빌리자면 아침엔 가끔 입에서 매머드 냄새가 풍긴다고 한다. 학교는 가보지도 못했고, 항상 가난했고, 말이 없었고, 남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나는 열두 살이고, 우리 부모는 부자이고, 우리 가족은 부유하고, 언니와 나는 당연히 잠정적으로 부자다. 아빠는 예전에 장관을 거친 국회의원이고, 결국 국회의장이 되어 국회의장 공관이 라세 관館의 포도주 저장고를 비우게 될 것이다. 엄마는 결코 석학은 아니지만 많이 배웠다. 엄마는 문학박사다. (얘 이름? ‘팔로마 조스’다.)


 먼저 르네. 지독하게 가난한 산골마을 출신. 가난한 여자에겐 과하게 아름답게 생긴 것 못지않게 과하게 똑똑한 것도 큰, 크나큰 결점이었다(과거시제다. 오해 없기를). 20세기 중반까지도 너무 가난해서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여자에겐 과하게 아름다운 것도, 과하게 똑똑한 것도 오직 불행만을 예고할 뿐이었다. 이건 동서가 마찬가지다. 다행스럽게 르네는 아름다운 외모를 갖지 않았다. 열세 살에 끝나고 만 학교생활에서 르네는 알파벳의 무한 조합과 멋진 소리가 주는 아름다움을 단박에 알아채, 처음엔 몰래, 그 후엔 독서가 줄 즐거움과 이익을 마음속에 숨긴 채 만끽하는 한편, 독서가 줄 즐거움과 이익에 언제나 배고파하는 소녀였다. 자신이 또래들과 비교해 월등하게 우월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숨겨야 한다는 지혜까지 습득한 애늙은이였던 거다. 그러나 일찌감치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일도 하고, 부모 형제들과 함께 밭에서 일을 하다가 열일곱에 결혼을 했다.
 이미 열다섯에 휜 등, 굵은 허리, 짧은 다리, 팔자걸음, 수북한 털, 탁한 인상 등으로 쉰 살처럼 보인 르네 앞에 뤼시앵이 나타나 너무나도 20세기답게 청혼을 한다.
 “르네, 난 음탕한 여자가 될 뛰어난 여자들이나 예쁜 얼굴 뒤에 참새 뇌 이상의 것은 없는 여자 중의 하나가 내 처가 되길 원치 않아. 난 정조를 지키는 여자, 좋은 아내, 좋은 엄마, 좋은 주부를 원해. 난 내 옆에 있어주고, 나를 지지해주는 조용하고 신실한 동반자를 원해. 반대로 넌 내게 성실히 일하고, 집에서는 조용하고, 좋은 순간에는 부드러운 사람을 바라도 돼. 난 나쁜 놈도 아니고, 최선을 다할 거야.”
 이처럼 느릅나무 그루터기처럼 조그맣고 투박하지만 그래도 늘 미소를 띤 보기 좋은 얼굴을 한, 비록 교양은 없지만 모든 것에 재간이 있을 뿐만 아니라 부드러운 예절을 갖춘 동반자, 그리고 지식인은 아니나 그보다 덜 영리하지도 않은 뤼시앵 미셸과 혼인을 하고, 27년 전부터 아파트 수위로 있다가 15년 전에 암으로 뤼시앵을 떠나보낸 뒤 수위실과 지하방에 터를 잡고 홀로 살고 있었다. 원래부터 문자가 만들어놓은 모든 업적을 이해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르네는, 파리에 널려있는 도서관과 미술관, 박물관을 순례하며 매우, 매우 상당한 수준의 철학, 역사, 미술, 음악적 소양을 완전한 독학으로 습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앞에서 얘기했듯 너무 가난해서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시골 출신의 여자가 부르주아들만 사는 아파트의 수위로 먹고 살면서, 자신이 그들보다 지적으로 한참 윗길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건 자신에게 오직 불행만을 약속할 뿐이라는 굳센 신념으로 자신을 은폐하고 스스로 폐쇄해버린다.


 앞으로 국회의장이 될 것 같은 아버지를 둔 팔로마 조스는 이제 열두 살. 아무리 공부를 하지 않아도 국어, 수학, 역사 등등 모든 과목에서 일등을 먹는 특별한 존재지만, 자신만큼 똑똑하고 공부에 재능 있고, 다른 사람과 다르고,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뛰어난 존재마저도 역시 삶은 이미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이미 이해해버린 조숙한 아가씨. 아직 사춘기를 맞지도 않았으면서도 세상은 너무 부조리하여, 겨우 열두 살밖에 먹지 않았으면서 세상살이란 마치 어항 속의 빨간 금붕어 같아, 투명한 유리벽에 머리통을 퉁퉁 부딪기만 할 뿐,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을 넘어갈 수 없다는 데 벌써 “절망”을 했다.
 세상은 언제나 똑같을 것이고, 우둔함은 늘 뭔가를 꿈꾸는 반면, 자신처럼 뛰어난 사람의 성공은 인생을 씁쓸하게 만든다고 확신하는 이 꼬마 아가씨는 그리하여 돌이킬 수도 없고 취소할 수도 없는 결과를 초래할, 한 가지 결심을 하고 만다. 열세 살이 되는 6월 16일에 그르넬 가 7번지 아파트에 불을 질러버리고, 소방대에 전화를 해서 기술적으로 자기네 집만 불태운 다음, 외갓집에 가서 자살을 해버리는 거다. 어떻게 죽을까? 물에 빠져 죽거나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독극물을 삼켜 위와 장의 고통을 유발하거나, 심지어 혀를 빼물고 목을 매다는 건 생각만 해도 정말 바람직하지 못해서, 수년간 정신분석에 매력을 느껴 일 년에 6천유로 씩 지불해가며 얻은 처방전에 의거해 거의 매일 수면제를 복용하는 엄마의 약병에서 역시 수년간 매달 딱 한 정의 수면제를 모아놓기를 한 번도 빼먹지 않아, 수십 알에 이른 수면제를 한 번에 꿀꺽 삼켜 잠자는 듯 죽어버리기로 결정을 했다.


 쉰네 살의 은둔 폐쇄형 천재 수위 아줌마와, 열두 살의 천재 꼬마 아가씨가 서로 이렇게 살고, 불싸지르고, 자살하면 그게 소설이야? 여기에, 책이 어느덧 중간쯤 도달했을 때, 한 명의 문제적 인물이 등장한다. 영상, 음향기기 수입업자였다가 이제 은퇴한 무지 돈 많은 일본인 가쿠로 오즈. 왜 여기서 생뚱맞게 일본 남자, 오즈, 오즈의 마법사가 등장하느냐고? 이 책을 쓴 뮈리엘 바르베리의 일본 선호 때문이라고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대목에서 바르베리의 전작 <맛>을 떠올렸다. 데뷔작이자 히트작인 <맛>에서 바르베리는 수다한 음식들을 열거하고, 각 음식들이 주는 아주 독특한 맛의 향연을 “문자화”하는데 대단한 능력을 보여준 바 있다.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인 <고슴도치...>에서도 여러 음식에 관한 촌평이 나온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음식이 한 점에 40유로씩 하는 ‘생선회’였다. 물론 이것 말고도 작가는 일본의 특정한 미학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외, 오주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무나카타 자매>에 나온다는 이끼 위에 핀 동백꽃, 교토에 있다는 진보라빛 산봉우리들 같은 것들. 왜 굳이 일본의 미학까지 사용하기에 이르렀을까. 바둑을 일본의 문화라고 주장하는 아버지 친구한테 그건 중국의 것이라고 바락바락 기어오르다 아빠한테 꾸중을 듣는 팔로마의 예를 보면 꼭 바르베리의 일본 취향이라고 할 이유도 없는데. 혹시 외로운 철학자 르네 아줌마가 수십 년 간 지하방과 도서관에서 습득했던 문화적 경지가 유럽 권에만 머물지 않고 동양권역까지, 그러니까 거의 무한대까지 이르렀다는 얘길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실 일본 문화는 생선회, 영화 <무나카타 자매>, 그리고 소위 망가라는 일본 만화에 국한한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닐 수도 있고.
 톨스토이를 흠모하는 르네가 우연하게 던진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알아들은 일본인 오즈 씨는 그녀를 입주자 전부가 알 수 있게 내놓고 리모델링한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사실 집 안에서는 특별한 일본식이라 내놓을 만한 것은 없다. 오히려 집에 들어서자마자 르네의 눈을 사로잡았던 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에테르 클로스Pieter Claesz의 모사 정물화.

 

(책에서 오즈 씨의 아파트 벽에 걸린 그림이 이건 아니다. 클로스의 그림 가운데 설명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골랐다.)


 이 그림이 모사품이라는 것도, 클로스가 그렸다는 것도, 화가가 17세기 네덜란드 사람이란 것도 한 눈에 알아보는 르네. “속을 편안하게 하는 곳은 어딘가요?” 라는 물음 끝에 화장실에 들어가 좁은 방광을 비운 르네는 또, 변기 물을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난데없이 터져 나온 포르테 시모의 “Confutatis”.

 

 

 모차르트 미완성 진혼미사곡의 일곱 번째 곡 역시 비록 방광을 비운 뒤 옷도 올리지 못한 채 황망하게, 화들짝 놀란 상태로 들어서 그렇지, 귀에 선율이 닿자마자 곧바로 모차르트가 작곡한 어떤 곡인지 알아내는 지성을 (자신은 그리 숨기려 했건만)과시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거기다가 칸트 부터 에드문트 후설까지 온갖 철학적 소견을 떠르르 꿰는 다방면의 천재상태를 그나마 자연스레 보여줄 수 있게 만드는 '상대 인물'로, 바르베리는 (편견에 사로잡힌)유럽인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왕이면 가장 먼 곳, 동양의 끝, 일본 아니었을까? 그중에서 난 생선회와 메밀국수 등 미각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에 만 원 건다. 실제로 그르넬 가 7번지 아파트에서 생을 마감하는 한 입주자의 직업이 프랑스 최고 권위의 맛 전문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그렇다. 르네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국의 남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내 의견에 동의해주기 바란다. 프랑스의 오래 묵은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여성” 또는 “가난하지만 영리한 여성”에 대한 편견 없이 접근이 가능한 50대 중반부터 60대 초반까지의 “돈 많은” 남자를 어디서 구해야 할까.


 자, 얘기는 다 했다. 비록 48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이지만 바르베리의 감각적 문장들은 읽는 즐거움을 주기 충분하고, 가끔 숨어있는 간질간질한 장면들도 재미있는데, 420쪽을 넘기면서 적어도 콧잔등이 시큰해지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도 아니라고 여기게 될 만큼, 한 여성이 편견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정 있게 그린 작품이라고 단정해도 무방하리라. 진짜배기는 언제나 마지막에 나온다. 그 진짜배기가 뭐냐고? 안 알려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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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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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책을 다 읽고 이제 독후감을 쓰려 표지를 넘기니 원래 제목이 나오는데, 제7천(第七天), ‘일곱 번째 하늘’이란다. 원래 제목이 작은 글씨로 씌어있어 모르고 그냥 넘어간 거다. 게다가 서문을 이렇게 해놓았음에야.
 “하느님께서는 /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 손을 떼고 쉬셨다  - 창세기”
 이러니 애초부터 “하느님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뭐 이런 거, 그래서 바야흐로 세상이 창조되고 마지막 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즉 세상을 만드는 일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걸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설레발 꾼으로 이름이 높은 위화가 어떻게 구라를 풀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근데 원래 제목하고는 좀 다른 거 아냐? 무척 유명하지만 정작 전편을 다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서유기>나  <봉신연의> 같은 책에서 나오는 도교적 분위기의 “일곱 번째 하늘”이나 “아홉 번째 하늘”이니 뭐 이런 것들하고 좀 헛갈리는데, 책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또 단테가 20세기 중국에 다시 태어나 “지옥”을 고쳐 쓰는 과정에 마치 “림보”, 즉 지옥의 변방에 있는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서 차마 천국의 선을 넘어가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갖지 못한 착한 사람들의 영역”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책의 무대가 바로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며, 그곳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풀이 가득하며 나무가 무성하고 나뭇가지에는 과실이 가득하고, 전부 심장 모양인 나뭇잎이 심장박동의 리듬으로 흔들리는” 장소로 거기서 유留하는 영혼들 모두 진짜 선량한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지옥의 림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으리오.

 (이렇게 썼는데, 어느 분이 말씀 하시길, '第七天' '일곱 번째 날'이란 뜻이란다. 그러니 위에서 짐작했던 건 틀린 말이다. 참고하시기를.)
 40년, 정확하게 41년 전에 중국의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번잡한 기차에서 이미 두 자녀를 둔 만삭의 여사님 한 분이 일이 급해 수화물을 든 사람들을 피해 기차 화장실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기차 화장실에는 위생시설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변기도 그냥 구멍만 뻥 뚫려 있어서 내려다보면 변기 아래로 침목이 휙휙 지나갔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이야 눈으로 보지 않아서 에이, 설마 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열차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만삭의 여사님은 배가 하도 불러 바지를 벗고 쭈그려 앉을 수 없어 지저분한 화장실에 무릎을 꿇고선 힘을 주었는데, 아 글쎄 나오려면 앞으로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아이가 그만 쑥 빠져버렸던 거다. 아이는 곧바로 달리는 기차 아래 침목으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당했는바,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이제 정거장에서 막 출발하는 때가 되어 침목 위로 털썩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변기 모서리에 탯줄만 탁, 끊어진 채로 차가운 땅 위에 안착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산모는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낳은 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그만 혼절을 했고.
 당시 스물한 살의 철도원 양진바오가 밤에 철길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가 새끼 새소리처럼 힘없이 삐약대는 게 들려서 가 보니, 발갛고 조그만 갓난아이가 철로 위에 떨어져 있었고 이 아이에게는 놀랍게도 꼬리까지 달려 있었던 거였다. 그래 깜짝 놀라서 얼른 들쳐 안고 마침 며칠 전에 아이를 낳아 젖을 생산해내는 동료 철도원의 아내한테 냅다 달려가 젖을 물려 아이를 살려내니 세상에 이렇게 운이 좋을 수 있었을까. 아이한테 달린 꼬리는 너무 길게 잘린 탯줄임을 알고 밝은 날 의사를 찾아가 잘라낸 다음, 스물한 살의 착한 청년 양진바오가 그냥 데리고 살기로 결정해서 이름을 양페이라 했단다. 졸지에 나이 스물하나의 청년에게 아들이 하나 생긴 턱. 얼른 아이를 고아원에라도 보내야 자신의 인생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을, 엉뚱하게 얻은 아들 때문에 평생을 홀아비 또는 노총각으로 살게 되니 그것도 인생이다, 인생.
 이런 것들. 그러니까 1960년대 출생한 양페이가 어느 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식당에 들러 국수를 먹으며 신문을 보고 있는데, 신문에는 날 버리고 부잣집 남자와 결혼한 전처가 권력자의 정부임이 밝혀져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기사에 넋을 잃고 있는 순간, 하필이면 식당 부엌에서 뭔가가 크게 폭발하여 인생을 종치고 만다. 그런데, 주인공 양페이가 죽음을 맞는 순간, 당연히 소설은 끝나버리고 마는 게 아니라, 이제 바야흐로 20세기 중국판 <신곡>의 “지옥편”을 시작하는 거다. 그중에서도 림보.
 위에서 얘기한 주인공 ‘나’ 양페이의 출생과 죽음, 전처 리칭과의 결혼과 이혼, 양아버지와 이웃 젖어머니와의 가슴 절절한 부성과 모성, 서로 사랑하는 가난한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애정 등은 이제 죽어 일곱 번째 하늘, 림보에 도착한 영혼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밝혀지는 이야기들이다. 위화는 놀랍게도 20세기 중국의 <신곡>, 달리 말하면 ‘어른들을 위한 우화’를 쓰기로 작정을 했다. 모든 이들은 사랑, 그것도 지독하게 진실한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작중에 쉼 없이 20세기 후반 중국의 부패와 부조리, 사회적 폭력 등을 적절하게 포함시켜나가기도 한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소설을 쓰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문제들을 표현하기만 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나 행동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중국 소설들의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어쩌랴, 그들에게 ‘그럼 뭐가 중헌디?’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생존”이란 답이 나올 터이니. 기억하시라. 내가 읽어본 그의 전작들로 감을 잡아 말씀드리자면, 위화가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는 모습은 문화혁명 전의 순진한 공산주의 시절하의 중국이 아니겠느냐, 하는 거. 그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매운 손톱이 지나간 중국의 도시와 농촌은 언제나 큰 한 부분이 상당히 궁핍하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벌어지는 영혼들의 이야기. 다른 말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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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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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콜드 블러드>의 작가가 Truman Capote 트루먼 커포티('카'포티 또는 '캐'포티일 거 같은데 왜 '커'포티라고들 쓰는지 모르겠다)가 1943년부터 1982년까지 완성한 단편소설 스무 편을 실었다. 단편선이어서 작은 분량의(두껍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다가 책을 펴보니 레이놀스 프라이스가 쓴 서문을 포함해서 505쪽이다. ‘시공사’에서 찍었다. 그래, 이런 게 책이지. 요새 스무 편의 단편을 모아 500쪽을 넘기는 책을 보기 힘들다. 다른 몇몇 메이저 출판사 같았으면 두 권으로 분책했을 확률이 높다. 시공사도 고민을 해봤을 텐데 원래의 책 그대로 한 권으로 만들었다. 작가도 이미 세상을 떠 굳이 원작자의 눈치를 봐야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분책의 고민도 그만큼 더 심하지 않았을까?
 단편 소설집은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물론 김승옥이나 오정희의 절창들이 섞여 있으면, 예를 들어 <서울, 1964년 겨울>이나 <중국인 거리>에 집중해서 독후감을 만들어나가면 괜찮겠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을 땐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변명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이 수준이 낮다는 얘기, 아니다. 먼저 나는 (단편)소설의 수준을 논할 자격과 소양이 되지 않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더구나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트루먼 커포티의 작품을 읽고 수준 운운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장편과 달리 단편은 짧은 텍스트 안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의미와 분위기, 까다롭고 배타적인 은유의 맛에 동감해야 진짜 해당 작품을 읽었네, 할 수 있는 것이라서, 1940년대 중반 미국 남부지역의 전반적 공기를 극동아시아 변두리 지역 출신의 한 이방인이 그것도 번역된 소설을 읽고 해당 작품에 공감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부 미국에서 1940년대 중반에 벌어진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내용이라면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카슨 매컬러스. 매컬러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고딕 적 요소는 아니지만 비슷한 분위기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으로 그냥 갈피만 휘적휘적 넘기고 말았던 레이놀스 프라이스의 서문에서 정말로 카슨 매컬러스를 짚어나가는 걸 읽고 기분이 조금은 삼삼했다(아직도 하찮은 거에 우쭐거리는 모습이라니!).
 책에 실린 스무 편의 단편소설들 가운데 중요한 한 부류가 자신의 소년시절 이야기임에 틀림없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었다. 부모가 어려서 세상살이를 모르는 채 결혼을 해 주인공을 낳고, 서로의 개성과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알아차려 헤어지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을 외가 쪽 친척들 가운데 나이든 미혼의 남자 하나, 역시 미혼의 여자 셋이 모여 사는 남부의 (부르주아 수준까지는 아니고)중산층 저택에 의뢰해서 키워주기를 부탁한다. 주인공은 친족 간 촌수를 몰라 이들을 그냥 나이든 사촌이라고 칭하는데, 이중에서 늙은 개를 키우는 아주, 아주, 아주 선량한 ‘숙’이란 이름의 나이든 여성과 돈독한 우정을 맺으며 지역사회에서 (즉, 이방의 꼬맹이로)성장하다가 기숙학교로 떠나기까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쓴 단편들. 나이 든 ‘숙’사촌의 진짜 이름은 뭐였을까? 희숙? 창숙? 영숙? 진숙? 정숙? 미숙? 신숙? 기숙? 재숙? 혜숙? 성숙? 문숙? 상숙? 인숙? 동숙? 명숙? 한숙? 남숙? 화숙? 부모. 그 가운데 특히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유년을 거쳐 소년기를 마감하는 ‘나’는 트루먼 커포티의 삶을 소개한 짧은 글만 읽어도 금방 작가 자신임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나’는 숙이란 이름의 사촌으로부터 항상 겸손하고, 검약하고, 자애롭고, 독실한 기독교도 적인 배려를 받고 자랄 수 있어서, 정말로 친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시골을 떠나 나름대로 대도시인 뉴올리언스를 방문하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친아버지를 만나는데 그게 반갑지 않느냐고? 충분히 그럴 걸? 이제 막 소년으로 접어든 아홉 살 꼬마, 우리나이로 열 살 꼬맹이가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본 적도 없고, ‘나’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보낸 편지 한 장 받은 적 없던 친아버지란 인물은 그냥 얼굴 아는 성인 남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런 유소년 시절을 따듯한 남부 시골 지역에서 보낸 건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트루먼 커포티에게 주어진 선물일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 외 세계대전 중 미국의 도시에서 만난 군인들처럼 차마 내놓고 당신들과 더 이상 엮이기 싫다고 얘기하진 못해도 마음속에선 그들을 심하게 경원하는 사람들의 진짜 고백, 예전의 좋은 시절을 떠나보낸 친구가 등장해 자신의 물품들을 떠넘기고 돈을 얻어가는 장면들, 이런 것들도 비슷한 내용으로 두어 작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문제는 앞에서 얘기했듯 그런 분위기를 공감해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느냐 하는 건데, 내 경우엔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임에도 다리를 치며 참으로 멋있는 단편이다, 정말 내 취향하고 딱 맞는다,라고 감탄할 만한 건, 유감스럽게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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