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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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니것, 1922년생 독일계 미국인인데, 초년 중년 말년 두루 걸쳐 당대를 함께 지내온 인류  치고는 그리 나쁘지 않은 사주를 받고 태어났다. 30년대 말에 대학에 진학해 생화학을 전공하다 성적도 좋지 않고 대학신문에 (전쟁 중에) 평화주의에 관한 글을 게재해 반강제로 학교를 때려치우고 입대, 유럽전선에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는 곧바로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 드레스덴 교외에 끌려가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까지 엘베강의 피렌체라 불리는 드레스덴에서 2만 5천 명을 희생시킨 고폭탄과 소이탄의 세례를 고스란히 경험한다. (보니것을 소개한 모든 책에선 13만 명의 희생자 운운하지만 2만 5천이 현재까지 공식적인 희생자 수다.) 이것을 기점으로 해, 모르긴 몰라도 이이가 평생을 걸쳐 지녀야 할 디스토피아의 미래, 파괴를 향한 인간본성, 지구멸망 같은 것들에 관한 비관적 세계관을 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거나 1940년대 초반까지 대학에 다녔고, 전쟁 중 정신적 내상은 다음으로 하고 어쨌든 신체적 부상도 입지 않았으며, 제대한 다음에 다시 복학과 포기를 한 후 10년가량 고생한 다음 작가로 유명세를 탔으니 인생이 이 정도면 장땡이지 뭘 더 바라나. 그러나 <제5 도살장>, <고양이 요람>, 단편집 《세상이 잠든 동안》에 이어 <갈라파고스>까지 읽어본 결과 드레스덴 폭격으로 인한 그의 정신적 내상이 상당히 깊은 것 같았다.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들 아시다시피 1835년 비글호를 타고 도착한 다윈에게 깊은 영감을 준 적도 위의 작은 화산섬들. 보니것의 의문은 갈라파고스 제도의 바다/육지 이구아나, 육지 거북, 핀치 새들이 어떻게 대륙에서 1,000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적도 상에 있으면서도 남극 한류가 흐르는 태평양을 건너 그곳에 살게 됐는지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생물체가 지구의 오지로 흘러갔다면 인간 역시 갈라파고스의 생물처럼 제도 가운데 한 섬에 정착해 독특한 과정으로 진화하지 말라는 법도 없으며, 소설의 무대인 1986년에 새로운 인류의 아담과 이브들이 오지에 고립되기 위해서는 극도로 발달한 인류문명이 이들을 찾아낼 생각을 하지 못해야 하니 반드시 이들을 제외한 인류는 멸망을 했어야 하리라.
  그러니까 조건은 둘이다. 소규모의 인류가 갈라파고스에 도착을 해서 다시 섬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 것. 인류가 멸망을 할 것. 커트 보니것이 이 두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시하는 것들이 대단히 이색적이었다. 이이가 63세에 출간한 소설. 갈라파고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한 나라 에콰도르에 속한 섬이다. 보니것은 1980년대 초중반을 휩쓸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외환위기, 이에 따른 가난한 에콰도르 시민들의 폭동과 약탈 때문에 갈라파고스 자연탐사를 위한 호텔과 호화 유람선이 약탈을 당해, 1831년 12월 27일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한 영국군함 비글호보다도 편의장치나 항해 보조기구도 없이 도망치듯 갈라파고스로 향했고, 도착해 엔진의 시동을 끄자마자 엔진은 그것으로 생명을 끝내는 것으로 만들었다. 레이건과 대처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제삼세계를 빈곤으로 몰아 빵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이들을 바다로 몰아낸 것.
  그러면 인류의 멸망은? 지금 마스크 쓴 채 독후감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더욱 쇼킹했다. 유명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생명체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박테리아들은 인간의 난소 안에 침입해 난소 안의 난자를 포식하기 시작해 전 세계로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이 박테리아가 침투하면 하루나 이틀 정도 가벼운 미열을 느끼고 소수의 사람들은 며칠간 시력이 좀 흐릿해지는 증상을 느낄 뿐이어서 감염자들은 자신이 감염되었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불임의 벽에 갇히게 됐다. 솔직히 말해 지금 지구상 인류가 60억. 이 가운데 남자는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고 똑똑하고 힘 세고 부랄 큰 수컷 인간 백 명만 남아 인구가 30억 100명으로 줄어도 인류의 유지에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난자를 포식한다면 인류는 한 세대 만에 끝장을 보게 된다. 어떠신가. 진짜 이런 바이러스가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참 놀라운 상상력이다.
  여기에 귀신같이 등장하는 인간 남자였던 화자가 있으니 이름을 ‘레온 트로츠키 트라우트’라고 한다. 1946년생으로 무뚝뚝한 아버지한테 반항하기 위하여 10대 시절에 가출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미 해병대에 입대하는 전통을 만들고 기꺼이 베트남 전쟁, 미국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이 끝도 없고, 보람도 없고, 몸서리처지고, 결국 무의미하기만 한 전쟁터로 보낸 젊은이들 가운데 한 명이 된다. 현지에서 수류탄을 던져 레온이 가장 좋아하는 동료와 가장 싫어하는 동료를 동시에 폭사시킨 노파를 집중 사격해 죽인 경험이 있다. 이이가 위로 휴가차 태국의 방콕에서 만난 스웨덴 의사의 주선으로 해병대를 탈영해 스웨덴으로 정치적 망명을 감행, 시민권을 따고 스웨덴 말을 배운다. 그래 거대한 도크를 현대조선에 단돈 일 달러에 팔아먹은 조선도시 말뫼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다가 갈라파고스 자연탐사 호화 유람선 바이아데다윈 호의 내부 용접을 하다 큰 사고를 당한 이야기꾼.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도 커트 보니것이 생각하고 있는 세계관과 반전의식은 짐작을 할 수 있을 터. 이 위에 보니것 특유의 엽기발랄한 상상력과 입담과 사건의 무거움이나 심각함, 생과 사를 가르는 벼랑 위의 다툼과는 무관하게 툭툭 던져버리는 유머까지, 독자로 하여금 책에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든다.
  정확하게 책의 1 퍼센트만 말했다. 조금만 더 하자.
  인류가 멸망할 예정이고, 화산재가 아직 비옥한 토지로 변화하지 못한 황무지, 갈라파고스 제도의 산타로살리오 섬에서 인류가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가장 필요했던 등장인물은 누구일까. 스포일러가 아닌지 생각해봤다. 아니라고 본다. 작가도 이에 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니. 에콰도르 시민의 약탈을 피해 갈라파고스로 도망하는 무리 안에는 정말로 우연히 거의 원시야만인 수준인 여섯 명의 인디오 소녀들이 탑승한다. 현대문명에 노출된 도시인만 오지에 떨어졌다면 과연 아무 도구도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여섯 명의 킨카보노 족 소녀들이 작가도 생각하지 못한 절묘한 배치였다고 생각한다. 이에 관한 인류학을 공부한 분의 의견을 한 번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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