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집 범우문고 312
이육사 지음 / 범우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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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이원록의 시집. 살아생전 그가 쓴 시 서른여섯 편 모두와 남은 여백에 산문 열세 편을 합해 한 권의 문고판을 만들었다. 육사 이원록은 시인이기 앞서 독립운동가. 열일곱 살에 안일양과 결혼을 한다. 안일양은 후에 육사와 함께 조선군관학교를 1기 졸업하는 안병철의 손아래 누이다. 육사가 매우 건강체질이라 나이 마흔에 베이징에서 옥사하기 전까지 병원 신세 한 번을 지지 않았을 정도였단다. 그러나 안병철은 일경에 체포당해 고문 끝에 동지의 이름을 자백하고 만다. 육사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장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처 안일양하고는 더 살지 못하겠다고 한 다음에 실제로 집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한다. 이때 육사의 부모가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며느리 안일양을 각별하게 다독여주고 육사를 엄하게 타일러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니 가히 대쪽이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편협하달 수도 있겠고. 세상에 고문을 당하고도 자백하지 않을 인간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런 독종 혹은 영웅은 흔한 게 아니니 이해해줄 법한데 말이다.
  스물두 살 때 육사는 형 원기, 아우 원일과 함께 의열단에 입단한 바 있다. 이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과 연관되어 두 해 반 동안 투옥, 대구 격문사건으로 6개월 투옥, 이후에 곧바로 만주에 가 독립군 자금 모금을 논의하고(이때 외아들 동윤이 홍역으로 생을 마감한다.) 조선군관학교에 입교, 졸업한다. 그러나 곧바로 1934년에 일경에 피검되고 풀려난 뒤 1943년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다시 체포될 때까지 일경의 요시찰 대상으로 피신과 가택수색 등의 역경을 거치게 된다. 이후 베이징으로 이송되어 다음 해인 44년 1월에 옥사했으니 인생 자체가 독립운동사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인물이다. 생전에 아들 하나와 아래로 딸 둘을 두었으나, 아들과 큰딸은 홍역으로 일찍 여위고 둘째 딸은 지금 80세로 안동에 있는 육사의 집터에서 일본어 통역 일을 하고 있다. 이이의 백일 자리에서 육사는 하나 남은 딸에게 윤택하게 살지 말라는 뜻으로 옥비沃非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합방이 없었더라면 육사는? 내가 보기엔 낭만주의자가 됐으리라. 그의 가슴 속에 숨었다가 기어이 서른이 넘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쓰기 시작하는 시. 그것도 겨우 십년 남짓 세월 동안 도피와 운동과 노동 속에서 한시 세 수를 포함해 서른여섯 편의 시를 남긴다. 시를 품은 마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어이 시를 쓰게 만드나보다.
  육사, 하면 당연히 이 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전문)



  육사 역시 이 시를 제일 좋아했다면서 자신이 이 시를 썼다는 것이 기적이란 얘기까지 했단다. 이 시의 ‘내 고장’은 조선을, 청포도는 조선인들을 상징한다고 말했다는데 독자가 굳이 시인의 뜻을 좇아 시를 감상할 필요는 없다. 육사의 말대로라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당연히 민족의 해방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의 사미인곡에서 미인을 임금이 아니라 진짜 마음속 연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이듯 ‘내가 바라는 손님’이나 ‘주절이주절이 열린 전설’을 독자마다 다른 대상과 이야기로 치환해도 이제는 무방하다. 이 시, <청포도>를 더 이상 해방을 위한 염원으로 읽지 않아도 너무 충분하게 아름답지 아니한가. 분명히 얘기할 것은, 그렇다고 시인이 자신의 운동을 이리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폄훼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는 점.
  그의 낭만성은 시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실린 <해후邂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보자.



  지금 놀이 나려 선창船窓이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의 상장喪章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은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의 분수령分水嶺에 앞날의 기旗발을 걸고 나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부분. 9, 10)



  두 번째 실린 시 <강건너 간 노래>에서도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 눈물먹은 별들이 조상오는 밤 // 밤은 옛ㅅ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 한가락 여기두고 또 한가락 어데멘가 /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부분 4,5)


  라고 노래한다. 이런 낭만시인이 세 번째 시 <광야>에 오면 갑자기 돌변, 이렇게 외치고 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부분 5)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육사 이원록은 독립투사였던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의 정체성엔 혁명가와 낭만주의자 DNA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가 북국의 추위가 몰아치는 베이징의 감옥 속에서 순사할 때까지 결코 혁명가와 낭만성을 혼동하는 일은 없었으리. 그리하여 내 의식 속에서 육사는 더욱 찬연하게 빛나는 투사요 시인이다. 20여 년 전 아이들에게 내가 골라 사준 몇 권 안 되는 위인전 속에 육사가 있었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미娥眉  - 구름의 백작부인 -



  향수鄕愁에 철나면 눈섶이 기난이요
  바다랑 바람이랑 그 사이 태여났고
  나라마다 어진 풍속에 자랐겠죠


  짓푸른 깁장을 나서면 그 몸매
  하이얀 깃옷은 휘둘러 눈부시고
  정녕 왈츠라도 추실란가봐요


  해ㅅ살같이 펼쳐진 부채는 감춰도
  도톰한 손결 교소驕笑를 가루어서
  공주의 홀笏보다 깨끗이 떨리요


  언제나 모듬에 지쳐서 돌아오면
  꽃다발 향기조차 기억만 새로워라
  찬젓때 소리에다 옷끈을 흘려보내고


  초ㅅ불처럼 타오르는 가슴속 사념思念은
  진정 누구를 애끼시는 속죄贖罪라오
  발아래 가득히 황혼이 나우치리오


  달빛은 서늘한 원주圓柱아래 듭시면
  장미薔薇쪄 이고 장미쪄 흩으시고
  아련히 가시는 곳 그 어딘가 보이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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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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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니것, 1922년생 독일계 미국인인데, 초년 중년 말년 두루 걸쳐 당대를 함께 지내온 인류  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사주를 받고 태어났다. 30년대 말에 대학에 진학해 생화학을 전공하다 성적도 좋지 않고 대학신문에 (전쟁 중에) 평화주의에 관한 글을 게재해 반강제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입대, 유럽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교외에 끌려가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리는 드레스덴에서 2만 5천 명을 희생시킨 고폭탄과 소이탄의 세례를 고스란히 경험한다. (보니것을 소개한 모든 책에선 13만 명의 희생자 운운하지만 2만 5천이 현재까지 공식적인 희생자 수다.) 이것을 기점으로 해, 모르긴 몰라도 이이가 평생을 걸쳐 지녀야 할 디스토피아의 미래, 파괴를 향한 인간본성, 지구멸망 같은 것들에 관한 비관적 세계관을 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거나 1940년대 초반까지 대학에 다녔고, 전쟁 중 정신적 내상은 다음으로 하고 어쨌든 신체적 부상도 입지 않았으며, 제대한 다음에 다시 복학과 포기를 한 후 10년가량 고생한 다음 작가로 유명세를 탔으니 인생이 이 정도면 장땡이지 뭘 더 바라나. 그러나 <제5 도살장>, <고양이 요람>, 단편집 《세상이 잠든 동안》에 이어 <갈라파고스>까지 읽어본 결과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한 그의 정신적 내상이 상당히 깊은 것 같았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들 아시다시피 1835년 비글호를 타고 도착한 다윈에게 깊은 영감을 준 적도 위의 작은 화산섬들. 보니것의 의문은 갈라파고스 제도의 바다/육지 이구아나, 육지 거북, 핀치 새들이 어떻게 대륙에서 1,0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적도 상에 있으면서도 남극 한류가 흐르는 태평양을 건너 그곳에 살게 됐는지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생물체가 지구의 오지로 흘러갔다면 인간 역시 갈라파고스의 생물처럼 제도 가운데 한 섬에 정착해 독특한 과정으로 진화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소설의 무대인 1986년에 새로운 인류의 아담과 이브들이 오지에 고립되기 위해서는 극도로 발달한 인류문명이 이들을 찾아낼 생각을 하지 못해야 하니 반드시 이들을 제외한 인류는 멸망을 했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조건은 둘이다. 소규모의 인류가 갈라파고스에 도착을 해서 다시 섬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 것. 인류가 멸망을 할 것. 커트 보니것이 이 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시하는 것들이 대단히 이색적이었다. 이이가 63세에 출간한 소설. 갈라파고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나라 에콰도르에 속한 섬이다. 보니것은 1980년대 초중반을 휩쓸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외환위기, 이에 따른 가난한 에콰도르 시민들의 폭동과 약탈 때문에 갈라파고스 자연탐사를 위한 호텔과 호화 유람선이 약탈을 당해, 1831년 12월 27일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한 영국군함 비글호보다도 편의장치나 항해 보조기구도 없이 도망치듯 갈라파고스로 향했고, 도착해 엔진의 시동을 끄자마자 엔진은 그것으로 생명을 끝내는 것으로 만들었다. 레이건과 대처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제삼세계를 빈곤으로 몰아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이들을 바다로 몰아낸 것.
  그러면 인류의 멸망은? 지금 마스크 쓴 채 독후감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쇼킹했다. 유명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생명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박테리아들은 인간의 난소 안에 침입해 난소 안의 난자를 포식하기 시작해 전 세계로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이 박테리아가 침투하면 하루나 이틀 정도 가벼운 미열을 느끼고 소수의 사람들은 며칠간 시력이 좀 흐릿해지는 증상을 느낄 뿐이어서 감염자들은 자신이 감염되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불임의 벽에 갇히게 됐다. 솔직히 말해 지금 지구상 인류가 60억. 이 가운데 남자는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고 똑똑하고 힘 세고 부랄 큰 수컷 인간 백 명만 남아 인구가 30억 100명으로 줄어도 인류의 유지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난자를 포식한다면 인류는 한 세대 만에 끝장을 보게 된다. 어떠신가. 진짜 이런 바이러스가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참 놀라운 상상력이다.
  여기에 귀신같이 등장하는 인간 남자였던 화자가 있으니 이름을 ‘레온 트로츠키 트라우트’라고 한다. 1946년생으로 무뚝뚝한 아버지한테 반항하기 위하여 10대 시절에 가출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 해병대에 입대하는 전통을 만들고 기꺼이 베트남 전쟁, 미국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이 끝도 없고, 보람도 없고, 몸서리처지고, 결국 무의미하기만 한 전쟁터로 보낸 젊은이들 가운데 한 명이 된다. 현지에서 수류탄을 던져 레온이 가장 좋아하는 동료와 가장 싫어하는 동료를 동시에 폭사시킨 노파를 집중 사격해 죽인 경험이 있다. 이이가 위로 휴가차 태국의 방콕에서 만난 스웨덴 의사의 주선으로 해병대를 탈영해 스웨덴으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 시민권을 따고 스웨덴 말을 배운다. 그래 거대한 도크를 현대조선에 단돈 일 달러에 팔아먹은 조선도시 말뫼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가 갈라파고스 자연탐사 호화 유람선 바이아데다윈 호의 내부 용접을 하다 큰 사고를 당한 이야기꾼.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커트 보니것이 생각하고 있는 세계관과 반전의식은 짐작을 할 수 있을 터. 이 위에 보니것 특유의 엽기발랄한 상상력과 입담과 사건의 무거움이나 심각함, 생과 사를 가르는 벼랑 위의 다툼과는 무관하게 툭툭 던져버리는 유머까지, 독자로 하여금 책에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정확하게 책의 1 퍼센트만 말했다. 조금만 더 하자.
  인류가 멸망할 예정이고, 화산재가 아직 비옥한 토지로 변화하지 못한 황무지, 갈라파고스 제도의 산타로살리오 섬에서 인류가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등장인물은 누구일까. 스포일러가 아닌지 생각해봤다. 아니라고 본다. 작가도 이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에콰도르 시민의 약탈을 피해 갈라파고스로 도망하는 무리 안에는 정말로 우연히 거의 원시야만인 수준인 여섯 명의 인디오 소녀들이 탑승한다. 현대문명에 노출된 도시인만 오지에 떨어졌다면 과연 아무 도구도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여섯 명의 킨카보노 족 소녀들이 작가도 생각하지 못한 절묘한 배치였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한 인류학을 공부한 분의 의견을 한 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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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대산세계문학총서 93
나탈리 사로트 지음, 권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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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산세계문학총서를 간행하는 문학과지성사는 책을 낼 때 책의 분류를 정확하게 밝히는 미덕을 지녔다. 예를 들면, 시집, 작품집, 단편선, 장편소설, 희곡 선집이라고 책 표지에 딱 박아 놓는다. 그런데 이 책은 예외다. 1983년. 작가가 여든세 살이 되던 해에 출간했다. 책 뒤편에 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면, 1979년 인터뷰에서 자신은 자서전을 쓸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으나 4년 후인 1983년에 이 책을 발표할 당시부터 소설, 희곡과 같은 장르를 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85년에 다시 문고판으로 출간했을 때는 앞표지에 여섯 살 무렵의 작가의 사진을 실어 작품이 작가의 자서전적 성격을 밝힌 바 있다고 한다. 이 책의 표지는 문고판 표지에 있던 사진이 아니라 ‘세실리아 보’라는 화가가 그린 <어린 시절의 마지막 날>이란 그림이다.
  나탈리 사로트라고 하면 당연히 누보로망을 떼놓고 생각할 수 없을 듯. 하여 뷔토르, 로브그리예, 유르스나르와 뒤라스의 일부 작품처럼 주관적인 감정의 표현을 극도로 절제하는 형식의 글을 써왔을 것이다. 이 자전적 소설 <어린 시절>에서도 작가는 자신이 쓰는 자신의 자전 소설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또 하나의 자신을 등장시킨다. 즉 소설가로의 자신과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진실에 가까운지 아닌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한 또 다른 나. 아 두 명의 나가 계속 대화를 해가며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 여든세 살의 노인이지만 만일 정신이 멀쩡한 백 세 살의 가까운 생존자가 있었다면 그이를 인터뷰하기 위해 기꺼이 양로원을 방문해 호스피스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을 듯하다.
  작가가 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글을 썼을까. 이이는 좀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 완전한 20세기 사람으로 1900년에 모스크바 근교 이바노보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태어나 1999년에 임종했다. 작품을 보면 아버지는 딸을 천주교든 개신교든, 러시아 정교든 어떤 형태의 기독교에도 개방적으로 키우면서도 자신은 확실하게 유대인의 정체성을 밝히고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 반면, 어머니도 유대인인지는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유년시절이 복잡한 건 당연히 부모 탓이다. 젖을 떼자마자 부모가 이혼해서 어머니는 러시아, 아버지는 프랑스에 거처를 정하고 각기 새로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하여간 엄마 하나, 어머니 하나, 아빠 하나, 아버지 하나, 이렇게 네 명의 직계가족을 가지게 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이복동생들도 태어난다.
  여든세 살의 노파가 자기가 기억하기에 가장 오랜 시간부터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어린 시절을 쓴다는 것. 그건 그이가 남들과 비교해서 복잡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언젠가는 자신의 옛 시절에 관하여 써야 하는 숙명 비슷한 것을 갖고 있어서가 아닐까. 결과물을 발표하던지 말든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리하여 자신의 옛 시절은 쓴 결과물은 글쓴이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거 같은데, 문제는 동시대를 살지 않은 독자가 읽을 때 특정인의 과거가 중요한 일이 될 것인가, 과거 속에서 공감할 교집합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아니라면 과거를 회상하는 정서가 마음에 와 닿았는가 하는 것일 수도. 당시엔 부모가 이혼해 구대륙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옮겨가며 사는 일이 상당히 특별한 일이었겠지만 이젠 그런 가족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을뿐더러,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20세기 초 부르주아 계급의 한 아이의 추억 또는 스토리가 그리 감격적이지도 않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임에도 모국어인 러시아어와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독일어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트레이닝을 시킬 수 있는 계급의 영애의 어린 시절이 드라마틱하기도 쉽지 않을 터. 원래의 코스라면 평생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책이나 슬슬 읽다가 연회장을 빛내주는 역할로 일생을 보내야 하겠지. 그러나 누구의 인생도 다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의붓어머니와 이복형제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친모와 친부-계모 간의 화해 불가능한 다툼 같은 것 역시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기에 심각하지 않고, 이제 다 늙어 생각하니까 그렇겠거니 하는 거. 나탈리 사로트도 이것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다.
  나도 이 책에 관해서 독후감을 굳이 더 늘리지 않겠다. 그냥 늙은 작가가 자신의 소년기를 회상해서, (그나마)이게 중요한데,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객관적인 기억을 기록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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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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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가 2013년에 캐나다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앞에 읽은 《디어 라이프》와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 별로 동감하지 못하는 바람에 이 책을 사기까지 나날이 많이 흘렀다. 앞의 두 권을 읽은 감상이 어떻더라,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거든. 그런데 책을 다 읽은 지금, 생각하지도 못한 고민에 싸인다. 《디어 라이프》와 《행복한 그림자의 춤》을 다시 읽어봐야 하나?
  포크너는 요크나파토파라는 가상의 지역 제퍼슨 시를 작품의 중요한 무대로 점찍고, 김원일은 초기엔 경남 진해 옆, 단감으로 유명한 진영에 빠져 있는 듯하다가 세월이 지나면 대구로 지역구를 옮긴다. 앨리스 먼로도 사투리를 쓰는 캐나다의 시골을 무대로 하는데 이 책에선 이 가상의 시골 이름이 핸래티라고 했다. 그냥 핸래티는 시골부자들, 상층부를 이루고 있는 의사, 치과의사, 변호사부터 주물공장 노동자, 일반 공장 노동자, 짐마차 꾼 등이 살며, 작은 강 건너에 있는 웨스트 핸래티는 일반 공장 노동자, 주물공장 노동자부터 비정규 밀주업자의 대가족, 창녀, 아직 잡혀가지 않은 도둑들이 일가를 이룬다고 하고, 주인공 로즈의 사인4人가족은 웨스트 핸리티에 있다. 아버지가 매운 솜씨로 거의 모든 것을 고쳐주고 저렴하게 청구하는 수리비로 먹고 산다고 했다. 그러니까 주인공 로즈와 그의 의붓어머니 플로, 이복동생 브라이언 앞을 기다리고 있는 건 가난. 부자들이 눈으로 볼 때는 돼지우리 같은, 구멍가게가 딸린 집에 살고 있다.
  책은 거지 소녀, 19세기 영국 화가 번 존스의 그림에 나오는 반투명한 얇은 옷을 입은 가난한 소녀로 아프리카의 코페투아 왕이 그녀를 얻기 위해 왕관마저 던져버릴 수 있는 매력의 소녀를 일컫는데, 이 거지 아가씨beggar maid는 장학금을 받아 진학한 대학에서, 말로는 아버지가 상점 몇 개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백화점 체인 소유주의 외아들 패트릭 블래치퍼드가 책의 주인공 로즈를 꼬드기기 위해 한 말이다. 돼지우리는 로즈가 자격지심에 패트릭한테 한 대꾸고.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까 왜 이 책이 참 가슴에 와 닿는지 아직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거지 소녀》는 가난한 집에서 어머니 없이 계모와 엄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로즈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성장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이혼하고, 다시 사랑하고, 아이 키우고, 일하고, 이별하는, 그러니까 사람 사는 이야기다. 같은 구성원이 열 편의 단편소설 또는 부部에 공동의 체험과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 전형적인 연작장편 소설 형식인데, 단편 전문 작가인 엘리스 먼로가 장편(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형식이 아니었을까 싶다. 열 편의 단편소설을 모은 책이라고 하고, 내가 앞에 읽은 작가의 다른 단편집에 비하여 훨씬 공감하면서 읽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첫 번째 작품에서 얻어맞은 펀치가 워낙 세서 감정의 파동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첫 작품의 우리말 제목을 <장엄한 매질>이라 달아놓았다. 원어 제목으로는 “Royal Beating.” 작품의 첫 문장이기도 하고, 아직 로즈의 의붓어머니인줄 모르는 플로가 주인공 로즈에게 하는 말이다. “장엄한 매질을 한 번 당하게 될 거다.” 누구한테? 평소엔 별로 말이 없지만 한 번 열을 받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아버지한테. 로즈는 의붓어머니 플로를 가리켜 절대로 “어머니”나 “의붓어머니”, “계모” 등으로 호칭하지 않고 그냥 이름을 부른다. 불같은 성격의 아버지와 계모, 계모와 불화하는 딸의 트라이앵글에 관한 무수한 공포물 시리즈가 너무도 확고하게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나만 그랬는지 몰라도 독자는 이들 사이의 비극과 돌이킬 수 없는 경원을 생각할지 모른다. 플로도 그렇겠지.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 브라이언보다 로즈에게 더 애정이 가기는 쉽지 않겠지. 하지만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독자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다. 왜?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니까. 더함도 뺌도 없이 앨리슨 먼로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았으니까.
  내가 여간해서 외국어로 쓰인 단편소설을 번역한 책을 읽고 감동하지 않는 것은, 장편과 달리 문장 하나하나가 작품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잘 세공된 언어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선입관 때문이며, 그런 감동은 번역문을 통해서 얻기가 힘들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에스컬레이팅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번역시는 전혀 읽지 않고, 단편소설은 아주 조심해 선택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거지 소녀》에서, 먼로가 툭툭 던지는 무심한 듯한 문장들이 한 소녀, 청소년, 청년, 혼인적령기의 여인, 권태기의 주부, 남의 남자를 사랑하는 이혼녀, 옛 사랑의 사연을 전해 듣는 폐경기 중년까지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주인공 로즈의 그의 의붓어머니 플로의 한 생애를 담담하게 공감하면서 담채화를 구경하듯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준다.
  1931년생이면 현대 여성이니 당연히 여성주의적 발언도 도처에 깔려있다. 그렇다고 페미니즘을 웅변하는 것도 아니면서 독자로 하여금 만일 여성이 아니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들. 처음 두 편의 작품에서는 장애를 갖고 있는 여성이 등장한다. <장엄한 매질>에서는 베키 타이드라는 이름의 머리가 크고 목소리가 요란한 난쟁이. 베키의 아버지 타이드 씨는 웨스트 핸리티에서 가장 큰 푸줏간을 운영하는 돈 많은 푸주한으로 자기 딸, 아들을 폭행할 뿐만 아니라 난쟁이 딸을 성폭행해 임신시켰다는 터무니없이 악의적인 풍문이 돌아 세 명의 악당에게 집 앞 정원에서 린치를 당해 토론토까지 열차를 타고 가 객사를 해버린다.
  두 번째 작품 <특권>에선 프래니 맥길이란 아가씨가 등장한다. 아기였을 때 술에 잔뜩 취한 아버지가 아기를 손에 들고 벽에 뭉개버렸다는 얘기도 있고, 술에 취해 경마차에서 떨어졌는데 이때 말이 뒷발로 차버려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쨌든 뭉개졌으며 그중에서 가장 많이 뭉개진 게 얼굴이라, 코가 삐뚤어져 숨소리가 길고 음울한 훌쩍거림처럼 들리고 이가 심하게 몰려있어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 학교에서 아무도 프래니와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지만 어느 날부터 아이를 배고, 어디로 옮겨지고, 다시 돌아와 또 아이를 배고, 또 어디론가 보내지고, 또 돌아와서 아이를 배고, 또 옮겨지는 생활을 반복해, 동네 라이온스 클럽의 비용으로 불임수술을 해주자는 의논이 오갈 즈음 돌연 폐렴에 걸려 한 많은 생을 접는 여자다. 마지막 작품 <넌 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서 정신박약 남자가 한 명 등장하기는 하지만 처음 두 작품 속 에피소드로 나오는 여성들만큼 임팩트가 강하지는 않다.
  이렇듯 열 개의 단편소설 또는 부chapter가 각기 한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 또는 두 개와 당시를 대표하는 갈등을, 처음부터 끝까지 섬세하게 그려놓아 한 여자의 일생을 파노라마처럼 펼친다. 당연히 작품 속에 작가의 모습이 어느 정도는 담겨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작가의 이야기라고는 믿지 않는 것이 현명하리라. 어디까지나 작가는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거의 유일한 직업인이며 앨리스 먼로는 이 책 말고도 캐나다 시골 여자의 비슷한 한 생애를 그린 적이 있으니 말이다.
  단편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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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5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원복 옮김 / 민음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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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나오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대하고 있었고,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다. 이런 책을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명작’이란 호칭을 부여하고는 한다.
  그러나 독후감을 쓰기는 쉽지 않을 터. 서술이 방대하고 소설 안의 여러 에피소드들이 각기 긴밀하게 연결, 변화하여 선으로든지 악으로든지 특별한 행위로 전위, 확장되기 때문에 책을 정확하게 이해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하기는 뭐, 어떤 책이든지 독자는 정확하게 읽을 수도 없고 그렇게 읽을 필요도 없기는 하지만.
  책의 주인공 ‘아벨 티포주’는 보베 시에 있는 생크리스토프 중학교에서 가장 왜소한 체격과 비사교적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 제일 약한 아이들마저 지배하고 모욕할 수 있는 놀림감 신세의 소년시절을 보냈으나 약 20년이 지난 지금, 1938년부터 39년에는 당시 기준으로 무척 큰 키인 191cm에 110kg의 건장한 체격과 엄청난 힘을 가진, 파리 포르트데테른 광장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의 사장이다. 그러나 거의 서진書鎭만큼 두꺼운 안경을 써야 사물의 식별이 가능한 급성 근시와, 성기왜소증을 피할 수 없는 팔자이기도 하다.
  티포주가 스무 살 때, 키는 지금과 같은 191cm이었지만 몸무게는 68kg밖에 나가지 않아 지독한 근시와 더불어 징집대상으로 할 것인가를 군의관들이 오래 토의한 끝에 결국 사격을 할 필요가 없는 통신대로 배치를 시킨 적이 있을 정도였다. 군복무 후에 갑자기 엄청난 식욕을 감당할 수 없어 하루에 2kg의 날고기와 5 리터의 우유를 들이키기 시작해 지금의 덩치와 완력과 근육을 갖게 되었는데, 자신이 고기, 신선한 피와 살을 좋아하는 식인귀 스타일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됐을까?
  첫 번째 장 “아벨 티포주의 불길한 기록”은 1938년 초부터 39년 9월 3일까지 티포주가 왼 손으로 쓴 일기로, 위에서 말한 현재 시점과 20년 전 보베의 생크리스토프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교차하여 묘사하고 있다. 남자 기숙 중학교. 16세까지 다니고 이후 대입자격시험의 합격률을 올리기 위해 시험에 떨어질 것이 뻔한 학생들은 시험 전에 퇴학시키는 걸로 악명이 높은 이 학교 학창 시절의 아벨. 여성들은 모를 것 같다. 소년들만 모인 기숙학교라는 정글, 그것도 도망할 곳이 없는 폐쇄공간으로 이루어진 야만의 큐빅 공간.
  이 학교에 파리에서 전학생이 온다. 펠스네르. 튼튼한 체력과 우직한 성격을 가져, 학급의 특별한 서열로 단번에 올라간 건 당연하다. 당시에 문신이 유행했단다. 그래 아벨이 펠스네르에게 제의하기를 허벅지 안쪽 부드러운 살에 “이 생명을 당신에게 A toi pour la vie"라고 새겨주겠다고 해놓고 ”A T pour la vie"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내 생명을 A T에게” A T는 당연히 ‘아벨 티포주.’ 이후 아벨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어느 날, 놀이 도중에 페스네르가 무릎에 깊은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리는 상태가 됐고, 페스네르는 티포주를 지목해서 흐르는 피를 혀로 핥으라고 명령을 해 진흙이 묻은 종아리부터 혀를 내밀다가 결국 벌어진 발간 속살에서 흐르는 피를 핥기 위해 입술을 상처부위에 밀착시켰고, 조금 후 기절해버리고 만다. 왜 기절했을까. 아벨 자신도 몰랐다. 책을 500페이지 가까이 읽어야 아벨 티포주가 까무러친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책에서 벌이지는 많은 사건들이 특유의 연관성과 확장과 변위를 거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아벨 티포주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이 역시 같은 학교 동급생으로 학교 수위의 외동아들. 괴물 같고, 천재적이고, 환상적인 상상력에 비만증에 걸린 엄청난 뚱보로 거의 무제한 적 완력과 힘을 가진 인물인 네스토르. 학생은 물론이고 교사들까지 네스토르가 뿜어내는 아우라에 이의제기를 하기가 쉽지 않은 압도하는 분위기. 네스토르가 아벨 티포주에게 접근해 ‘나의 아벨’이란 뜻인 ‘마벨’이라고 호칭하기 시작하면서 학교 내 아벨의 위상은 높아지고 아무도 아벨을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네스토르의 진가는 기호와 기호해석에 있다. 나중에야 기호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 절대적 독재 권력자의 중대 관심사인 것을 아벨이 알게 되기는 하지만. 네스토르로 인하여 아벨은 왼손 손 글씨를 익히게 되고 문제의 “불길한 기록”을 남길 수 있게 된다. 아벨의 거대한 덩치와 완력과 급성근시와 성기왜소증도 네스토르로부터 전위된 것으로 인식하게 되고. 당연히 네스토르와의 연결끈도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생크리스토프. 크리스토프라는 성인은 강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는데 하루는 이이 앞에 예수라는 어린이가 나타나 자신이 예수이며 무동을 태우고 강을 건너달라고 했단다. 그래 크리스토프는 예수라고 주장하는 어린이를 어깨에 올리고 강을 가로지르기 시작하는데 어린이의 무게가 갈수록 마치 태산을 짊어진 것 같았다고 한다. 죽을힘을 다해 강은 건네주니 예수가 하는 말이 지팡이를 땅에 꽂아 내일 꽃이 피면 내가 예수임을 알 것이다, 했고, 다음날 정말 땅에 꽂아놓은 지팡이에서 꽃이 피어 있어 어제의 어린아이가 예수임을 알았다는 성인聖人 우화.
  아벨 티포주는 생긴 것이야 누백 년 동안 이탄층의 옷을 입고 이탄층에서 살며 아이를 망토에 숨겨 유괴하는 마왕의 모습일지언정, 약한 아이를 품에 안아 보살피면서 황홀감을 맛보는 종류의 인간이다. 물론 성격이 좀 이상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그리하여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나 누명을 뒤집어써서 중죄재판소에서 넘겨져 20년 이상의 노동교화형을 틀림없이 받을 찰라, 2차 세계대전을 앞둔 프랑스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1차 소집 대상인 아벨 티포주는 형벌 대신 입대하게 된다.
  이어서 소설은 본격적인 무대로 옮아가니 1939년부터 종전까지. 프랑스 군에 입대해 곧바로 포로가 되어 독일 북부, 예전의 동프로이센 지역의 수용소에 수감, 자연스럽게 독일과 독일군에 흡수되어 포로 신분으로 로민텐하이데 자연보호구역에서 일하다가 이후 열 살 이상의 소년병을 양성하는 군사교육기관인 나폴라에서 거대한 말을 타고 주변지역의 아이들을 수집하는 일을 하기까지 실로 다양한 사건과 인물들이 등장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자. 애초부터 제대로 스토리를 소개하기가 어려운 복잡다단한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으며, 이야기의 큰 줄거리보다는 세부적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이 훨씬 더 놀라운 작품이다.
  책의 광고문구에 “<양철북>과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전쟁소설”이라고 씌어있어 틀림없이 과장일 것이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광고문구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인의 시각에서 쓴 2차 세계대전 소설 가운데 이만한 작품을 읽어본 적이 별로 없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분명 명작. 거기다가 재미도 있다. 이 독후감을 보신 분들은 다음번에 읽을 책 목록에 올려보심이 어떤지 제안한다.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내가 돈 도로 돌려드린다. 물론 농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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