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가장 최근에 물리학 과목을 수강한 것이 무려 38년 전이다. 제목 속에 든 “평행 우주”라는 개념도, 책 속에 나오는 “끈 이론” 같은 것도 당시엔 그런 것이 있는지 꿈도 꾸지 못했다. 이 책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은 현대 물리학의 기초적 지식이 있는 사람은 더욱 재미나게 읽을 것 같다. 숫자 1 뒤에 스물여섯 개의 0을 붙인 숫자만큼의 은하계가 있어야 또 다른 인간 수준의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한다는데, 말이 ‘스물여섯 개의 0’이지 하이고. 아인슈타인 이후의 물리학은 글쎄, 정말 인간 생활에 필요한 건지 아니면 물리학자들이 자신의 천재성을 겨루는 것에만 기능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치 현대 수학이 몇몇 수학자들의 두뇌 경연대회로 전락 또는 (구름 위 궁전으로)승격한 것처럼.
 왜 이렇게 초장부터 초를 치느냐 하면, 작품의 주인공은 책을 열고 이야기가 40%쯤 지나야 등장하는 ‘실프Schilf’라는 50대 초반의 뇌질환을 앓고 있는 늙다리 형사이지만, 실프와, 실프의 경찰학교 제자이자 커다란 손과 거대한 유방을 가진 독신녀 ‘리타 스쿠라’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인물이 제바스티안과 오스카라는 물리학자다. 오스카는 태생부터 천재였음을 스스로도 알고 주위에서도 다 인생해준 인물로, 살면서 자신과 어깨를 그나마 맞댈 수 있는, 물론 자신을 능가하기엔 역불급이긴 하지만 그나마 인간 같은 인간으로 대학 동창 제바스티안 딱 한 명만 인정하는 특출한 인간이다. 190cm가 넘는 장신에 댄디한 외모, 잘 가꾼 화법과 어딜 봐도 조금 거만하다는 느낌을 주는 오스카는 현재 제네바에 살고, 이론물리학에 전념하여 세상의 본질을 단번에 밝힐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는 독신. 제바스티안은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최연소 교수로 임용을 하고 평생교수직을 얻은 물리학자. 아름다운 아내 마이케는 현대미술을 취급하는 화랑의 대표로, 마이케와의 사이에 똑 부러지는 아들 리암과 여유 있고 폼 나게 인생을 즐기고 있다. 제바스티안의 주요 연구 분야가 바로 평행우주. 아인슈타인이 이미 증명한 바 있는 시간의 가변성을 n번 변주하여 참 형이상학적 물리학을 만들어낸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평행우주 이론이다. 책에 평행우주에 관한 내용이 잔뜩 쓰여 있어서 이해는 할 수 있으나, 유클리드 물리학 말고는 아는 게 거의 없는 내가 평행우주가 뭔지 간략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심정, 이해하시지?
 프라이부르크의 대형 병원에서 심장수술 도중 혈액의 흐름에 관한 약을 잘못 사용하여 네 명의 환자가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진다. 이는 개발 중인 약을 환자에게 생체실험을 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켜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던 차에, 수술에 간여한 마취 담당 의사 과장 ‘다벨링’이 살해당한다. 어떻게 죽었는지 밝히지 못하는 심정. 왜냐하면 살인이 벌어지기 전에 살인의 방식이 ‘옆으로 누워있는 선’ 즉 복선伏線으로 깔려 있어서, 차마 그걸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튼 참혹한 살인사건과 연이은 수술 중 사망사고가 겹쳐 제약회사, 병원 관계자, 집도의사, 사망자 가족 등이 일단 용의자 선상에 올라갈 수밖에 없으나 도대체 단서가 잡히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워낙 파장이 큰 사건을 담당한 리타 스쿠라 경장이 아무리 방방 떠도 갈피를 잡지 못하자 프라이부르크 시장은 주도州都 스튜트가르트 경찰청에 SOS를 치기에 이르렀고, 도지사(겠어 설마? 도 경찰청장 정도겠지)가 실프 경위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천재적인 두 명의 현대 물리학자와 한 명의 천재적 두뇌를 보유한 형사, 그로부터 교육을 받은 적극적인 행동파 여형사, 이렇게 네 명이 참혹하게 살해된 시체를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의 틈바구니에서 본격적인 두뇌싸움이 벌어지는데, 문제는 형사 실프. 이이는 사건의 해결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로 얼른 종결시켜버리자는 가슴 큰 제자 리타 스쿠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근본 원인까지 치밀하게 파헤치는데, 이 과정에서 난데없이 현대 물리학 이론이 마구 쏟아진다. 다 좋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추리소설다운 좀 더 드라마틱한 결말이 나왔으면, 했다는 거. 작가 율리 체 자신이 똑똑한 건지, UN에 근무하며 작가로 데뷔했고, 이후 독일 법조계에 종사하면서 소설을 쓰는 74년 범띠 극성 여성이 평소 자신 스스로가 관심을 크게 두고 있었던 시간의 확장과 평행이론 등을 소재로 추리 소설을 썼단다. 근데 놀랍게도 바쁜 중에도 체가 발표한 작품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거. 난 이런 사람 보면, 뭐 하러 이리 바쁘게 사는지 별로 이해가 안 가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왜냐하면,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 받지 않는데 뭐 하러 그리 허겁지겁 사느냐는 거다. 그래도 한 세상이고 나 같아도 한 세상인데 말이야. 난 여유 있게, 평생 안 바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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