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십 일
짐 크레이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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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저리 다니다 <사십일>이 눈에 번쩍 띄었다. 짐 크레이스. 근 4년 전 그가 쓴 <그리고 죽음>을 읽고 산다는 것이 참 덧없다고, 결혼 30년을 맞은 갱년기 또는 초기 노년기 부부가 이들이 처음 몸을 섞었던 해변을 방문해 그때를 기념하다가 악당에게 살해당한 시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심각한 수준으로 드라이하게 그려놓았던 걸 읽고 독후감을 쓴 적이 있다.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엔 분, 이어서 시간, 날짜 단위로 시신이 변하는 과정과 이들로부터 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몰려드는 파충류, 조류, 곤충, 갑각류,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충분히 이해하실 듯하다. 근데 문제는 끔찍하게 끔찍할 거 같고, 사실 내용도 그러한데 뭔가 삶이, 인간이라는 직립보행체가 중뿔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잘 강조해놓아서 읽어가며 점점 빠져들게 된다는 점. 아니나 달라 1999년 부커상 최종 후보short list에 올랐던 작품이며, 뉴욕 포스트가 올해의 최우수 소설로 선정했다고 해서 깜놀, 했던 적 있다.
  하여튼 그래서 고른 책인데, 웃긴 건, 이 책 <사십일>은 품절, 이 책을 고르게 만든 <그리고 죽음>은 판매 중. 둘 다 당시 영어책, 일어책 직역, 기타 나라에서 나온 책을 중역했던 자타가 인정하는 번역기계 김석희가 우리말로 바꾸었다.
  하여튼 이 책 <사십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가톨릭, 개신교를 불문하고 성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생애는 무조건 진리라고 믿는 신자, 신도, 형제자매들께서는 읽다가,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혈압 180을 상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 애초에 읽기를 포기하시라. 이런 거 미리 일러드리는 것도 선독자(먼저 읽어본 놈)의 친절이니 조금은 고마워하셔야 할 듯. 내 비록 신약성서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일찍이 예수가 요르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로 가 40일 동안 온갖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금식기도는 아니고 하여튼 수도를 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나와 있는 것으로 안다. 성공회의 나라 영국 사람인 짐 크레이스는 그러나 책이 서문에 엘리스 윈워드와 마이클 솔 교수의 저서 <생존의 한계>를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평균적인 체중과 체력을 가진 보통 남자가 완전한 단식 ―단식기간 중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마시지도 않는 단식―을 하면 30일 이상 생존할 수도 없고, 25일 이상 의식을 유지할 수도 없다. 이 남자가 성서에 기술된 40일 단식을 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신이 도와준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역사는 그런 종류의 개입을 기록하지 않고, 의학은 거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럼 눈치 채셨나? 일단 이 이야기는 좀 뒤로 미루고 책의 스토리를 시작해보자.
  유대 땅의 황무지. 일 년에 비가 단 하루 정도 오는 척박한 대지라서 대상들이 낙타를 몰고 와 간이천막에서 며칠 묵다 가는 곳이기도 한데, 거구의 장사꾼이 하필이면 이 황무지, 한 시절 유대의 어버이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사랑하는 아들 이사악의 심장을 향해 번쩍, 잘 드는 단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던 성지이기도 해서 해마다 봄을 시작하는 달이 뜨면 많은 수도자, 기원자들이 모이는 성지이기도 한 이곳에서, 덜컥 열병에 걸려 혀가 숯이나 검댕처럼 새까맣게 변해 오늘 아니면 내일 죽을 것처럼 누워 있다. 환자의 이름은 무사. 무사의 젊은 아내는 임신 5개월로 아이의 발길질이 심해지는 시기였던 바, 하필이면 이런 때 남편이 숟가락 놓게 생겼으니 어찌 큰 근심이 아니겠느냐고? 아니다. 뼈만 남은 아내와 달리 거대, 비만한 체구의 무사는 덩치가 너무 커 앉았다가 빨리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음에도 아내 미리에게 하는 짓이라고는 거칠고, 거칠고, 또 거친 잠자리와 툭하면 눈가를 퍼렇게 멍들이고 마는 구타와 심한 노역이어서, 미리 입장에서 남편이 빨리 죽어주는 것이야말로 신의 은총이라 여길 정도. 남편이 맞은 죽음의 침상에서 미리는 결혼 후 처음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같은 대상인 무사의 삼촌, 사촌들이 부부에게 당분간 먹을 것, 마실 것, 그리고 약간의 보물을 남겨두고, 장사를 오래 쉴 수 없어 떠나버린 날, 미리는 그래도 남편이니 그를 위해 맨손으로 남편을 위한 무덤을 파는데, 이 날이 올 봄 들어 처음으로 초승달이 뜨는 날이어서 다섯 명의 기도, 수도자들이 이 황무지로 오고 있었다. 이들의 면면을 보면,
  첫 번째 사람은 금발의 미남. 그리스 인. 나선형으로 휜 지팡이 소지. 이름은 심. 자신을 빼고 모든 사람을 숭배하는 범신주의자.
  두 번째 남자의 이름은 예루살렘 출신 석공이자 간암 환자인 노인 아파스. 40일 기도를 통해 신에 의탁하는 마지막 기회로 여김.
  세 번째는 부잣집 남자의 두 번째 아내 마르타. 첫 번째 아내가 불임으로 이혼당해 결혼했으나 마르타 역시 9년 동안 불임. 올해 임신 못하면 이혼 당할 예정.
  네 번째는 남쪽 사막에서 온 바두족 사내로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음. 사냥에 능한, 한 마디로 야만인 비슷함.
  다섯 번째는 위의 네 명과 한참 떨어져, 한참 늦게 도착한, 이제 갓 사춘기를 지난 청년 예수.
  그래서 예수는 네 명이 전부 동굴 하나씩을 선택해 자리에 들은 이후에야 황무지에 들어오는데, 다른 네 명과 달리 어떻게 하다 보니까 무사의 천막으로 향하게 된다. 이제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금식기도에 접어들어야 해서 오늘 마지막으로 그저 입술을 축일 정도의 물과 작은 양의 빵을 얻으려 천막을 방문했는데, 무덤 파러 간 미리는 보지 못했고 무사만 혼자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던 것. 예수는 딱딱한 빵 껍질 조금을 먹고, 자기가 원했듯이 겨우 입술이나 축일 정도의 마지막 물 약간을 마신 다음, 무사의 침상으로 가, 그의 입술에 물을 적셔주고는, 정작 예수 자신은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는 순간이지만, 가슴을 퍽퍽 눌러 무사의 몸에 거하고 있던 열병의 악령을 물리치고 나서, 갈릴리 지역에서 늘 인사말로 쓰는 “그럼 다시 건강해지기를.” 하는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천막을 뜬다. 이어 쉽게 오르내리지 못하는 절벽 아래로 내려가 십자 모양의 입구가 있는 동굴에 자리를 잡는다.
  놀랍게도 짧은 시간에 거의 완치가 되는 무사. 그가 정신을 차려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라니. 절구 공이를 집어 들더니 삼촌, 사촌이 남기고 떠난 병든 당나귀를 때려죽여버렸다. 그럼에도 무사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모습. 갈릴리 청년. 무사가 예수를 갈릴리 청년이라고 알아볼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하여튼 그는 그런 뜻으로 진짜 예수의 별명이기도 한 ‘갈리’라고 예수를 칭하기에 이르면서 그를 찾는데 공을 들인다. 어떻게?
  예수를 뺀 나머지 네 명의 기도자들. 무사는 이들 앞에 나타나 대단한 뻥을 친다. 타고난 장사꾼이라 대담하고 일면 그럴 듯한 거짓말을 하는데, 이 일대의 땅이 모두 자기 것이니 지금 당신들이 든 동굴의 세를 내라는 것. 그렇게 돈을 받고 한편으로 아내 미리를 시켜 음식을 만들어놓고 40일 금식기도라는 건 낮에 금식하라는 의미니까 밤이 내리면 천막에 와서 음식을 사먹으라 제의한다. 청년 예수는 철저하게 하느님을 믿는지라 절벽 아래 동굴에 박혀 오직 기도만 하고 있어서, 질병 치료사인 예수와 동업을 하고 싶어 애가 타는 무사는 긴 끈을 달아 음식과 물을 그의 동굴 앞에 가져다 놓고 이야기나 한 번 하자고 유혹하는 것. 바로 무사가 신약성서에 나온 사탄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 좋다. 어차피 책은 품절이고 당분간 복간되지 않을 것이며, 복간한다 하더라도 리커버 에디션이나 그 비슷하게 껍데기만 바꿔 핑계 김에 가격을 올릴 터라 이 독후감은 노출이 되지 않을 것이니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자면, 청년 예수는, 저 위의 윈워드와 솔 교수의 의견에 맞추어 단식 31일차에 세상 하직하고 만다. 이 정도면 기독교 신자, 신도, 형제자매들은 열 받을 만하겠지? 물론 제일 마지막 장면에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라서 얼굴을 지하 쪽에다 둔 상태, 그러니까 엎드린 형태로 묻힌 청년 예수가 벌거벗은 몸으로 부활한다는 팁은 있지만, 그럼 예수의 생애에 부활이 또 두 번이니까 그것도 문제거니와, 딱 꼬집어 부활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은 채 그냥 문학적 의미로 마감을 해버리고 만다. 하여간 40일에 열흘이 모자란다. 과학에 입각해서. 사전 정보 하나 없이 읽은 나는 다섯 번째 기도자가 예수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고, 이후 계속 흥미진진하다가,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내용, 예수를 만나고, 암 환자와 불임에 시달리는 이들이 예수 덕에 치료를 기대하는 장면에 이르러 좀 지루해졌다. 그래도 이 책 역시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기도 했고, E.M 포스터 상은 받았다고 하니 혹시 기억나시면 일독을 하셔도 나쁘지 않을 듯. 근데 웬만하면 뭐든지 일독하기만 하면, 나쁘진 않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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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이상화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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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에 이시우李時雨라는 명문가 서방님이 숙녀 김신자 여사와 금슬이 좋아 아들 네 형제를 낳았는데, 첫째가 중국에서 장관급 대우를 받았던 독립투사 상정相定이요, 둘째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탄압을 무릅쓰고 저항의 노래를 그치지 않았던 시인 상화相和요, 셋째가 사학자, 사회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내면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까지 지낸 상백相伯이고, 막내가 문필가이자 수렵인으로 이름을 낸 상오相旿였으니 비록 이시우 선생이 네 살 먹은 막내 상오를 남기고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다 하더라도 아들 농사 하나는 알뜰하게 하고 간 셈이다. 그러나 이 네 형제가 하나같이 고급한 공부를 마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것은 물론이오, 나아가 해방을 위해 무력투쟁에까지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대구 일대의 큰 부자였던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영향이 지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일우 선생은 조카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집에서 사숙을 시켰고, 경성 유학을 거쳐 일본 유학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을 정도의 부와 혜안이 있었던 거였다. 심지어 둘째 상화는 더 나아가 프랑스 유학을 바라보고 일본의 대학 대신 아테네 프랑세라는 아카데미에 보냈는데, 그만 1923년의 관동대지진으로 꿈을 접고 귀국선에 오를 수밖에 없었단다.
  이상화는 열일곱 살 당시에 벌서 현진건, 백기만 등과 동인지를 만드는 등의 문학 활동을 시작한 바 있고, 스물두 살 때 인 1923년엔 홍사용, 박종화, 박영희, 김기진 등 당대의 쟁쟁한 젊은 시인들과 함께 「백조」에 동인으로 참가한다. 1922년. 3.1운동의 실패를 당한 창백한 인텔리겐치아들이 좌절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낭만 또는 퇴폐적인 경향의 시를 발표했을 때로, 일 년 후 발간한 「백조」 3호에 이상화도 <나의 침실로>를 게재하니 같은 동인지에 실린 시의 편편을 보자 하면,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박종화의 <사의 예찬> 등이 있다. 훗날 대하역사소설 <금삼의 피>와 불멸의 <월탄 삼국지>를 쓴 월탄月灘도 처음엔 시로 시작한 것은 다들 아실 터. (<월탄 삼국지>하니까 저 먼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처음 읽은 삼국지가 바로 <월탄 삼국지>였다.) <나의 침실로>는 인용하기에 많이 길어서 비슷한 경향의 상화의 대표적 퇴폐 시 <말세의 희탄> 전문을 소개한다.



  말세의 희탄



  저녁의 피 묻은 동굴 속으로
  아, 밑 없는 그 동굴 속으로
  끝도 모르고
  끝도 모르고
  나는 꺼꾸러지련다.
  나는 파묻히련다.


  가을의 병든 미풍의 품에다
  아, 꿈꾸는 미풍의 품에다
  낮도 모르고
  밤도 모르고
  나는 술 취한 몸을 세우련다
  나는 속 아픈 웃음을 빚으련다. (전문)


  상화의 시 속에도 당시 창백한 지식인들의 허무의식이 숨어 있고, 또 스물세 살의 청년에게 이런 감각이 유난히 빨리 스며드는 경향이 있다. 「백조」 자체가 동인들이 특정한 문학적 취향이나 정치적 목적을 공유했던 동인지라기보다 훗날 소위 청록파처럼 그냥 얼굴을 알고 지내고 가끔 만나 술잔 깨나 기울이던 ‘자칭 문인’들이 모여 서로의 작품을 실어 폈던 것이니. 어쨌거나 한 집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식민지 조선에서도 문학이 발전하기 위해서 이런 종류의 승화되지 못한 거친 슬픔이나 죽음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을 피할 수는 없었을 터, 라고 넘어가면 될 듯하다. 솔직히 살면서 왕년에 이런 종류에 한 번, 물론 잠깐, 몰두해보지 않은 청춘 있으면 두 명만 손들어 보시라.
  도쿄에서 아테네 프랑셰라는 아카데미를 마치지 못하고 귀국한 이상화는 다음 해인 1925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다. 세상에나 가장 부르주아 적인 시인 이상화가 카프 발기인이라니. 당시에는 진짜 무산자 가운데 카프에 가입할 수 있을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당대의 천재로 일컫던 이용악 정도밖엔 없었을 것이니까 그것도 그냥 넘어가자. 애초부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라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희망하는 문학 장르가 그것이라는 말이니까. 이 당시 발표했음 직한 시 한 편을 읽어보자.



  구루마꾼


  ‘날마다 하는 남부끄런 이 짓을
  너희들은 예사롭게 보느냐?‘고
  웃통도 벗은 구루마꾼이
  눌 붉혀 든 얼굴에 땀을 흘리며
  아낙네의 아픔도 가리지 않고
  네거리 위에서 소 흉내를 낸다.  (전문)


  구루마는 요새는 보기 힘든데 양쪽에 고무타이어가 달린 바퀴 두 개가 달린 손수레로, 흔히 이야기하는 손수레보다는 크고, 전에 ‘리어카’로 불렸던 이송수단이다. 시장이나 역에서 사람들의 짐을 날라다 주고 삯을 받는 사람들을 구루마꾼, 나중엔 리어카꾼으로 불렀으며 거의 대부분 빈민으로 알았지만, 흠, 나중에 알고 보니 동대문 시장 리어카꾼은 30여 년 전 화폐가치로 권리금이 1억을 넘었다고 한다. 물론 1920년대엔 틀림없이 빈민이었을 거 같다.
  이렇게 살던 이상화에게 1926년은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된다. 바로 그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개벽」에 발표하고, 이 시 때문에 개벽은 판매금지라는 불벼락을 맞는다. 이 시가 좀 길다. 소싯적에 시에 곡조를 붙인 노래 깨나 목이 터지라고 불렀던 거라, 길더라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표작이기도 하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 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갑부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로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잡혔나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전문)



  이 시는 읽을 때마다 참 먹먹하다. 유신시대, 5공 시절에도 막걸리 한 잔에 빼놓을 수 없는 노래였기도 했다. 하여튼 이상화는 이 일이 있을 후에 본격적인 요시찰 인물이 되고, 다음 해인 1927년에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테러가 벌어지자 또다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웬만하면 본격적인 룸펜 시대로 접어들어야 하건만, 백부 이일우 씨 일가가 워낙 막강해서 그랬는지 학교에서 교직을 맡기도 하고 조선일보 경북 총국을 경영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서른여섯 살이 되던 1936년, 맏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기 위해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유랑하고 돌아와 다시 한 번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는 등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다가 해방 두 해를 남겨둔 1943년, 위암으로 생을 접는다.
  이렇게 또 한 명의 강직한 저항 시인은 역사 뒤로 사라지고, 해방이 온다. 분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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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0-12-02 2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덕분에 까마득한 옛날 교과서에서 배웠던 시를 다시 읽게 되었네요. 시인 이상화가 이렇게 강직한 분이셨음을 새삼 다시 느꼈습니다.

Falstaff 2020-12-03 09: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솔직히.... 요새 시의 개별화, 파편화 현상에 도무지 적응하기 힘들어 옛 시를 다시 찾기 시작했답니다. ㅋㅋㅋ 다 인생입지요.
 
파저란트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김진혜.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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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하게 몇 년 전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열여섯 살의 소년일 때, 그는 대단한 첫사랑을 했다. 상대의 이름을 ‘사라’라고 하자. 소년과 사라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을 했고, 키스를 나누었지만 더 이상은 없었다. 소년은 동정이었고 사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믿는다. 사라는 자신의 풋풋한 마음을 부모에게 알렸다. 호기심이 생긴 부모는 외동딸의 남자친구가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 그를 저녁 만찬에 초청했다. 사라의 부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소년은 다림질한 흰 셔츠와 넥타이, 양복을 차려입고 사라의 현관문을 들어섰다. 광을 낸 구두를 신은 발을 응접실 마루에 들여놓자 소년의 코에는 마루 광택용 왁스 냄새가 진하게 풍겨왔다. 사라의 부모는 소년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여, 어머니는 자꾸 생선요리를 접시에 담아주었고, 아버지는 진짜 백포도주를 따라 주었다. 백포도주 네댓 잔을 곁들인 만찬이 끝나자 이미 깊은 밤이었다. 사라의 아버지는, 결코 소년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전히 점잖게 너무 늦은 시간이니 하루 자고 가라 은근하게 권했고, 소년 역시 정중하게 마음은 그러고 싶으나 초면에 그리 신세를 질 수 없다고 거절을 했다. 잠시 후 사라의 아버지가 다시 한 번 자고 갈 것을 권했을 때 소년은 마침내 그러하기로 했다.
  방문 앞에서 사라의 키스를 받고 침실에 든 소년은 꿈만 같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 기뻐 어찌할 줄 몰랐다. 고양된 기분에 고급 백포도주의 취기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그리고는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깊은 밤인지는 몰랐다. 자면서 뭔가 축축한 느낌. 방이 온통 물에 젖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소년은 한 순간에 잠이 확 깨면서, 아차, 하필이면 몽정을 했구나, 라고 당황했다. 적신 리넨 위에 남을 흔적에 대한 집중으로 잠깐 고통스럽던 소년은 곧이어 그것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고, 그것이기는커녕, 차라리 몽정이었으면 귀엽기라도 했을 텐데, 배불리 먹은 저녁식사와 백포도주 전부를 침대 위에다가 토해놓은 거였다. 심지어 똥까지 싸놓았으니 이 불쌍한 소년을 어찌할까. 그의 나이 겨우 열여섯 살, 고1 정도에 불과한데. 소년은 벌떡 일어나 의자 위에 벗어놓은 셔츠와 양복과 양말을 들고, 구두를 신은 채 살금살금, 사라의 부모가 눈치 채지 못하게 집을 벗어나 벌판을 뛰기 시작했다. 수치심으로 울부짖으면서. 이후 소년은 단 한 번도 사라와 마주치치 않았다.
  <파저란트>는 이 소년이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사이의 성인남자가 된 후 연이은 여행을 떠났던 이야기다. 나는 두 번째 장chapter에 나오는 위의 에피소드를 주목했다. 열여섯 살 때 저런 경험을 당했다면, 이 소년, 이젠 소설의 화자 ‘나’가 평생 짊어지고 다녀야 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작가인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독일 각지에 친구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독일의 모든 곳을 다녀본 것도 아니고 아는 것은 더욱 아니다. 자신이 벌었는지, 가문으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았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의 소년, ‘나’는 고급 호텔에 숙박하며 비싼 술을 마시고 싶을 때까지 마실 수 있는 부르주아이며, 심지어 프롤레타리아들을 존중하지도 않는다. 물론 친구들 가운데는 프롤레타리아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없는 건 아니어서 일부러 다 해진 옷과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한다. ‘나’와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역시 최고급 승용차인 S시리즈 메르세데스 벤츠에 카폰을 달고 다니고, 거대한 집을 몇 채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초라한 카페나 아파트에서 열리는 파티를 찾아다니며 프롤레타리아들과 마약에 취하기도 한다. 대단한 재산의 상속자 자격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인텔리나 부르주아 떨거지들을 불러 파티를 열어주기도 해야 한다. ‘나’는 이미 상당한 단계까지 알코올 의존증에 도달해 있으며 고급 담배를 거의 체인처럼 물고 다니는데 결코 아름답지 않은 담배연기를 비행기 금연석에 앉아 뿜어내는 취미가 있기도 하다. 책에서 일관되게 보여주는 ‘나’의 대표적인 경향은 남의 말을 경청하지 못하는 것.
  책을 열면 ‘나’가 있는 곳이 독일 최북단, 누드 비치로 유명한 쥘트 섬이다. 한때 몸이 대단히 비대한 괴링이 여름을 보내곤 한 휴양지. 한 번은 그가 ‘피와 명예의 단도’를 분실해 포상금을 걸고 해변을 샅샅이 뒤져 보이 자르센이란 젊은 농부가 포상금을 탄 적도 있는 곳. 이젠 늙은이들의 누드 비치. 이렇게 곳곳에서 ‘나’는 과거 나치의 흔적이나, 이제 나치의 적어도 일부를 계승한 것처럼 보이는 사민당-나치를 곳곳에서 불쑥 발견하기도 한다. 일찍이 나치를 탄생시켜본 경험이 있는 나라의 국민으로, 이건 마치 열여섯 살 때 겪었던 치명적인 수치스러움을 평생 지녀야 하는 ‘나’의 원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상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오직 하나의 꿈을 가지고 산다. 여배우 이사벨라 로셀리니와 결혼 해 아이도 두엇 두고, 저 북쪽의 황량한 섬에서 작은 오두막을 짓고 겨울 내내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세상과 연을 끊고 사는 일.
  그건 그냥 희망이다.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나’하고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아마 없을 거 같다. 그러면 희망이라기보다 꿈이다. 독일의 몇 군데를 다니면서, 당일치기로 그리스의 동성애자 해변이 있는 섬에까지 다녀와 봐도 ‘나’는 뚜렷한 정체도 없고, 목적도 없고, 그저 술을 마시고, 구토하고, 담배를 피우고, 마약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에도 어쩔 수 없이 마약 또는 신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알약도 한 번 먹어보고, 무엇보다 정처가 없다. 스위스 취리히에 닿기 전까지. 하이델베르크와 비슷하지만 보행자 전용도로도 없고 아직도 전차가 다니는 취리히.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 아하, 토마스 만이 취리히에 묻혔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취리히 근교, 토마스 만이 잠든 공동묘지를 찾아가지만 날이 어두워져 만의 무덤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어서, 독자인 나는 뻥! 머리가 어질어질. 결말이 이런 거였어?


  <망자들>을 인상 깊게 읽어 곧바로 크라흐트의 책 두 권을 샀다. <파저란트>는 1995년에 발표했고, 우리나라에선 2012년에야 번역, 출간했다.  이 책 역시 대단히 인상 깊다. 물론 내 취향하고 맞지 않는 것도 자주 등장한다. 출연진들이 너무 자주 술과 마약을 하고, 구토도 한다. 물론 꼼꼼히 읽어보면 정말로 구토한다기보다 일종의 비유법으로 구토를 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하여간 구토, 하면 좀 지저분하다. 다른 과한 장면도 있고. 그것만 아니었으면 누구에게나 권할 텐데. 그만큼 흥미진진하고, 발표한지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참신한데 말이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앞으로도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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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01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어나가다가 ‘결말이 이런 거였어?‘ 때문에 급 읽고 싶어졌는데요,
저도 마약과 구토..가 너무 싫어서 또 망설여지네요.

제가 오래전에 읽은 책들 중에서도 이런 게 있었어요.
‘에릭 라인하르트‘의 <신데렐라>라는 책인데요, 검색해보니 2010년에 번역되어 나온 책이네요.
여기에 보면 주인공이 연정을 품은 상대의 집에 찾아갔다가(사춘기였던 때로 역시 기억합니다) 그 집에서 식사를 대접받고 갑자기 설사가 나올 것 같아 그 집 화장실에 찾아갔지만, 옷을 벗는 속도가 다소 늦었던 겁니다. 네...........
그래서 팬티에.... 이 일을 어쩌나, 이걸 어떻게 해결하나 싶어 난처해 화장실에서 나가지 못하는데 하도 안나오니 바깥에서는 아 유 오케이? 차 준비해놨어, 나와서 마셔~ 하고, 소년은 에라 모르겠다, 냄새나는 팬티를 벗어던지자, 하고는 멍청하게도 그 팬티를 변기에 넣고 돌려버리는 겁니다....


이 책은 이부분만 생각나요. 책이 두꺼웠는데 책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고요. 하하.
으..싫다.

술과 마약, 구토는 너무 싫지만, 머리가 어질어질 결말이 어떤걸까 너무 궁금해서, 저는 또 장바구니에 담으러 갑니다. 그럼 이만..

Falstaff 2020-12-01 09:39   좋아요 0 | URL
으, 술, 구토 싫어하시면 읽지 마세요. 정말 힘듭니다. 소싯적에 술 마시고 똥은 싸본 적 없어도 잠자리에 구토해본 입장에서, 묘사가 너무 리얼해 정나미가 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ㅋㅋㅋㅋㅋ
마약 하고 취한 중에 벌어지는 일도 위에다 묘사를 안 해서 그렇지 참 역겹고요. 대신 을유에서 나온 <망자들>을 추천해도 되겠습니까?????

Falstaff 2020-12-01 09:42   좋아요 0 | URL
결말도 쇼킹한 거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만 팍 공감이 와 닿을 텐데요, 그거 가르쳐드리면 스포일러, 재미가 적어질 거 같아서 제목을 숨겼습지요.

다락방 2020-12-01 09:56   좋아요 1 | URL
망자들 검색해보겠습니다. 아이참, 폴스타프님은 제가 모르는 책을 너무 많이 알고 계셔서 올 때마다 제가 검색하느라 바쁩니다. ㅎㅎ

저는 소설 읽으면서 대부분 잘 공감하는 편이긴한데 유독 마약 얘기는 힘들더라고요. 도무지 공감이 안되고 공감에의 의욕 조차도 안생기는 것 같아요. ㅠㅠ

2020-12-01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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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팀 오브라이언 스스로가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징집되어 1969년부터 70년까지 베트남전에 사병으로 참전한 전력이 있다. 1968년에 대학을 다녔으면서도 베트남으로 가야 했던 젊은이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1968년의 들불 같은 반전 운동을 겪은 미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청년들은 약간의 돈과 대량의 대마초가 든 가방을 등에 지고 캐나다로 거주를 옮겨 ‘양심적 병역거부’를 실천에 옮겼으며, 훨씬 더 많은 청년들은 심각하게 양심적 병역거부를 고민하다 베트남 전쟁에 휩싸이기 위한 군사교육을 받았고, 아주 적은 청년들은 미국 내에서 끝까지 참전을 거부하며 기꺼이 전과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하여 1968년 이전에도 그랬지만 특히 그 해를 기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병사들은 전장으로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돌아왔을 때 역시 미국 역사상 어느 전쟁과 비교해도 환영을 받지 못했다. 미국인들이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에 반대하고, 그 전쟁에 참전했던 것을 자랑스레 이야기하지 않는/않았던 두 번의 전쟁이, 우연하게도 동(남)아시아에서 있었던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뿐이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승리하지 못했으며, 베트남에서 건국 역사상 최초로 패전의 멍에를 썼다.

  불명예스러웠던 베트남 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이 나와 있다. <디어 헌터>, <지옥의 묵시록>, <샌프란시스코에서의 하룻밤>, <프래툰> 같은 영화부터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하얀 전쟁>으로 제목을 바꾼 안정효의 <시장과 전장>,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등의 우리나라 소설들이 떠오를 뿐, 놀랍게도 외국(특히 패전국인 미국) 문학에서 진지하게 베트남 전쟁을 그린 소설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다. 장교여야 하지만 작품을 쓰기 위해 일부러 사병으로 지원해 경험한 것을 쓴 태평양 전쟁 소설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의 작가 노먼 메일러의 <밤의 군대들>은 위에서 얘기한 1968년 반전 운동을 현장 취재한 것이고, 알렉시 제니의 <프랑스식 전쟁술>은 미국과의 전쟁 이전 베트남에서 벌어진 독립투쟁으로의 인도차이나 전쟁을 부분적으로 다루었으니 그것도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나도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인들의 작품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팀 오브라이언의 다분히 자전적, 경험적인 소설 또는 이야기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재미있게 읽었을 수밖에. 오브라이언은 자신이 경험했던 베트남 전쟁에서의 여러 단편fragment들을 여러 매체를 통해 먼저 발표하고, 나중에 그것들을 모아 서로 연관 있게 배열하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말단 병사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책의 제목인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각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짊어지고, 들고, 몸에 부착하고 다닌 것들을 개별 장비, 무기, 보호구, 개인 지참물 등을 뜻하고, 작가는 이것들에 관해 무게, 길이 등을 독자에게 상세하게 보고한다.

  전투를 위한 준비물과 무기 말고, 소대장인 지미 크로스 중위는 뉴저지 주의 마운트 서배스천 칼리지 3학년에 재학중인 ‘마사’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보낸 편지 뭉치와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과가 끝나면 참호를 파고 그 안에서 보는 습관을 들였는데 이때마다 뉴햄프셔 화이트산맥으로 낭만적인 캠핑을 떠나는 상상에 젖고는 한다. 헨리 도빈스는 덩치가 거구인지라 다른 건 빠뜨리더라도 여분의 식량은 꼭 가지고 다니고, 데이비드 젠슨은 야전 위생 훈련을 받은 경험이 있어서 칫솔과 치실을 항상 지참하고 여기다가 요양휴가 중에 훔쳐온 호텔용 크기의 비누 바를 배낭 옆구리에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4월 중순에 탄케 마을 수색 중 머리통에 총알이 박힐 예정인 테드 라벤더는 원래 겁이 많은 친구라서 이걸 보완하기 위해 진정제를 아침마다 서너 알씩 먹는 버릇이 있고 여기에 6~7 온스의 질 좋은 마리화나를 어딘가에 숨겨 다닌다. 밀림 속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콘돔은 무전병 미첼 센더스의 전투복 상의 주머니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일곱 개의 훈장을 받고 제대해 귀국하는 노먼 보커는 쓰지도 않는 일기장을, 랫 카일리는 만화책을, 인디언 출신 침례교도 카이오와는 아버지가 선물한 신약성경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는다.

  전쟁터는 진짜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있는 것이라 세상 어느 곳보다 징크스가 심하리라는 건 당연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만의 잡동사니를 마치 부적처럼 가지고 다니기도 하는데, 카이오와는 신약성경과 더불어 발소리를 없애주는 사슴 가죽 모카 신발 한 켤레(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아무 작품 참조), 데이브 젠슨은 카로틴이 풍부한 야맹증 개선 비타민, 리 스트렁크는 최후의 무기라고 주장하는 새총, 랫 카일리는 브랜디와 M&M 초콜릿, 테드 라벤더는 6.3 파운드나 나가는 야간투시경을, 그리고 헨리 도빈스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적으로 여자친구의 팬티스타킹을 목에 두르고 다닌다. 도빈스는 얼마후 여자친구로부터 결별 선언 편지를 받지만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팬티스타킹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능력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 믿으며 계속 목에 감고 다닌 결과 책이 끝날 때까지 상처 하나 입지 않는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상황을 우리는 전쟁이라 부른다. 애초에 세상에 정당한 전쟁은 없다고 믿는 나는 같은 맥락에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그래 이 책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참상, 시신들이 함부로 훼손된 광경, 차라리 몸이 터져 하늘로 솟구치며 나뭇가지에 바로 전까지 함께 농담한 친구의 내장이 걸리고, 나무를 기어 올라가 그걸 수습하는 일. 끊임없이 폭우가 내리는 절정의 우기에 마을의 공동변소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던 곳을 하필이면 야영지로 골랐다가, 하필이면 박격포의 집중 포격을 받고, 하필이면 가장 진중하던 카이오와가 치명상을 입은 상태로, 하필이면 똥의 늪 속으로 빠지는 걸 뻔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구출해낼 수 없는, 참경들.

  팀 오브라이언은 참경과, 그걸 목도했던 병사들이 훗날 무력감과 후유증과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이런 것들 ‘만’ 쓰고 있지 않다. 그는 과거 베트남에서 겪었던 일들과 이에 관한 트라우마와 치유라기보다는 그것, 기억들, 후유증과 함께 살아내기를 말하고 있는데, 이의 해결을 위한 방법으로의 “이야기”, 이야기를 만드는 것,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 그것을 통해 전쟁, 궁극적으로 죽음과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다. 이것이 오브라이언이 글을 쓰는 목적이라고, 단순히 이 책만 읽으면 결론을 낼 것 같다. 그래서 작가의 경험을 중심으로 써내려간 단편의 모음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들 다 빼고, 전쟁터에서 수컷들의 일상적인 욕설도 빼고, 빼어난 문장을 중심으로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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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먹는 사람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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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 이상하게 안 읽히는 작가였다. 그래 이번에도 <별을 먹는 사람들>을 사놓고 4백 쪽이 넘어가는 장편인데 이걸 어떻게 읽을까, 조금 근심을 했었다. 하지만 기우. 재미있게 잘 읽었다. 로맹 가리가, 이번에 처음에 알았는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처럼 러시아 태생으로 어려서 서유럽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보코프처럼 대 귀족 출신도 아니고, 이미 혁명도 한참 지난 1928년에야 프랑스 니스에 정착한 차이는 있지만. 중요한 경력으로 가리가 불가리아, 미국, 볼리비아, 이중에서 특히 라틴 아메리카인 볼리비아에서 외교관으로 체류한 적이 있다는 점으로 보인다. 그래 이이의 작품 가운데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등의 라틴 아메리카를 무대로 하는 것들이 있나보다. 내가 가리에 대해 뭘 알아서 이렇게 말하는 건 전혀 아니고 그냥 이이의 라이브러리를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든다, 하는 수준. 이번에 읽은 <별을 먹는 사람들> 역시 라틴 아메리카의 가상 국가에서 한 독재자의 마지막 하루를 좇았다.
  책을 열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호아트 박사. 보잉기 조종석 보다 아스텍 피라미드 꼭대기의 제사장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기장이 모는 비행기를 타고 자포츨란 반도 상공을 날고 있는 중이다. 자포츨란이 어디 있는지 구태여 찾아볼 필요 없다. 내가 먼저 검색해봤다. 그런 곳, 없다. 하여간 그랬는데, 비행기가 예정에도 없던 공군기지에 착륙하더니 한 노부인을 태우는 것. 세상에, 비행기를 도중에 세워서 부인 한 명을 태워? 그렇다. 시기는 대충 1970년대 초 같고, 당시 라틴 아메리카는 못 말릴 수준의 독재와 밀림 속 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이 한참일 때였으니, 쿠바 사태 이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의 적화를 방지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독재자들을 지원하던 시기였고, 특히 북부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저 유라시아 반도 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대한민국의 독재자보다 훨씬 더한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했으니, 독재자가 자기 엄마 한 명을 수도로 불러들이기 위해 그깟 하늘을 나는 보잉기 한 대를 공군 기지에 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호아트 박사는 미국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 수준의 기돗발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 비록 가톨릭 국가이기는 하지만 노부인의 아들이자 이 나라의 지배자인 알마요 장군이 정식으로 초청해 막 영공을 넘어온 차이다. ‘금발의 천사장’이란 별명과 천부의 쇼맨십, 설득력과 무대매너, 여기다가 드라마틱한 효과를 연출하는 탁월한 능력으로 자주, 유명 영화배우보다 잦은 빈도로 신문기사에 등장하지만 찬사와 거의 비슷한 비율로 비난, 불만, 악의에 찬 야유의 논평을 받는 목사. 신기한 건 비난과 야유를 받는 것과 비례해 이이의 인기가 치솟는다는 것. 뭐 우리나라에도 비난을 받을수록 인기가 치솟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장관을 비롯한 집권자들한테 욕을 먹을수록 지지도가 올라가는 사람. 하여간 호아트 박사는 매년 세후 백만 달러 이상을 교회에 벌어다주면서 자신은 교회로부터 받는 봉급만 수령해 딱 그 수준에 안분하는 청렴한 인물인데, 그만큼 종교적으로는 까다롭다는 이야기겠지 뭐.
  이 목사가 공항에 도착하니, 독재자의 초청에 의한 방문이니까 당연하게 별도의 수속 없이 곧바로 리무진에 승차를 하는데, 자연스레 자기 혼자 탑승하는 줄 알았으나 동행이 있는 거였다. 마른 몸매에 키가 큰 매력적인 외모의 코펜하겐 출신 덴마크 사람 아게 올슨. 그리고 올슨의 어깨 위에 앉은 올레 옌슨. 옌슨 씨는 살과 뼈와 내장과 피 대신 목재로 만든 인형이다. 덴마크 인이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삼은 복화술의 주인공. 복화술? 이 이야기 하니까 떠오르는 소녀가 한 명 있다. 아무리 바빠도 이건 한 번 보고 가자.

 

 

  하여튼 박사는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닌 상태로 사화산 지대를 지나는데, 수백만 년 전에 지축을 흔들며 폭발했던 상처가 이젠 놀라운 경치로 남은 해발 2천7백 미터 고지를 지나면서 보니 목사가 탄 차 뒤로 캐딜락이 네 대가 더 따라오는 거였다.
  먼저 당당한 풍채와 콧수염과 턱수염이 아주 멋진 40대 중년 남자로 자신을 마르세이유에서 온 앙투안이라 소개한다. 앙투안 씨는 공을 열두 개 가지고 공연하는 프랑스 사람으로 2년 전에 샤를 드골에게 직접 레지옹 도뇌르 십자 명예훈장을 받은 권위 있는 예술가. 자칭 18세기의 프랑스 전통을 이어가는 고전주의자로 함께 동행한 나이 든 미국인 공연 캐스터 찰리 쿤으로부터 ‘현재로서는’ 분명한 일인자의 자리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이라는 단서 조항을 유난히 강조해 발음했던 것이 좀 문제이긴 하지만.
  공연 기획자 찰리 쿤은 본명이 ‘메지라 쿠라’이며 시리아 알레프 출생으로 40년도 넘어 전에 미국으로 이주해 공연기획사에서 일을 해와, 지금은 하필이면 알마요 장군이 주식의 75퍼센트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회사에 있는지라 장군의 요구에 맞는 할리우드 여자 영화배우를 물색, 조달하는 채홍사 역할과, 특히, 특이한 공연을 하는 새로운 재능을 찾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다.
  존 셸던이란 이름의 변호사도 끼어 있다. 이이는 알마요 장군의 어마어마한 미국 투자 자금의 운영을 담당하고 있으며, 심지어 스위스 비밀 계좌에도 깊숙하게 관련이 있다. 이이와 동승한 사람은 허약한 젊은이로 안톤 마누레스코라는 이름의 루마니아 사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유명 연주자이긴 하다. 루마니아의 유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게오르게스 에네스코의 애제자로 비발디에서 프로코피예프까지 방대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엄청난 곡들을 아무 받침대 없이 물구나무로 연주하는 기이한 광대다. 이러한 연주 방식으로 돈을 벌어 이젠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도 한 대 장만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 조만간 똑바로 서서 연주회장에서 연주하는 정식 바이올리니스트로 데뷔할 생각을 하고 있다.
  쿠바 젊은이도 한 명 있는 바, 이 젊은이는 도색, 즉 음란 공연의 대가로 쉬지 않고 열일곱 번의 정사를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벌일 수 있는 쿠바 판 변강쇠다. 이 변강쇠와 동승한 사람이 무지하게 중요한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일찍이 날아가는 비행기를 세워 타고 도착한 장군의 어머니. 이이는 적도 지방의 무더운 계곡에서 사는 인디언 쿠혼 족으로 (‘쿠혼’ 족이 어떤 사람들인지 검색해보지 마시라. 내가 먼저 해봤으니. 안 나온다. 가리가 만든 가라 원주민 종족이다.) 명품 가방에 마스탈라 잎을 잔뜩 채워 가지고 늘 한입 가득 말린 이파리를 씹고 있다. 이 이파리를 씹으면 잎에 든 성분 때문에 일종의 환각상태에 접어들어 세상사가 그렇게 힘든 줄, 심지어 배고픈 지도 모를 정도라, 마스탈라 잎을 씹는 사람들을 일컬어 “별을 먹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단다.
  이들이 수도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길가에 있는, 더럽기가 말할 수 없으나 어울리지 않게 현대식 전화기가 카운터에 놓여 있는 카페에서 차를 세우더니 이들을 호송하던 가르시아 대위가 모처에 전화를 걸고는 갑자기 독한 데킬라를 벌컥벌컥, 마누라 도망가 소주 세 병 마시고 농약 먹는 인간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큰 소리로, 모랄레스 대령님, 이런 중요한 사안은 장군님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야겠습니다. 어쩌구저쩌구 전화통에다 대고 흥분해서 떠들어 댄다. 몇 분 후, 드디어 공화국의 최고 권력자이자 하늘을 나는 보잉기도 입 한 번 벙긋해서 떨어뜨리는 호세 알마요 장군과의 직접 통화가 이루어졌고, 당연히 그의 지시도 직접 받게 된다.
  “잘 듣게, 바보 멍청이 같으니라고. 거기 있는 자들을 모두 총살한다. 즉시 이행하도록. 잘 들었나, 가르시아? 즉시 한다. 시신은 산으로 가져가게.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그리고 모랄레스는 매장하라고 했겠지만 매장은 하지 말게. 사람들 눈에 띄도록 해야 할 걸세. 도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버리게. 잘 보이는 곳에다. 그러고 나서 나한테 보고하도록 하게.”
  지금 알마요 장군은 자신이 직접 초청한 미국 최고의 기돗발 목사와 예술가들, 심지어 자기의 생모, 게다가 변강쇠까지, 다 총살하라고 지시를 내리는 거였다. 심지어 이곳에 막 도착한 자신의 미국인 애인까지도. 도대체 이거 뭐야. 진짜 이 사람들의 앞날, 앞날은커녕 몇 분 후에 저 먼 이국 땅, 경치만 좋은 화산지대에서 정말 숟가락 놓는 거야? 힌트. 아게 올슨의 어깨 위에 앉은 올레 옌슨은 책의 저 뒤편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음…… 피와 살로 만들어진 당신들 중 누군가 이 지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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