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창비시선 303
강성은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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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지성사에서 낸 시집 <Lo-fi>가 작년에 나와 주목을 받았다. 그래 나도 읽어볼까 싶었는데, 이왕 강성은을 읽는다면 처녀시집을 먼저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수 있을 거 같아 집어든 것이 창비에서 나온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첫 느낌은 이제 시집에 관해서 창비와 문지 사이의 격벽은 없어졌구나, 였다. 강성은이 출판사를 옮겨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집을 낸 것도 그럴 듯하다.
 그런데 정작 이 시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건 “동화연산 시기계장치의 탄생”이란 제목을 단 시인이자 건축평론가인 함성호의 해설. 조금 길지만 첫 문단을 그대로 복사해보겠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 강성은은 아무것도 옹호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부정(否定)하고 있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不定)한다. 너무  많은 해(解)가 나올 수 있는 방정식을 수학에서는 부정(不定)이라고 한다. 이 수학적 의미를 그대로 빌려와 설명한다면, 세계관을 부정(不定)한다는 말은 세계관이 없거나 무수히 많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무엇을 부정(否定)한다는 것은 그 어느 것도 택하지 않거나 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성은이 이 정해지지 않는 이야기의 방식을 자신의 시적 방법으로 채택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함성호가 방정식의 예를 들어 설명을 했으니, 나도 집합론을 써서 말을 좀 보태자면, 부정(否定denial)은 ‘어느 것도 택하지 않거나 정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자신이, 지목하고 있는 특정 집합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의미가 더 크고, 부정(不定)은 두 집합이 같은 집합인 경우다. 발음이 같은 부정denial과 부정indefiniteness를 써서 말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렇지, 위의 문단은 짧게 한 문장으로 끝낼 수 있다. “강성은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不定indefiniteness)한다.” 해설의 제목도 매우 아리송하다. “동화연산 시기계장치”가 도대체 뭐야? 함성호라는 그래도 이름이 난 시인은 정작 한문을 써야 할 때 쓰지 않아서 동화연산이 뭔지, 시기계장치가 뭔지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동화연산? 첫 문단에 방정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동화연산同化演算이라고 억지로 생각해줄 수 있겠지만, 시기계장치는 도무지 오리무중이다. 동음이의어 否定과 不定과 함께 제목, “동화연산 시기계장치” 자체가 요새 시인이나 요새 평론가, 답다, 다워. 좋다. 강성은은 자신의 세계관을 부정한다. (이제 한문은 안 써도 되겠지.) 이게 무슨 뜻인가. 독자가 시와 시어를 통해 바라볼 수 있는 세계관이 저마다 다르다, 또는 다를 것이라는 뜻일까? 그렇게 이해하고 있겠다. 참고로 부정이란, 방정식의 풀이가 분자, 분모 둘 다 영zero이 될 때, 함수에선 두 곡선이 같은 곡선일 때 만나는 점의 개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이 시집이 나온 시기가 2009년. 시인의 나이 37세. 시는 전체적으로 그로테스크하다. 시는 당연히 시어 속에 많은 비유와 은유를 포함해야 하겠지만, 내가 ‘요즘 시’를 읽지 않는 이유가 바로 과도한 비유와 은유로 인해 만연하는 시적 애매모호함 때문이다. 즉, 강성은 한 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요새 시들 속에, 자의식이 시인 자신의 내적 표현으로 고착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도무지 시적 해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강성은도 당연히 이들의 집합 가운데 한 명으로 스스로가 시집의 첫 번째 시 <세헤라자데>에서 밝히듯, “옛날이야기 들려줄까 악몽처럼 가볍고 공기처럼 무겁고 움켜잡으면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리는 이야기 조용한 비명 같은 이야기 (중략) 포르말린처럼 매혹적이고 젖처럼 비릿하고 연탄가스처럼 죽여주는 이야기 마지막 키스처럼 짜릿하고 올이 풀린 스웨터처럼 줄줄 새는 이야기 집나간 개처럼 비를 맞고 쫓겨난 개처럼 빗자루로 맞고 그래도 결국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개 같은 이야기 내가 죽을 때까지 죽은 당신이 매일 하는 그 이야기 (후략)”들을 마구 쏟아내겠다고 선언한다. 책 뒤표지에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이를 두고 “우리 시대의 세헤라자데는 하룻밤의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초현실적이고 부조리하기도 하고 인과율이 파괴된 즉흥성과 기발함으로 가득 차”있다고 촌평을 한다. 근데 내가 시집을 읽고 해설이나 촌평을 들여다보니, 좀 과한 칭찬이다.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내 머리털에 기름을 끼얹고 성냥을 그어요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불타요
 내 남편은 마술사예요

 불 속으로 싱싱한 장미꽃을 피워올리지요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소리질러요 환호해요

                                  <서커스 천막 안에서> 부분


 남편이 마술사인데 아내인 내 머리털에다다가 기름을 끼얹더니 성냥을 긋는다고?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 “줄기와 가시만 남은 내 머리 속에 신비한 향신료를 넣고 휘휘 저어요 / 나는 커다랗게 환하게 웃어요 내 머리는 부글부글 끓어넘쳐요”로 넘어간다. 자, 이제 이해하시나? 시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당연히 남편, 마술사, 기름, 성냥을 긋는 행위, 불, 장미꽃, 신비한 향신료, 끓어 넘침 같은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느 대상이나 행위, 아니면 시인의 생리 전 증후군쯤에 겪은 기분을 은유한 것이리라. 그런데 그걸 이리 써 놓으면 누가 아느냐는 말이지.

 우리는 달려간다 중세의 검은 성벽으로 악어가 살고 있는 뜨거운 강물 속으로
 연필로 그린 작은 얼룩말을 타고 죄수들의 호송열차를 얻어타고
 (중략)
 죽은 군대의 첫 전쟁터로 우리의 발자국이 잠든 사원으로
 우리는 우리를 읽지 못해 장님이 되는 밤
 어둠속에서 총으로 서로의 심장을 정확히 쏘는 마술
 톱으로 잘라낸 피투성이 몸을 다시 이어붙이는 마술
 (후략)
                                        <오, 사랑> 부분


 아, 강성은은 사랑을 해도, 오, 사랑을 해도 이리 전쟁터에서 서로의 심장을 쏘고 그것도 모자라 이미 죽은 시체를 전기톱으로 절단할 정도의 치열한 사랑을 하는구나. 그럼 앞의 시 <서커스 천막 안에서>의 마술사 남편이 ‘나’의 머리통에 기름을 쏟아 붓고는 성냥을 칙, 그어버리는 것도 사랑의 행위겠네? 거참 말 된다.
 이 시집을 읽고 이이의 세 번째 시집 <Lo-fi>의 구입을 하지 않기로 했다. 시적 표현과 대상의 내재화가 시를 읽는 소양이 부족한 나를 너무나도 앞서가기 때문이다. 이건 시인의 잘못이 아니다. 시를 읽는 독자의 자질이 안 되거나 시의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강성은 뿐만 아니라 당분간 ‘요즘 시’ 읽기는 미루어야 하겠다.
 시인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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