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눈부신 친구 ㅣ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평점 :
품절
다른 거 안 보고 ‘한길사’라는 출판사에서 찍은 소설책이란 딱 하나의 이유 때문에 선택했다. 책을 고르고 보니, 이게 생전 처음 듣는 엘레나 페란테라는 작가가 쓴 나폴리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란 걸 알게 됐고, 그래서 또 나머지 세 권의 책도 싹 구입했다. 근데 왜 한길사냐고? 내 기억력이 엄청 꽝이라서 그랬다. 한길사의 소설이란 걸 시각정보를 통해 인식하자마자 내 큰골의 회백질 안에선 엉뚱한 화학작용을 일으켜 베른하르트의 <소멸>을 떠올리게 됐고, 그리하여 주문하기를 클릭해서 네 권의 나폴리 4부작을 몽땅 결제하고 나서야, <소멸>은 한길사가 아니라 현암사에서 나왔다는 게 번쩍 떠올랐다. 하긴 한길사나 현암사나 나 소싯적에 열라 읽은(솔직하게 얘기하면, 읽으려고 했던, 또는 읽기를 원했지만 갖가지 핑계를 대고 읽지 않았던) 사회과학 책을 많이 찍어 정든 이름이긴 하다.
작가 엘레나 페란테. 이 여사님도 참 재미나다. 이 책 바로 전에 읽은 것이 티에리 코엔이 쓴 <나는 오랫동안 그녀를 꿈꾸었다>의 주인공 요나처럼, 필명으로 책을 출간하고, 매체와 인터뷰도 서면(또는 e-메일)이 아니라면 극구 사양했던 작가란다.
(이 자리에 있었던 사진은 페란테가 아니라 페란테의 작품을 번역한 앤 골드스타인 Anne Goldstein 이었기에 삭제했습니다. 오류를 지적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미 나이 들어 늘그막의 그늘에 접어들어 안온한 황혼을 즐기고 있는 화자 엘레나 그레코. 엘레나라는 이름 대신 애칭으로 ‘레누’라고 하니 독후감에서도 엘레나와 레누란 이름을 마구 섞어 부르기로 하자. 읽는 사람들이 헛갈리거나 말거나 그거까지 책임지지는 말자. 어느 날 아침 리노에게 전화가 왔다. 또 갚지도 않을 돈을 좀 빌려달라는 전화인줄 알고 앞 뒤 가릴 필요 없이 “안 돼!”라고 이야기할 찰라, 리노가 말하기를 “엄마가 사라졌어요!” 한다. 그것도 2주 전에. 그러면서 레누가 살고 있는 토리노에 엄마가 가 있는 거 아닌지 궁금해 전화질을 했단다. 레누가 리노에게 장롱과 서랍 기타 등등을 샅샅이 뒤져보라고 하니, 모든 엄마의 물건, 옷, 신발, 장신구, 편지, 사진, 선물, 책 몇 권, 필름, 플로피 디스켓, 컴퓨터, 심지어 출생증명서에다가 통신사 계약서, 영수증, 고지서 등을 싹 챙겨 사라져버린 거였다. 레누, 정말 신경질 났겠지? 엄마가 사라진 다음 2주가 지났는데도 아들이란 놈이 엄마 장롱도 열어보지 않았단 말이다. 이 한심한 중년남자 리노의 엄마가 라파엘라 체룰로. 엘레나만 ‘릴라’라고 부르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리나’라 부르는 66세의 노인.
이 책이 4부작 가운데 첫 번째 1부라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엘레나의 삶과, 그것(엘레나의 삶)에 밀접하게 접근해 평생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리나의 삶, 두 인생을 담은 책이 아닐까 하고 예측할 수 있겠다. 독자로서의 나는 엘레나 그레코, 이 화자가 우연히 작가 엘레나 페란테와 이름이 같기도 해서, 조금, 아니 많이 변형시킨 자신의 모습이며 ‘리나’는 엘레나가 평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주변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많은 사람 또는 친구의 모습을 모두 합쳐 만든 가상인물인 듯했지만 그건 또한, 전적으로 독자로서의 내 짐작이란 측면에서 정당한 짐작이다. 작가 스스로 말했다.
“책은 한 번 출간되고 나면 그 이후부터 저자는 필요 없다고 믿습니다. 만약 책에 대해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다면 저자가 독자를 찾아 나서야겠지만, 남아 있지 않다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역자 후기 448쪽)
작가는 책을 쓰기만 하면 되고 읽는 건 독자 마음이다. 그래서 이 책, 4부작 가운데 1부만 본다면, 이건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릴라가 증발했다는 리노의 전화를 받고, 메일로 릴라에게 도대체 너 어디 있는 거야, 라고 묻지만 결코 답장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엘레나는 곧바로 릴라와의 60년을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기억 또는 추억의 저 먼 끈은 초등학교 교사 올리비에로 선생의 말처럼 “천민”들이 우글대는 당시 패전국 이탈리아의 나폴리 변두리에서, 자신의 기억이 흐릿한 유년 시절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진다.
작가가 떠올리는 눈부신 친구 릴라의 첫 번째 인상은 “아주 못된 아이”라는 것. 그런데 그런 아이가 누구나의 인생에 한 명쯤은 있었다. 못 된 아이고, 매사 설렁설렁, 별로 공부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언제나 1등만 먹고, 모든 사람가 사물을 비딱한 시선으로 보며 세상에 중요한 건 절대 없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어린 인생을 시작하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 때는 여러 가지로 짐작해보니 1950년대 초반. 패전국 이태리의 한 도시에서도 아주 변두리 빈민지역. 릴라는 매우 탁월한 지능과 못 된 성격을 동시에 지녔으면서도 대표 모범생 엘레나와의 우정을 쌓아간다. 둘 다 매우 똑똑하지만 엘레나는 애초부터 릴라를 능가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항상 릴라의 뒤만 졸랑졸랑 따라다니는 소년시절을 지내며, 사춘기로 접어들어선 자신도 모르게 공부는 뭐 그렇다고 치더라도 릴라보다 앞서는 모종의 것 하나는 갖고 싶어 하는 기분. 그래,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겠지. 릴라가 워낙 특별하고 릴라네 집이 워낙 가난해서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대신 동네 도서관에서 라틴어 교본을 빌려 엘레나와 같이(그러나 릴라는 집에서 오직 혼자) 공부를 시작하는데, 엘레나가 결국 릴라의 극적인 도움을 받아 최고 성적을 맞을 수 있게 된다는 거. 릴라는 똑똑하고, 못된 만큼 삶을 보는 시선이 다각적이고 현실적이라는 거. 자기보다 두 배는 더 커다란 힘 센 사내의 목에 칼을 대고 정말로 찔러버릴 깡다구도 있다는 거.
재미있는 책이다. 릴라와 엘레나의 성장에 초점을 맞춰 책을 읽을 수도 있고, 곁다리로 남부 이태리 사람들의 다혈질적 행동습성, 특히 남성들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관습적 폭력도 무지하게 재미있다. 엘레나는 남동생 하나를 둔 맏딸. 동네 껄렁쇠들이 엘레나를 함부로 만지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 엘레나를 함부로 만졌다가는 동생 페페와 잔니가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다 컸다고 자기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칼이 자신의 목에 박힐 수도 있기 때문. 복수를 하지 않거나 못하는 건 가문의 최대 수치로 여기는 이태리 수컷들의 관습법을 보는 것도 흥미롭다. 이 4부작을 읽고 마지막으로 좋다, 아니다, 나한테 맞다, 안 맞다는 정말로 4부작 끝까지 다 읽고 난 다음에야 얘기하겠다. 일찍이 대단한 작품 <알렉산드리아 사중주>를 1부만 대충 보고 아, 이런 재미없는 책이 있나, 싶었다가 몇 달 후에 사 둔 것이 아까워 나머지를 읽어보고 악, 이런 명작을! 그땐 내가 미쳤었나봐, 라고 반성했던 기억도 있으니, 겨우 1부만 읽고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 심정을 짐작해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