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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평점 :
어? 책을 다 읽고 이제 독후감을 쓰려 표지를 넘기니 원래 제목이 나오는데, 제7천(第七天), ‘일곱 번째 하늘’이란다. 원래 제목이 작은 글씨로 씌어있어 모르고 그냥 넘어간 거다. 게다가 서문을 이렇게 해놓았음에야.
“하느님께서는 /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 손을 떼고 쉬셨다 - 창세기”
이러니 애초부터 “하느님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뭐 이런 거, 그래서 바야흐로 세상이 창조되고 마지막 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즉 세상을 만드는 일의 완결을 의미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걸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설레발 꾼으로 이름이 높은 위화가 어떻게 구라를 풀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근데 원래 제목하고는 좀 다른 거 아냐? 무척 유명하지만 정작 전편을 다 읽어본 사람은 별로 없는 <서유기>나 <봉신연의> 같은 책에서 나오는 도교적 분위기의 “일곱 번째 하늘”이나 “아홉 번째 하늘”이니 뭐 이런 것들하고 좀 헛갈리는데, 책을 다 읽고 마지막 페이지까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또 단테가 20세기 중국에 다시 태어나 “지옥”을 고쳐 쓰는 과정에 마치 “림보”, 즉 지옥의 변방에 있는 지옥과 천국의 경계에서 차마 천국의 선을 넘어가지 못한 “그리스도를 믿을 기회를 갖지 못한 착한 사람들의 영역”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책의 무대가 바로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이기 때문이며, 그곳은 “물이 졸졸 흐르고 푸른 풀이 가득하며 나무가 무성하고 나뭇가지에는 과실이 가득하고, 전부 심장 모양인 나뭇잎이 심장박동의 리듬으로 흔들리는” 장소로 거기서 유留하는 영혼들 모두 진짜 선량한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지옥의 림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으리오.
(이렇게 썼는데, 어느 분이 말씀 하시길, '第七天' '일곱 번째 날'이란 뜻이란다. 그러니 위에서 짐작했던 건 틀린 말이다. 참고하시기를.)
40년, 정확하게 41년 전에 중국의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는 번잡한 기차에서 이미 두 자녀를 둔 만삭의 여사님 한 분이 일이 급해 수화물을 든 사람들을 피해 기차 화장실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기차 화장실에는 위생시설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변기도 그냥 구멍만 뻥 뚫려 있어서 내려다보면 변기 아래로 침목이 휙휙 지나갔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이야 눈으로 보지 않아서 에이, 설마 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 열차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만삭의 여사님은 배가 하도 불러 바지를 벗고 쭈그려 앉을 수 없어 지저분한 화장실에 무릎을 꿇고선 힘을 주었는데, 아 글쎄 나오려면 앞으로 한 달을 기다려야 하는 아이가 그만 쑥 빠져버렸던 거다. 아이는 곧바로 달리는 기차 아래 침목으로 떨어지는 불상사를 당했는바, 천지신명의 도움으로 이제 정거장에서 막 출발하는 때가 되어 침목 위로 털썩 떨어지면서 날카로운 변기 모서리에 탯줄만 탁, 끊어진 채로 차가운 땅 위에 안착을 할 수 있었던 거였다. 산모는 처음엔 자신이 아이를 낳은 지조차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사실을 알고는 그만 혼절을 했고.
당시 스물한 살의 철도원 양진바오가 밤에 철길 위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가 새끼 새소리처럼 힘없이 삐약대는 게 들려서 가 보니, 발갛고 조그만 갓난아이가 철로 위에 떨어져 있었고 이 아이에게는 놀랍게도 꼬리까지 달려 있었던 거였다. 그래 깜짝 놀라서 얼른 들쳐 안고 마침 며칠 전에 아이를 낳아 젖을 생산해내는 동료 철도원의 아내한테 냅다 달려가 젖을 물려 아이를 살려내니 세상에 이렇게 운이 좋을 수 있었을까. 아이한테 달린 꼬리는 너무 길게 잘린 탯줄임을 알고 밝은 날 의사를 찾아가 잘라낸 다음, 스물한 살의 착한 청년 양진바오가 그냥 데리고 살기로 결정해서 이름을 양페이라 했단다. 졸지에 나이 스물하나의 청년에게 아들이 하나 생긴 턱. 얼른 아이를 고아원에라도 보내야 자신의 인생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을, 엉뚱하게 얻은 아들 때문에 평생을 홀아비 또는 노총각으로 살게 되니 그것도 인생이다, 인생.
이런 것들. 그러니까 1960년대 출생한 양페이가 어느 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식당에 들러 국수를 먹으며 신문을 보고 있는데, 신문에는 날 버리고 부잣집 남자와 결혼한 전처가 권력자의 정부임이 밝혀져 손목을 긋고 자살했다는 기사에 넋을 잃고 있는 순간, 하필이면 식당 부엌에서 뭔가가 크게 폭발하여 인생을 종치고 만다. 그런데, 주인공 양페이가 죽음을 맞는 순간, 당연히 소설은 끝나버리고 마는 게 아니라, 이제 바야흐로 20세기 중국판 <신곡>의 “지옥편”을 시작하는 거다. 그중에서도 림보.
위에서 얘기한 주인공 ‘나’ 양페이의 출생과 죽음, 전처 리칭과의 결혼과 이혼, 양아버지와 이웃 젖어머니와의 가슴 절절한 부성과 모성, 서로 사랑하는 가난한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애정 등은 이제 죽어 일곱 번째 하늘, 림보에 도착한 영혼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밝혀지는 이야기들이다. 위화는 놀랍게도 20세기 중국의 <신곡>, 달리 말하면 ‘어른들을 위한 우화’를 쓰기로 작정을 했다. 모든 이들은 사랑, 그것도 지독하게 진실한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작중에 쉼 없이 20세기 후반 중국의 부패와 부조리, 사회적 폭력 등을 적절하게 포함시켜나가기도 한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소설을 쓰는 직업인이기 때문에 문제들을 표현하기만 하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나 행동은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중국 소설들의 문제점이기도 하지만, 어쩌랴, 그들에게 ‘그럼 뭐가 중헌디?’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생존”이란 답이 나올 터이니. 기억하시라. 내가 읽어본 그의 전작들로 감을 잡아 말씀드리자면, 위화가 유토피아로 여기고 있는 모습은 문화혁명 전의 순진한 공산주의 시절하의 중국이 아니겠느냐, 하는 거. 그의 시각에서 자본주의의 매운 손톱이 지나간 중국의 도시와 농촌은 언제나 큰 한 부분이 상당히 궁핍하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에서 벌어지는 영혼들의 이야기. 다른 말로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