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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틀비와 바틀비들
엔리께 빌라―마따스 지음, 조구호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1월
평점 :
허먼 멜빌의 단편 <필경사 바틀비>에서 말쑥하고 가난하고 점잖고 조용하고 성실하지만 많이 음울한 바틀비 선생께서 어느 날 갑자기 해탈을 하셨는지 그를 직접 채용한 변호사가 내리는 지시사항마다 꼬박꼬박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라고 선언하며 일체의 작업을 거부하는 장면부터, 바틀비를 바틀비로 만드는 대사, “하지 않으려 합니다.”만 나오면 성질 급한 독자들은 컥컥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 심지어 마음씨 착한 변호사가 적지 않은 위로금을 쥐어주면서 “당신은 해고니까, 내일부터 안 나오셔도 괜찮습니다.”라고 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이니 말 다했다. 해고당한 사무실에서 밤까지 보내는 바틀비 때문은 아니지만 변호사 사무실은 이사를 해버리고, 그래도 텅 빈 사무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바틀비 속에도 작가 멜빌의 한 부분은 들어 있었을 것. <모비딕>은 서점 해양수산 분야에 꽂혀 있고, 청교도적 분위기가 여전히 시퍼렇던 아메리카에서 근친상간 요소가 살짝 가미된 <피에르 혹은 모호함>은 평론가들에게 사정없이 두드려 맞아 자신이 더 이상은 글을 제대로 쓸 수 없다고 단정한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세관의 말직에 취직해. 하기 싫은 사무직으로 남은 평생을 지내게 되었으니 멜빌 자신 역시 세관장을 위시한 윗것들에게 하루에도 열댓 번씩 “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말해버리고 싶었지 않았을까.
이렇게 바틀비와 멜빌에 대해 서두를 길게 쓰는 건, ‘글을 쓰지 못하거나 않으려고 하는, 부정적인 충동 또는 무無에 대한 이끌림’을 바틀비 증후군이라 한다고 책의 표지에 작은 글씨로 써놓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바틀비들’ 원문엔 Bartleby y compania, 즉 ‘바틀비와 일당들’이라 하고, 일당들, 즉 절필을 했거나 책을 내지 않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찍이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보면, 남북 아메리카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해서 나치를 옹호한 작가들의 명단을 몽땅 까발린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을 때, 요새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로 대대적 적폐청산을 위한 정리 작업인줄 알았다가, 진도를 더해감에 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대부분 혹은 전부 다 사실이 아니라 볼라뇨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이란 결론 낸 적이 있었다. 이 책 <바틀비와 바틀비들>과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의 공통점이라면 스토리가 없다는 것. 볼라뇨의 책은 마치 인명사전을 펼친 듯한 느낌 속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던 반면, <바틀비....>는, ‘여자들과의 관계에서 운이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고, 처량한 곱사등이 상태를 받아들여 견뎌내고 있으며, 가까운 가족은 모두 죽었고, 섬뜩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걸 제외하면 행복한 남자’라고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 외톨이 늙은 남자가 1999년 7월 8일부터 약 한 달간에 걸쳐 작업한 결과물인데, 문학적 성과와는 관계없이 어느 순간 글쓰기를 더 이상, 결코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인물들과 그들이 당시 빠지게 된 부정적 충동 같은 것에 관해 조사한 내용이다. 1번 로베르트 발저 (책에서는 ‘로버트 발저’로 표시)부터 86번 레프 톨스토이 백작각하까지 참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발굴해 소개하고 있으나,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특별한 스토리가 없다. 86개의 항은 전부 주석으로 사용하고자 한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독자는 별로 없을 걸?
빌라-마따스, 이 양반이 이 책으로 2000년 스페인에서 ‘올해의 소설상’을 받았다고 한다. 읽어보면 정말 다양한 독서와 작가들의 연혁을 꼼꼼하게 공부해, 하필이면 붓을 꺾은 인물들에 관해 집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다른 독자들은 모르겠으나, 나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도 전 지구적으로, 아니다, 시각을 좁혀 우리나라 책방에도 숱하게 새로운 출판물이 나오고 있다. 수천의 작가 지망생들은 별것도 아닌 선배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손으로 옮겨 쓰는 필사작업에 목을 매며 자신도 조만간에 ‘등단’이란 관문을 통과해 필명을 나부낄 희망을 부여잡고 있을 것이다. 표지를 넘기면 이렇게 쓰여 있는 걸 보게 된다.
“어떤 이의 영광 또는 장점은 글을 잘 쓰는 데 있다. 어떤 이의 영광 또는 장점은 글을 쓰지 않는 데 있다.”
2019년 현재 대형 서점에 깔려 있는 시, 소설, 희곡, 평론 등의 문학작품 가운데 몇 종류가 30년 후인 2049년에도 읽힐 것 같은가. 거꾸로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9년 이전에 나온 책 가운데 여전히 읽히는 책이 얼마나 있을까. 사실 문학을 하는 일은 확률이 거의 없는 패에 배팅을 하는 도박 아닐까? 글쎄, 선택은 당신들 몫이니까 뭐. 확실한 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작가들이 훨씬, 훨씬 더 많다는 거. 자의건 타의건 간에 대다수를 차지하는 붓을 꺾은 작가들을 추적하는 일은 살아남아 이름을 떨친 극소수의 작가들에 천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작가들에게 문장을 거두어가게 했는지.
작품의 진정한 위대성은 일단 제쳐두고, 붓을 꺾은 작가들은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참 다양한 그림들. 자신에게 이야기를 해주던 외할아버지가 죽어 더 이상 남은 소재가 없어 붓을 꺾는다는 말을 남긴 <뻬드로 빠라모>의 작가 후안 룰포. 자신이 점점 가구처럼 되어 가는데 가구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클레망 카두. 지독한 은둔생활을 하며 과작만을 생산했던 <시르트의 바닷가>를 쓴 쥘리앙 그라크, <호밀밭의 파수꾼>의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 <제49호 품목의 경매>와 <바인랜드>를 쓴 토머스 핀천. 또 플로베르의 문하생으로 스스로 불사신을 자처하다 면도날로 자신의 목을 그어버린 기 드 모파상, 아주 나중이지만 문학이 도덕적인 타락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선언하고 가출해 죽어버렸으나 스스로가 젊은 시절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바람둥이 출신 톨스토이 백작 등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한데, 마구 읽어나가다 잠깐 정신이 들면 무릎을 탁, 치게 된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건 바로 소설. 픽션이란 뜻. 우리가 늘 읽어왔던 진짜 작가들도 등장하지만 빌라-마따스가 창조한 등장인물이자 작가도 무수하게 나오리란 걸 깜빡 잊고 있었구나! 자각하게 된다.
그러나 91페이지에 쓰여 있는 의문문들은 이 책의 지은이 빌라-마따스를 비롯한 (거의)모든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고민해야 하는 숙제가 아닐까?
“하지만 실재적으로 내 예술은 무엇인가? 내 예술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가? 나는 예술을 함으로써 무엇을 원하는가? 내가 글을 써내면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지 확인하기 위한 것일까? 그건 수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유일한 야망이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내가 알아내기 위해 은밀하게, 오랫동안 탐색해야 할 문제다.”
팁. 어느 정도 독서력讀書歷을 쌓은 독자들에게 권하겠다. 숱한 책 제목이 나온다. 그럴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야 더 재미있을 터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