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세계문학의 숲 7
마크 트웨인 지음, 김영선 옮김 / 시공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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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이쯤에서 이이의 작품과는 연을 끊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소위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또 아서 왕의 궁전은 뭐야? 아서 왕, 명검 엑스칼리버, 귀네비어, 란슬롯을 비롯한 원탁의 기사, 성배 등등하고 무슨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마크 트웨인’이란 이름값에 눌려 그의 책을 한 권 더 읽기로 하고 구입했다.
 이 책은 간단히 말해서 무협지다. 코네티컷 주 하트포드에서 태어난 미국인인 화자 ‘나’는 실용주의 정신이 매우 투철한 양키 중의 양키이며, 대장장이 아버지와 말을 다루는 수의사 삼촌 덕에 어려서부터 쇠붙이 일과 말을 다루는 법을 비롯한 말 관계의 지식이 높은 단계에 이르렀으며, 머리가 굵어지자 무기 만드는 공장에 입사해 온갖 물건, 예컨대 엽총, 권총, 대포, 보일러, 엔진, 그리고 기타 온갖 기계를 만드는 법을 알게 된 수석반장으로 직원을 2~3천 명 거느린 경험이 있다. 소위 ‘기름밥’을 먹는 거친 남자 2~3천 명과 함께 일을 하면 때로는 거친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하는 법. 하루는 헤라클레스라는 별호로 불리던 덩치 큰 직원하고 시비가 붙어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는데 애초부터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하여 한 방 맞고 나가 떨어져 머리통을 기계에 부딪는 바람에 정신을 잃어버렸던 적이 있다.
 인간의 윤회 아시지? 영혼의 윤회는? 뭐 그게 그건지 아닌지 아리송하지만 대강 짐작은 간다. 그러면 시대의 전위轉位transposition는? 시대가 전위될 수 있다면 육체, 즉 인간의 몸도 전위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이 책은, 시대건 인간의 몸이건 전위될 수 있다는 가정 위에서 씌었다. 더 쉽게 말하면 시간 여행. 그래 ‘나’는 19세기에서 졸지에 6세기 초, 서기 528년으로 무려 13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잉글랜드, 그 가운데 캐멀롯에 떨어지고 만다. 어디서 본 거 같지? 저항군 대장의 엄마를 죽여 영웅적인 존 코너의 탄생 자체를 막기 위해 미래에서 도착한 기계인간. 그가 시대의 전위를 통해 45년 전의 LA에 떨어졌을 때, 터미네이터와 존 코너의 아버지는 맨몸 상태였다. 이게 정상인 거 같다. 그러나 이 책은 1889년에 출간했으니 지금 눈높이에 맞춰 야박하게 굴지는 말자. 하여간 코네티컷 양키 기술자 ‘나’는 체크무늬 양복에 모자를 쓴 상태에서 13세기 전의 영국에 떨어져 일찍이 하버드 졸업생 토마스 불핀치가 <아서왕 이야기>에서 기술한 대충의 장면을 따라간다.
 근데 이게 왜 무협지냐고? 6세기 영국을 생각해보시라. 아서 왕 본인도 아직 브리타니아에 남은 로마 잔당과 숙명의 전투를 벌인 적이 있던 고대인. 심지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승인한지 215년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아서 왕, 기사, 성직자들은 백성과 노예들의 등골을 빼 호의호식하고 있음에도, 백성과 노예들은 이런 불합리한 체제가 당연한 진리라고 여겨 숙명적으로 따르고 있는 야만의 상태. 불을 뿜는 용과, 약 4미터에 육박하는 거인족, 마법사, 마녀가 횡행하는 전설의 시대이면서도 아직 로마 가톨릭조차 이런 미신과 마법을 용인하던 시대. 여기에 19세기 최고의 기계공학을 섭렵하고 실제로 기계를 만들 줄 아는 미국인이 등장한다. 무협지에 거의 공통적으로 보이는 건, 부당하게 가족과 집을 잃은 주인공이 산에 올라 도사를 만나 혹독한 단련을 마친 후, 도사가 그를 불러, 이제 하산 하거라, 한 마디 하면서 내려주는 보검. 미국 뉴잉글랜드 코네티컷 출신의 양키 ‘나’는 보검 대신 현대과학이란 초절정의 무기를 갖게 된다.
 비슷한 소설이 한국에도 있다. 복거일의 <역사 속의 나그네>. 복 씨 책에선 2582년의 인류가 타임머신 “가마우지 호”를 발명해 과거로 쏘았는데, 500년 단위로 이상을 일으켜 2082년에 불시착을 했고, 이 기계를 수리해 2082년에 주인공이자 과학자이자 전직 해군장교이자 다리 한 쪽을 저는 상이군인을 태우고 다시 과거를 향해 발사했지만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 158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10년 전에 불시착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당연히 복거일의 작품(총 6권 가운데 20세기에 쓴 1~3권까지)이 훨씬 더 재미있고, 근거도 있고 그렇지만, 트웨인과 복 씨의 사이에 100년의 터울이 있으니 그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다. 복거일은 <역사 속의 나그네>를 스스로 “무협소설”이라 정의하고 나도 동의해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역시 무협소설이라 단정하고 있는 거다. 트웨인은 6세기 영국을 무대로 공화정을 옹호하고 왕정을 부정하며, 가톨릭교회에 대한 불만을 여과하지 않고 내비친다. 근데 꼭 그래야 했을까? 이미 19세기 말, 진정한 왕정을 펼치는 나라도 극소수였고, 노예제도도 없어졌으며, 개신교를 믿는 사람이 가톨릭교도의 수보다 훨씬 많아진 세상이었음에도. 트웨인의 전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보면, 허클베리와 톰이 벌이는 장난이 도무지 아이의 짓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도 아이들의 본성이 선하지 않다는데 동의하지만, 실제로 어른을 상대로 잔혹한 행위를 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그러니 그건 마크 트웨인 본인의 머릿속에서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든 것으로 읽은 적이 있다. 이제 <…… 양키>의 등장인물은 마흔에 육박하는 화자 ‘나’일 바에 조금 더 잔혹해도 그리 무리가 없을 것. 그래서 ‘나’는 19세기 말의 과학이 제공하는 무지막지한 과학기술을 무기로 해 수만 명의 귀족, 왕족, 성직자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다시 읽어도 마크 트웨인은 내 체질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펼쳐 보이는 상상력의 그림이 내 취향이 아니다. 과한 과장과 전형적인 양키 스타일의 유머 코드가, 미국에서는 마크 트웨인을 세르반테스나 셰익스피어와 견줄 만한 대 문호로 자랑할 수 있을지언정, 솔직히 말할까?, 내가 읽은 마크 트웨인은 철 안 난 어른 비슷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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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터브리지의 시장 대산세계문학총서 137
토머스 하디 지음, 이윤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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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잉글랜드의 풍속 하나를 소개한다. 토머스 하디 본인이 쓴 책의 서문에 나오는 첫 번째 각주를 그대로 옮기는 일이기도 하다.


 “잉글랜드에서는 부유층이 아니면 이혼이 불가능했던 17세기 말 이래 가난한 남편들이 아내를 팔아넘기는 관습이 생겨나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7쪽 각주)


 <캐스터브리지의 시장 The Mayor of Casterbridge>를 연재한 시기가 1886년. 그러니 이런 유쾌하지 못한 관습이 거의 끝나가는 말기라서, 잉글랜드 사람이라도 이제는 더 이상은 정말로 아내를 팔아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였을 것인데. 그런데 소설의 시간적 공간은 19세기가 아직 3분의 1도 채 지나지 않은 해의 늦은 여름부터 시작하니 대략 1830년대 초. 1886년의 영국 독자들은 책의 주인공이자 뜨내기 건초 묶기 일꾼인 마이클 헨처드가, 50년 전에, 근방에서 가장 큰 가축시장이 열리는 웨이든-프라이어즈에 도착해 술이 잔뜩 취해 자기 아내 수전과 딸 엘리자베스-제인을 5기니, 즉 5파운드 5실링에 팔아넘길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마이클 핸처드가 진심으로 아내와 딸을 팔아넘길 작정을 한 것이 아니라, 술김에 헛소리를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여태까지는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선원 한 명이 등장해 빳빳한 5파운드짜리 잉글랜드 은행권 한 장과 1실링짜리 동전 다섯 개를 식탁보 위에 올려놓는다. 모두가 식탁보 위에 놓인 돈을 바라봄으로써 상황이 완전히 무르익은 것을 알게 된, 전통적인 계약과 상인의 나라인 잉글랜드 국민인 수전 핸처드, 마이클의 아내가 남편에게 한 마디 하기를, “이제 다음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마이클, 내 말을 주의 깊게 들어. 만일 당신이 그 돈에 손을 대면, 나와 아이는 저 남자와 함께 떠나. 명심해. 나는 농담하는 게 아냐.” 그러나 스물한 살의 젊은, 그리고 술에 취한 남편 마이클은 이것조차 아내가 감히 남편에게 훈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불쾌해진 마음에 아내를 떠나보내고 만다.
 완전히 술에 취한 마이클은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는 밥집의 탁자에 고꾸라져 잠이 들어버린다. 이튿날 새벽에 홀로 잠에서 깬 마이클은 아직 아무도 집밖에 나오지 않을 시간에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교회로 들어가 지성소에까지 다가가 성경책 위에 고개를 숙이고는 큰 소리로 외친다.
 “저, 마이클 핸처드는, 9월 16일 아침, 이 신성한 장소에서 하느님 앞에 서약합니다. 저는 제가 이제껏 살아온 햇수만큼 그러니까 앞으로 21년 동안 어떠한 독한 술도 입에 대지 않겠습니다. 저는 이 결심을 제 앞의 이 성경책에 대고 서약합니다. 제가 이 서약을 어기면 귀가 멀고, 눈이 멀고, 몸을 움직이지 못해도 좋습니다.”
 성경책에 대고 맹세를 한 마이클은 뉴슨이란 이름의 선원이 준 5기니를 포함해 자신이 가진 모든 돈이 떨어질 때까지 몇 달을 아내와 딸을 찾아 헤매다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풍문을 듣고는 잉글랜드의 남서부에 위치한 웨섹스 지역의 자치도시 캐스터브리지로 발길을 돌린다.
 세월은 언제나처럼 말도 없이 18년을 흘려보낸다. 18년 전에 타당하지 못한 관습으로 뉴슨에게 팔린 아내 수전과 딸 엘리자베스-제인이 다시 자신이 팔린 웨이든-프라이어즈로 돌아온다. 천막을 치고 밥집을 하며 불법으로 럼주를 판매했던 노파가, 이제 쇠락한 가축시장보다 더 초라하고 더러운 좌판을 깔고 우유밀죽을 팔고 있었으며, 노파를 통해 남편이었던 마이클 핸처드가 캐스터브리지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녀는 당연히 캐스터브리지로 향하게 되는데, 아 글쎄, 술꾼 마이클 핸처드가 아니고, 술을 딱 끊은 핸처드 씨가 자치도시 캐스터브리지의 홀아비 시장 겸 건초와 곡물 중개상인의 사장으로 부귀를 누리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헤어진 가족이 만나느냐고? 만난다. 그게 끝이냐고? 아니, 소설의 시작이다. 당연히 캐스터브리지 시장의 가족이 재결합은 하는지, 만일 한다면 어떤 절차를 거치는지, 그 오랜 세월동안 건강한 육체의 소유자로 아직 마흔도 채 되지 않은 시장이 새벽마다 불끈 치솟는 정념을 굳건히 버틸 수 있었는지, 건초 묶는 일을 하던 잡부 출신이 홀로 건초, 곡물 중개상을 잘 해나갈 수 있는지, 오래 떨어져 살던 딸과 화목하게 될지, 기타 등등은 안 알려줌.
 작품이 전형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것이라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거의 첫 장면부터 앞으로 어떤 배역을 하게 될지 눈에 보일 정도인데 거기다가 새롭게 줄거리를 함부로 이야기하는 짓은 하지 못하겠다. 빅토리아 시대의 작품이라고 해서 구식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동시에 고전이다. 아직도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와 디킨스와 하디를 읽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 본성과 심리는 여전하기 때문이고, 이들의 작품이 기본적으로 심리소설이기 때문이다. 문학동네에서 낸 하디의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충청도 사투리가 만발하는 장면을 별로 어색함 없이 읽으신 분들은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서 캐스터브리지가 잉글랜드의 남서부 지역이라 그들의 사투리를 한반도의 남서부 지역인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한 것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원래부터 하디가 잉글랜드 판 지역주의 소설가로 그의 모든 작품에서 어마어마한 사투리가 등장한단다. (그래봐야 내가 읽은 하디는 <…… 테스>, <이름 없는 주드>, 그리고 <캐스터브리지의 시장>에 불과하지만) 이 책에서도 진짜 끝내주는 건 또 다른 주인공 혹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하는 똑똑한 도널드 파프레이의 스코틀랜드 사투리라는데, 파프레이의 대사는 표준말로 번역을 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다른 사투리로 번역을 하다보니 맛이 나지 않아 할 수 없이 표준어로 만들었다는데, 번역본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이 정도는 이해를 해야 할 듯하다.
 <…… 테스>, <이름 없는 주드> 두 편으로 하디는 그만 읽으려 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또 읽게 됐는데, 하디의 책이 재미는 있다. 근데 바로 이 ‘재미’라는 것이 소위 소설문학을 읽는데 최고의 즐거움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달리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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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8-08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요즘 이거 출퇴근길에 전자책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어서 막 내릴 역에서 허둥지둥 내리고 그럽니다. 역시 이야기꾼 하디. 전 이제 그 아내 팔아버린 놈이 높은 자리에 떡하니 올라간 부분까지 읽었어요(폴스타프 님이 딱 포스팅에 언급한 부분까지. 근데 이건 정말 초반아닙니까! 그 뒤에 펼쳐질 내용은 과연 두둥~). 대체 무슨 수로 그렇게 올라갔을지 궁금.... ㅋㅋㅋㅋ

Falstaff 2019-08-08 09:53   좋아요 1 | URL
크... 그러시군요.
이제 진짜 이야기가 펼쳐지기 시작하는데, 그걸 미리 알려드리면 정말 민폐 같아요. 하여튼 온갖 난장판이 벌어지기 시작할 겁니다. 오해와 갈등과 거짓과 흥망성쇠와 ㅎㅎㅎ 기타 등등.
재미있게 읽으셔요. 그저 재미가 장땡입니다. ㅋㅋㅋㅋ
 
조플로야 을유세계문학전집 91
샬럿 대커 지음, 박재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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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반인 1806년에 출간한 작품. 작가 샬럿 대커가 1771년 말과 72년 초 사이에 태어났다. 조금 차이가 나지만 책을 읽으면서 더불어 생각나는 영국 여류 작가가 있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이 사람들의 작품을 흔히 ‘고딕소설’이라고 한다. <조플로야> 역시 고딕. 한 마디로, 조금 괴기스럽다.
 15세기가 저물어 갈 무렵 베네치아에 로레다니 후작 가문이 있었는데, 후작은 17년 전에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라우리나 디 코르나리 양과 혼인을 해서 연년생으로 아들 레오나르도와 딸 빅토리아를 두었다. 라우리나 코레다니 후작부인에겐 자신이 언제나 찬사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 허영심, 자부심이 과도한 것이 흠이었다. 후작부인이 열다섯 살에 스무 살 먹은 로레다니 후작을 만나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아 이제 자식들이 사춘기의 문턱을 넘어설 때까지, 라우리나 부인은 그저 사치를 떠는 일 말고 별로 생각할 거리가 없었다. 심지어 정조를 지켜야 하는 이유도, 노력도. 왜냐하면 감히 후작부인을 유혹할 정도로 간이 부은 사내가 베네치아에선 없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후작 내외는 만날 가면무도회와 파티 등의 풍요와 경박함 속에서 사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19세기 초반 작품이니 그때 기준으로 ‘사랑의 매’를 전혀 쓰지 않고 그냥 방치 비슷하게 키우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독자는 이 책이 한 귀족 가정의 불행한 연대기가 될 것이라고 짐작을 할 수 있다. 불행한 복선은 행복한 전망보다 언제나 훨씬 더 눈에 띄는 것이라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후작의 저택에 하루는 로레다니 후작의 절친한 친구인 부름스부르크 남작의 추천서를 가진 젊고 잘 생긴 독일인 아돌프 백작이 방문하여 장기간 투숙을 하기에 이른다. 그림이 그려지시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도? 아돌프 백작은 후작부인이 결혼할 때의 나이를 이미 지난 후작 영애 빅토리아와 백만 촉광이 넘는 눈빛을 교환하고 어느 달빛 교교한 날 밤 도금향 나무 아래 깊고 깊은 키스를 나눈 후 살그머니 빅토리아 양을 자빠뜨리면, 아, 너무 식상한 연애 이야기에 그칠 것이라서, 따님 빅토리아 대신 결혼 후 17년 동안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던 라우리나 부인과 죽기 살기의 욕정어린 연애를 벌이고 만다. 15세기 말이면 대강 연산군 재위 초기 정도. 당시 유럽에서도 귀족 집안에 아내가 바람이 나면 할 수 있는 일이 야반도주 말고는 별로 없었나보다. 아돌프와 아이들 엄마 라우리나 역시 야반도주를 해버리는데, 깨끗하게 도망가서 자기들끼리 지리산 옆에 터를 잡고 화전을 지어먹든지 어쨌든지 어쨌든 알아서 살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겁도 없이 베네치아를 벗어나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는 거였다.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만난 로레다니 후작과 아돌프. 당시의 규범대로 이들은 곧바로 단도를 꺼내들고 결투를 벌였으나 일순간에 흥분해 정신이 몽롱한 후작이 냉정한 아돌프를 당해낼 수 없어 치명상을 입고 결국 죽어버린다. 아들 레오나르도는 엄마가 도망을 가버리자마자 집안 꼴 좋~다, 한 마디 하고 가출해버린 상태에 이제 빅토리아 홀로 남을 수밖에. 이 때가 기회다 싶은 엄마와 엄마의 정부가 빅토리아를 까다롭고 완고하기 짝이 없는 늙은 친척에게 맡겨버리고 다시 둘 만의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버리는데, 여기까지가 소설 <조플로야>의 시작부분.
 나도 여기까지 읽으면서 왜 제목을 ‘조플로야’라고 했을까를 많이 궁금해 했다.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베네치아. 그럼 무대는 아니고, 사람 이름? 이탈리아에서 ‘조플로야’라면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올 거 같은데 왜 이리 등장이 늦지? 걱정하지 마시라. 드디어 작품의 절반, 200쪽이 넘어가면 빅토리아가 꾸는 꿈 또는 환상 속에서 무어인 노예 또는 하인 조플로야가 등장한다. 무어의 귀족출신이긴 하나 15세기 말에 있었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노예의 신분으로 떨어져 엔리케 씨의 하인으로 들어와 있던 것. 엔리케는 빅토리아가 우여곡절을 겪고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베렌차 씨의 동생. 아이가 아버지를 빼닮았을 때 흔히들 “씨도둑은 못 한다.”라고 말한다. 그럼 엄마를 빼닮았을 때는 뭐라 그러나? “알 도둑은 못 한다.”라고? 그건 아닌 거 같은데. 하여간 빅토리아가 완전히 엄마를 빼닮았다. 새색시 빅토리아가 그만 시동생 엔리케한테 홀딱 반해버려 전전긍긍하다가, 심지어 열일곱 살이나 더 먹은 늙은 남편 베렌차가 무슨 사고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삼신산 신령님께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딱 이 즈음해서 빅토리아의 꿈 또는 환상 속에 흰 터번을 둘러쓴 존귀한 몸가짐을 가진 거구의 흑인 사나이 조플로야가 등장해, 빅토리아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들어주기 시작한다. 어디서 읽어본 내용 같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메피스토펠레. 조플로야가 바로 19세기 초반에 다시 등장한 메피스토펠레, 바로 그다. 그 족속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원하는 바를 다 들어주면서 결코 그 행위를 통해 만족이나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피비린내가 폴폴 나지만 다른 책들보다 역겹게 읽히지 않는 건, 19세기 초반의 고딕소설답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한 이십 년쯤 더 흘러 19세기 프랑스 소설가들이, 예컨대 알렉상드르 뒤마 선생이 <조플로야>를 한 다섯 권 정도의 분량으로 쓴다면 정말 재미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19세기 초 영국에선 왜 이리 음산한 이야기를 많이 만들었을까? 안개 많이 끼는 날씨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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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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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에 작품활동을 시작했다는 서울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소설가. 1996년. 그러면 내가 정영문이란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데 조금은 타당한 이유가 된다. 먹고 살기위해 가장 바쁘게 지냈던 시절이다. 1년 후엔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던 한반도에 외환위기가 닥쳐 회사로부터 당신이 희망퇴직을 희망하는 것이 회사의 희망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남들이 보기엔 어느 때보다 더 바쁘지만 사실은 바쁜 거 없이 바쁜 척하기에 바빴던 시절이 도래하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 (자기 혼자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하는) 어느 직장인이 있어 소설 따위를 읽어볼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내가 아는 정영문은, 여태까지도 ‘정영목’인 줄 알았던 책 존 파울스의 <마법사>를 번역한 이라는 것밖에 없었는데, 글쎄 이이가 소설을 썼다는 거 아니야?
 <어떤 작위의 세계>. 어떤 책보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에 어울린다. 난 이 책 딱 한 권 가지고 정영문을 좋아하기로 작정했다. 아직 다른 책을 검색해보지는 않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적어도 한 권은 더 읽을 생각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보면, 이 책은 2010년 봄과 여름 동안 대산문학재단의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머물며 쓴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가까운 체류기라고 한다. 작가의 표현대로 ‘표류기’라고 하면, 이 작품이 5년 전 캘리포니아를 방문해 멕시코 남자와 동거하고 있는 전 애인 커플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두 계절을 보낸 스토리는 있을지언정, 그것 이외의 어떤 플롯도 보이지 않는다. 즉, 기존의 소설을 생각하면서 어떤 서사를 기대한다면 애초에 틀린 선택이란 말씀.
 5년 전에 ‘나’는 캘리포니아 황무지에 있는 전 애인의 별장에서 전 애인의 멕시코 애인을 포함해 세 명이 눈을 뜰 때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데킬라를 퍼마시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두커니 정물처럼 서 있는 용설란을 향해 권총을 쏘아 갈기고, 벌거숭이로 다니는 멕시코 남자의 (당연히 생식기를 포함한) 알몸을 감상하고, 빈둥거리기조차 힘들어지자 함께 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악명 높은 짙은 안개 속으로 쳐들어갔다가, 히피의 21세기 버전일 수도 있는 호보Hobo족을 만나 담배를 나눠 피우다가 전 애인 커플을 떠나보내고 홀로 샌프란시스코에 남은 적이 있었다.
 근데 그건 그걸로 끝난다. 5년 전의 기억은 5년 전의 기억일 뿐, 전 애인이나 전 애인의 애인이 ‘나’에게 베풀었거나 ‘나’가 베푼 의식주 및 여흥 또는 유흥, 심지어 용설란을 향해 불을 뿜던 권총, 용설란에다 힘찬 오줌줄기를 뿌리던 ‘나’의 전 애인의 현 애인의 비뇨기 등이 5년 후인 2010년 봄과 여름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도 않고, 2010년 봄과 여름에 ‘나’가 다시 다른 호보를 만나거나,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관심을 쏟거나 금발의 조그만 여자 아이에게 복수심을 품거나, 샌드위치에 뿌려진 마요네즈를 걷어내기 위해 깨지락거리는 일과 아무 관계가 없다. 정영문 혹은 작가 혹은 <어느 작위의 세계>에 등장하는 ‘나’가 2010년 봄과 여름에 걸쳐 샌프란시스코와 감깐 동안의 하와이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 그냥 쓴 작품.
 이런 의미에서 <어느 작위의 세계>는 작가의 말처럼 ‘표류기’라고 보기 힘들다. ‘나’는 대산문학재단의 도움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자발적으로 도착했으며, 애초부터 그곳에서 목적을 갖고 하다못해 금문교 위 서쪽에서 666미터 지점에서 태평양으로 떨어져 죽겠다는 각오 같은 것도 하나 없이, 초장부터 멕시코에도 우드스톡 같은 히피문화가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둥의 힌트를 주면서 오직 하나, 일 하지 않기, 노력하지 않기, 심지어 빈둥거리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에도 도전을 한 것처럼 보일 정도의 무위의 지경에 도달하기 위해 도를 닦는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거야? ‘나’의 두뇌는 마음과 달리 세밀함과 광대함 사이에서 자유로이 말장난을 하고, 근거 없는 무의미들을 탐색한다. 물론 탐색에 성공을 했는지 아닌지는 독자가 판단할 일이지만 어쨌든 말장난에 관한 한 무난한 성공을 거두어 읽는 이로 하여금 간혹 얼굴을 구기며 웃게 만들기도 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다. 자신이 아는 것을 과장하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으면서 주위에 실재하거나 사람의 심리 안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신랄하게 정확한 표현을 해내는 정영문이라는 작가. 좋다. 기꺼이 또 다른 책 한 권을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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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5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휴가 때 이 책을 들고 갔다가
결국 못 다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무작위의 작법이라고나 할까요.

저자가 번역을 맡았던 이창래 선생의
어떤 모습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Falstaff 2019-08-05 13:53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전형적으로 독자의 취향에 의해 호, 불호가 갈릴 거 같더라고요. ㅋㅋㅋㅋ
맞고 안 맞고는 완전 팔자소관입지요. ^^;;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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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에서 낸 시집 <Lo-fi>가 작년에 나와 주목을 받았다. 그래 나도 읽어볼까 싶었는데, 이왕 강성은을 읽는다면 처녀시집을 먼저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수 있을 거 같아 집어든 것이 창비에서 나온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첫 느낌은 이제 시집에 관해서 창비와 문지 사이의 격벽은 없어졌구나, 였다. 강성은이 출판사를 옮겨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을 낸 것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정작 이 시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동화연산 시기계장치의 탄생”이란 제목을 단 시인이자 건축평론가인 함성호의 해설. 조금 길지만 첫 문단을 그대로 복사해보겠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 강성은은 아무것도 옹호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부정(否定)하고 있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不定)한다. 너무  많은 해(解)가 나올 수 있는 방정식을 수학에서는 부정(不定)이라고 한다. 이 수학적 의미를 그대로 빌려와 설명한다면, 세계관을 부정(不定)한다는 말은 세계관이 없거나 무수히 많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무엇을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거나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성은이 이 정해지지 않는 이야기의 방식을 자신의 시적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함성호가 방정식의 예를 들어 설명을 했으니, 나도 집합론을 써서 말을 좀 보태자면, 부정(否定denial)은 ‘어느 것도 택하지 않거나 정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지목하고 있는 특정 집합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더 크고, 부정(不定)은 두 집합이 같은 집합인 경우다. 발음이 같은 부정denial과 부정indefiniteness를 써서 말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렇지, 위의 문단은 짧게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다. “강성은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不定indefiniteness)한다.” 해설의 제목도 매우 아리송하다. “동화연산 시기계장치”가 도대체 뭐야? 함성호라는 그래도 이름이 난 시인은 정작 한문을 써야 할 때 쓰지 않아서 동화연산이 뭔지, 시기계장치가 뭔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동화연산? 첫 문단에 방정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화연산同化演算이라고 억지로 생각해줄 수 있겠지만, 시기계장치는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동음이의어 否定과 不定과 함께 제목, “동화연산 시기계장치” 자체가 요새 시인이나 요새 평론가, 답다, 다워. 좋다. 강성은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한다. (이제 한문은 안 써도 되겠지.) 이게 무슨 뜻인가. 독자가 시와 시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세계관이 저마다 다르다, 또는 다를 것이라는 뜻일까? 그렇게 이해하고 있겠다. 참고로 부정이란, 방정식의 풀이가 분자, 분모 둘 다 영zero이 될 때, 함수에선 두 곡선이 같은 곡선일 때 만나는 점의 개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 시집이 나온 시기가 2009년. 시인의 나이 37세. 시는 전체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시는 당연히 시어 속에 많은 비유와 은유를 포함해야 하겠지만, 내가 ‘요즘 시’를 읽지 않는 이유가 바로 과도한 비유와 은유로 인해 만연하는 시적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즉, 강성은 한 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요새 시들 속에, 자의식이 시인 자신의 내적 표현으로 고착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도무지 시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강성은도 당연히 이들의 집합 가운데 한 명으로 스스로가 시집의 첫 번째 시 <세헤라자데>에서 밝히듯,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중략)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후략)”들을 마구 쏟아내겠다고 선언한다. 책 뒤표지에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이를 두고 “우리 시대의 세헤라자데는 하룻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초현실적이고 부조리하기도 하고 인과율이 파괴된 즉흥성과 기발함으로 가득 차”있다고 촌평을 한다. 근데 내가 시집을 읽고 해설이나 촌평을 들여다보니, 좀 과한 칭찬이다.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털에 기름을 끼얹고 성냥을 그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불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불 속으로 싱싱한 장미꽃을 피워올리지요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질러요 환호해요

                                  <서커스 천막 안에서> 부분


 남편이 마술사인데 아내인 내 머리털에다다가 기름을 끼얹더니 성냥을 긋는다고?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 “줄기와 가시만 남은 내 머리 속에 신비한 향신료를 넣고 휘휘 저어요 /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부글부글 끓어넘쳐요”로 넘어간다. 자, 이제 이해하시나? 시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당연히 남편, 마술사, 기름, 성냥을 긋는 행위, 불, 장미꽃, 신비한 향신료, 끓어 넘침 같은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느 대상이나 행위, 아니면 시인의 생리 전 증후군쯤에 겪은 기분을 은유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걸 이리 써 놓으면 누가 아느냐는 말이지.

 우리는 달려간다 중세의 검은 성벽으로 악어가 살고 있는 뜨거운 강물 속으로
 연필로 그린 작은 얼룩말을 타고 죄수들의 호송열차를 얻어타고
 (중략)
 죽은 군대의 첫 전쟁터로 우리의 발자국이 잠든 사원으로
 우리는 우리를 읽지 못해 장님이 되는 밤
 어둠속에서 총으로 서로의 심장을 정확히 쏘는 마술
 톱으로 잘라낸 피투성이 몸을 다시 이어붙이는 마술
 (후략)
                                        <오, 사랑> 부분


 아, 강성은은 사랑을 해도, 오, 사랑을 해도 이리 전쟁터에서 서로의 심장을 쏘고 그것도 모자라 이미 죽은 시체를 전기톱으로 절단할 정도의 치열한 사랑을 하는구나. 그럼 앞의 시 <서커스 천막 안에서>의 마술사 남편이 ‘나’의 머리통에 기름을 쏟아 붓고는 성냥을 칙, 그어버리는 것도 사랑의 행위겠네? 거참 말 된다.
 이 시집을 읽고 이이의 세 번째 시집 <Lo-fi>의 구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시적 표현과 대상의 내재화가 시를 읽는 소양이 부족한 나를 너무나도 앞서가기 때문이다. 이건 시인의 잘못이 아니다. 시를 읽는 독자의 자질이 안 되거나 시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강성은 뿐만 아니라 당분간 ‘요즘 시’ 읽기는 미루어야 하겠다.
 시인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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