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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ㅣ 트루먼 커포티 선집 5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3년 6월
평점 :
<인 콜드 블러드>의 작가가 Truman Capote 트루먼 커포티('카'포티 또는 '캐'포티일 거 같은데 왜 '커'포티라고들 쓰는지 모르겠다)가 1943년부터 1982년까지 완성한 단편소설 스무 편을 실었다. 단편선이어서 작은 분량의(두껍지 않은) 책이라고 생각했었다가 책을 펴보니 레이놀스 프라이스가 쓴 서문을 포함해서 505쪽이다. ‘시공사’에서 찍었다. 그래, 이런 게 책이지. 요새 스무 편의 단편을 모아 500쪽을 넘기는 책을 보기 힘들다. 다른 몇몇 메이저 출판사 같았으면 두 권으로 분책했을 확률이 높다. 시공사도 고민을 해봤을 텐데 원래의 책 그대로 한 권으로 만들었다. 작가도 이미 세상을 떠 굳이 원작자의 눈치를 봐야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 분책의 고민도 그만큼 더 심하지 않았을까?
단편 소설집은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물론 김승옥이나 오정희의 절창들이 섞여 있으면, 예를 들어 <서울, 1964년 겨울>이나 <중국인 거리>에 집중해서 독후감을 만들어나가면 괜찮겠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을 땐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변명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이 수준이 낮다는 얘기, 아니다. 먼저 나는 (단편)소설의 수준을 논할 자격과 소양이 되지 않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더구나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인 트루먼 커포티의 작품을 읽고 수준 운운하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장편과 달리 단편은 짧은 텍스트 안에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의 의미와 분위기, 까다롭고 배타적인 은유의 맛에 동감해야 진짜 해당 작품을 읽었네, 할 수 있는 것이라서, 1940년대 중반 미국 남부지역의 전반적 공기를 극동아시아 변두리 지역 출신의 한 이방인이 그것도 번역된 소설을 읽고 해당 작품에 공감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남부 미국에서 1940년대 중반에 벌어진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내용이라면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카슨 매컬러스. 매컬러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고딕 적 요소는 아니지만 비슷한 분위기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으로 그냥 갈피만 휘적휘적 넘기고 말았던 레이놀스 프라이스의 서문에서 정말로 카슨 매컬러스를 짚어나가는 걸 읽고 기분이 조금은 삼삼했다(아직도 하찮은 거에 우쭐거리는 모습이라니!).
책에 실린 스무 편의 단편소설들 가운데 중요한 한 부류가 자신의 소년시절 이야기임에 틀림없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었다. 부모가 어려서 세상살이를 모르는 채 결혼을 해 주인공을 낳고, 서로의 개성과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걸 알아차려 헤어지기로 결정을 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을 외가 쪽 친척들 가운데 나이든 미혼의 남자 하나, 역시 미혼의 여자 셋이 모여 사는 남부의 (부르주아 수준까지는 아니고)중산층 저택에 의뢰해서 키워주기를 부탁한다. 주인공은 친족 간 촌수를 몰라 이들을 그냥 나이든 사촌이라고 칭하는데, 이중에서 늙은 개를 키우는 아주, 아주, 아주 선량한 ‘숙’이란 이름의 나이든 여성과 돈독한 우정을 맺으며 지역사회에서 (즉, 이방의 꼬맹이로)성장하다가 기숙학교로 떠나기까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쓴 단편들. 나이 든 ‘숙’사촌의 진짜 이름은 뭐였을까? 희숙? 창숙? 영숙? 진숙? 정숙? 미숙? 신숙? 기숙? 재숙? 혜숙? 성숙? 문숙? 상숙? 인숙? 동숙? 명숙? 한숙? 남숙? 화숙? 부모. 그 가운데 특히 어머니의 정을 모르고 유년을 거쳐 소년기를 마감하는 ‘나’는 트루먼 커포티의 삶을 소개한 짧은 글만 읽어도 금방 작가 자신임을 알 수 있는데, 그래도 ‘나’는 숙이란 이름의 사촌으로부터 항상 겸손하고, 검약하고, 자애롭고, 독실한 기독교도 적인 배려를 받고 자랄 수 있어서, 정말로 친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시골을 떠나 나름대로 대도시인 뉴올리언스를 방문하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랜만에 친아버지를 만나는데 그게 반갑지 않느냐고? 충분히 그럴 걸? 이제 막 소년으로 접어든 아홉 살 꼬마, 우리나이로 열 살 꼬맹이가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본 적도 없고, ‘나’에게 영향을 끼치기 위해 보낸 편지 한 장 받은 적 없던 친아버지란 인물은 그냥 얼굴 아는 성인 남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바로 그런 유소년 시절을 따듯한 남부 시골 지역에서 보낸 건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트루먼 커포티에게 주어진 선물일 수도 있었지 않을까.
그 외 세계대전 중 미국의 도시에서 만난 군인들처럼 차마 내놓고 당신들과 더 이상 엮이기 싫다고 얘기하진 못해도 마음속에선 그들을 심하게 경원하는 사람들의 진짜 고백, 예전의 좋은 시절을 떠나보낸 친구가 등장해 자신의 물품들을 떠넘기고 돈을 얻어가는 장면들, 이런 것들도 비슷한 내용으로 두어 작품이 등장하기도 한다. 문제는 앞에서 얘기했듯 그런 분위기를 공감해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느냐 하는 건데, 내 경우엔 나름대로 흥미로운 이야기들임에도 다리를 치며 참으로 멋있는 단편이다, 정말 내 취향하고 딱 맞는다,라고 감탄할 만한 건, 유감스럽게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