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계 ㅣ 민음의 시 163
윤의섭 지음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책, 특히 시집을 한 권 사서 제일 감격스러울 때는, 페이지를 넘기면서 어쩌면 그렇게 외우고 싶은 시들이 넘쳐날 때, 그 기분 아시지? 그런데 그런 경우는 사실 상당히 드물고, 더구나 요즘 시집들 보면 하나같이 길어서 도무지 외워볼 엄두가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 그래도 시집 한 권을 읽으면 적어도 한 편 정도는 좋다, 이거 한 번 외워버리고 만다, 하는 심정이 들어야 그나마 본전을 뽑는 기분이 든다. 시 좋아하는 분의 SNS에서 본 얘기, “시집 한 권에 한두 편 건지면”이란 거. 그럼 윤의섭의 시집 <마계>는? 완전히 내 취향에만 국한시켜 말씀드리자면, 본전도 못 건졌다. 지금 막 <마계>를 다 읽고 PC 켜서 독후감을 쓰려 앉았는데 “건진 시”는 하나도 없고, 생각나는 시도 별로 없다. 다시 말씀드리는 바, 이건 전적으로 문학적 소양이 없는 내 취향과 결부시켜 하는 말이다. 나는 시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도 없는 시적 무교양의 영역에서 노닐고 있는 일반인이라 시집 <마계>와 속에 든 시들과 시인을 평가할 조금의 자질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왜 본전도 건지지 못했는가 하면, 시들이 과하게 암울하다.
들여다보면 마법의 세계다.
시를 쓰지 않아도 천지에 시가 자란다.
환상통은 아니다.
위는 시인이 스스로 쓴 서문으로의 자서自序다. 여기서 '환상통'은 환상을 보거나 느낄 때의 통증 즉 幻像痛 또는 幻想痛일 거다. 본문으로 들어가면 앞쪽의 작품들은 자서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법의 세계’, 시가 자라는 천지, 즉 자연을 무대로 마법이 벌어지고 있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장대비는 더욱 거세졌다 / … / 그제야 풍경은 홀연히 살아나는 것이었다 / 뭉개진 얼굴로 물의 칼을 등에 꽂은 채 / 아니면 빗물을 다 받아 마실 듯한 기세로 / 하늘과의 경계가 지워진 산등성이가 꿈틀거리고 / (후략) ” <起源> 11쪽 부분
본문에 실린 첫 번째 시가 <起源>이다(기원起源은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내 친구 이름이기도 하다). 마법의 세계에서는 하늘에서 거친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도 풍경이 홀연히 살아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이 “뭉개진 얼굴로 물의 칼을 등에 꽂”는 행위이며 쏟아지는 “빗물을 다 받아 마실 듯한 기세로 산등성이가 꿈틀거리는” 모습이다. 왜 뭉개진 얼굴을 한 짙고 검은 구름은 물의 칼을 하필이면 “등”에 꽂았을까? 가슴이나 심장이 아니고. 물의 칼을 받은 객체가 산등성이, 다시 한 번 발음해서, 산.“등”.성.이.라서 그랬을까? 그리고 나서는 또 곧바로 “아니면 (쏟아지는) 빗물을 다 마실 듯한” 장쾌한 마법의 기세로 꿈틀거리는 산등성이. 다시 강조한다. 나는 시를 모르는 그냥 독자일 뿐이다.
몇 쪽 뒤 <구름의 율법>이란 시를 보면,
“파헤쳐 보면 슬픔이 근원이다 / 주어진 자유는 오직 부유 / 지상으로도 대기권 너머로도 이탈하지 못하는 궤도를 질주하다 / 끝없는 변신으로 지친 몸에 달콤한 휴식의 기억은 없다” 고 구름의 본질을 슬픔으로 규정한다. 구름에게 주어진 오직 하나의 자유는 땅과 하늘 사이 그것도 대기권 너머로는 엄두도 내지 못하면서 부유하는 행위뿐이다. 그리하여 구름은 “너무 무거워도 너무 가벼워도 살지 못하는 중천이라 여기고 / 부박한 영혼의 뿌리엔 오늘도 별빛이 잠든다 / 이번 여행은 오래전 예언된 것이다 / 死地를 찾아간 코끼리처럼 / 서녘으로 떠난 무리가 어디 깃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후략) <구름의 율법> 14쪽
한반도 벨트에서 구름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하지만 만일 이 시에서 구름의 율법을 “동녘으로 떠난 무리가” 운운하면 참 맛이 나지는 않을 거 같다. 좋다, 서녘으로 떠난다고 표현하는데 동의한다고 치자. 그런데 왜 하필 사지死地,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코끼리 같을까.
윤의섭의 시는 내 기준으로는 과하게 죽음 지향적이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시집의 뒤쪽으로 갈수록 더 심해지는 듯하다. (나는 여전히 비겁하게 ‘심해진다’라고 쓰는 대신 ‘심해지는 듯하다’라 표현한다.) 이제 시집에 마지막으로 실은 작품 전문을 감상해보자.
눈을 부르는 나무
춘삼월 산수유 텅 빈 가지에 예년 피었던 꽃은 다시 찾아올까
찾아와 연노랑 꽃 치마 펼치고 다소곳이 앉을까
그녀 다시는 오지 않았다
하늘이 먹먹해지고 계곡에는 뼈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바람 소리 차오르는데
흩날리는 눈가루 저마다 길을 헤매느라 지상에 쉽게 내려앉지 못한다
길을 잃었다면 손짓을 따라오오
내 부르는 거친 숨소리 듣지 못했다면 움트는 온기를 쫓으오
보일 리도 찾을 리도 만무하련만
산수유 여윈 가지 사이에 메마른 눈길 걸어 놓는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
언젠가 꽃눈으로 피어날 눈
그리울 적마다 소스라치듯 내리는 눈 (전문 136쪽)
시인에게는 춘삼월 산수유 빈 가지에도 연노랑 꽃이 치마를 다소곳이 펼치고 앉는 대신 찬 눈가루가 흩날리고 만다. 물론 언젠가는 꽃눈으로 피어날 싸락눈이지만 가는 산수유 가지에 메마른 눈길만 걸어놓을 뿐이다. 산수유는 개화시기가 매우 빠르다. 3월이면 지리산 밑동엔 벌써 작고 촘촘하게 노란 꽃이 피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산수유 꽃이 아니라 아직도 앙상한 가지 위로 눈가루가 흩날리는 것을 포착한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대신 그것들의 잠복한 슬픔으로 3월에 내리는 싸락눈을 보는 것이겠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나하고, 나로부터, 멀다.
지금 독후감을 쓰고 세 시간이 지났다. 도무지 주둥이가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기어이 덧쓴다. 시집의 102쪽에 <北巷>이란 시가 있다. 이거 <北港> 아냐? 시를 직접 읽어보시라.
北巷
달은 초저녁을 넘기지 못하고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침몰했다
산봉우리에 간신히 정박한 안개구름마저 거센 폭풍에 사라져 갔다
그러나 비 내리는 들녘에 서 있으나
빗물에 젖은 흔적이 없다
아무도 비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장대비 쏟아질 때면 무거운 몸뚱어리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거대한 배 한 척 바다 쪽으로 머리를 드리운 채 쓰러져 있었지만
아무도 출항에 들뜬 어선의 파닥거리는 지느러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들녘엔 산수유 꽃잎이 흩날리고
언제 그랬다 싶게 달빛이 교교할 뿐이다
이젠 유령선에 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느티나무로 보이는 돛대와
푹신한 흙으로 뒤덮인 갑판을
시퍼런 심해 너머로 끝내 이르지 못한 채 난파한 항해를 잊고 있었다고
메마른 일지에 적어 놓아야 한다
다시 바람이 불어온다
북풍이다
목숨마저 저버려야 배가 뜰 모양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북항(北港) [부캉] [명사] 북쪽에 있는 항구. 또는 항구의 북쪽 부분.
북항(北巷) 내용 없음.
네이버 한자사전
港 1.항구 2.도랑 3.강어귀 4.뱃길 5.홍콩(香港)의 준말
巷 1.거리, 시가 2.문밖 3.복도 4.궁궐 안의 통로나 복도 5.마을, 동네 6.집, 주택
의문 1. 도대체 뭐야? 민음사, 시집도 교정, 교열이 개판인 거야, 아니면 시인이 제목을 잘못 쓴 거야? 그것도 아니면 진짜 “북쪽에 있는 거리” 또는 “북쪽 복도”란 뜻인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지역을 칭하는 고유명사야? 검색해도 안 나오는데 말이지. 이렇게 불만을 쏟는 건 내가 정말 무식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혹시 시의 제목 북항이 말하는 걸 아시는 분 계시면 한 수 가르쳐주시기 바란다.
의문 2. 9행. 산수유 꽃잎이 흩날려? 산수유 꽃잎이 과연 몇 밀리미터 쯤 될까? 날리긴 날리겠지. 근데 그게 참, 세상 살다가 산수유 꽃잎이 흩날린다는 얘기도 듣는다. 어쨌든, 하여간, 좌우지간, 진짜 독특한 표현이란 건 “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