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시집 범우문고 312
이육사 지음 / 범우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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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이원록의 시집. 살아생전 그가 쓴 시 서른여섯 편 모두와 남은 여백에 산문 열세 편을 합해 한 권의 문고판을 만들었다. 육사 이원록은 시인이기 앞서 독립운동가. 열일곱 살에 안일양과 결혼을 한다. 안일양은 후에 육사와 함께 조선군관학교를 1기 졸업하는 안병철의 손아래 누이다. 육사가 매우 건강체질이라 나이 마흔에 베이징에서 옥사하기 전까지 병원 신세 한 번을 지지 않았을 정도였단다. 그러나 안병철은 일경에 체포당해 고문 끝에 동지의 이름을 자백하고 만다. 육사가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장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 더러운 피를 물려받은 처 안일양하고는 더 살지 못하겠다고 한 다음에 실제로 집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 한다. 이때 육사의 부모가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며느리 안일양을 각별하게 다독여주고 육사를 엄하게 타일러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니 가히 대쪽이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편협하달 수도 있겠고. 세상에 고문을 당하고도 자백하지 않을 인간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런 독종 혹은 영웅은 흔한 게 아니니 이해해줄 법한데 말이다.
  스물두 살 때 육사는 형 원기, 아우 원일과 함께 의열단에 입단한 바 있다. 이어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과 연관되어 두 해 반 동안 투옥, 대구 격문사건으로 6개월 투옥, 이후에 곧바로 만주에 가 독립군 자금 모금을 논의하고(이때 외아들 동윤이 홍역으로 생을 마감한다.) 조선군관학교에 입교, 졸업한다. 그러나 곧바로 1934년에 일경에 피검되고 풀려난 뒤 1943년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다시 체포될 때까지 일경의 요시찰 대상으로 피신과 가택수색 등의 역경을 거치게 된다. 이후 베이징으로 이송되어 다음 해인 44년 1월에 옥사했으니 인생 자체가 독립운동사였다고 해도 무리가 아닌 인물이다. 생전에 아들 하나와 아래로 딸 둘을 두었으나, 아들과 큰딸은 홍역으로 일찍 여위고 둘째 딸은 지금 80세로 안동에 있는 육사의 집터에서 일본어 통역 일을 하고 있다. 이이의 백일 자리에서 육사는 하나 남은 딸에게 윤택하게 살지 말라는 뜻으로 옥비沃非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합방이 없었더라면 육사는? 내가 보기엔 낭만주의자가 됐으리라. 그의 가슴 속에 숨었다가 기어이 서른이 넘어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쓰기 시작하는 시. 그것도 겨우 십년 남짓 세월 동안 도피와 운동과 노동 속에서 한시 세 수를 포함해 서른여섯 편의 시를 남긴다. 시를 품은 마음은 어떤 환경에서도 기어이 시를 쓰게 만드나보다.
  육사, 하면 당연히 이 시다. <청포도>.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절이주절이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해두렴  (전문)



  육사 역시 이 시를 제일 좋아했다면서 자신이 이 시를 썼다는 것이 기적이란 얘기까지 했단다. 이 시의 ‘내 고장’은 조선을, 청포도는 조선인들을 상징한다고 말했다는데 독자가 굳이 시인의 뜻을 좇아 시를 감상할 필요는 없다. 육사의 말대로라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당연히 민족의 해방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의 사미인곡에서 미인을 임금이 아니라 진짜 마음속 연인으로 생각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이듯 ‘내가 바라는 손님’이나 ‘주절이주절이 열린 전설’을 독자마다 다른 대상과 이야기로 치환해도 이제는 무방하다. 이 시, <청포도>를 더 이상 해방을 위한 염원으로 읽지 않아도 너무 충분하게 아름답지 아니한가. 분명히 얘기할 것은, 그렇다고 시인이 자신의 운동을 이리도 서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폄훼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는 점.
  그의 낭만성은 시집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실린 <해후邂逅>의 마지막 부분을 인용해보자.



  지금 놀이 나려 선창船窓이 고향의 하늘보다 둥글거늘 검은 망토를 두르기는 지나간 세기의 상장喪章같애 슬프지 않은가


  차라리 그 고은 손에 흰 수건을 날리렴 허무의 분수령分水嶺에 앞날의 기旗발을 걸고 나와 나와는 또 흐르자 부끄럽게 흐르자 (부분. 9, 10)



  두 번째 실린 시 <강건너 간 노래>에서도


  사막은 끝없이 푸른 하늘이 덮여 / 눈물먹은 별들이 조상오는 밤 // 밤은 옛ㅅ일을 무지개보다 곱게 짜내나니 / 한가락 여기두고 또 한가락 어데멘가 / 내가 부른 노래는 그 밤에 강건너 갔소 (부분 4,5)


  라고 노래한다. 이런 낭만시인이 세 번째 시 <광야>에 오면 갑자기 돌변, 이렇게 외치고 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부분 5)


  전혀 이상하지 않다. 육사 이원록은 독립투사였던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의 정체성엔 혁명가와 낭만주의자 DNA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가 북국의 추위가 몰아치는 베이징의 감옥 속에서 순사할 때까지 결코 혁명가와 낭만성을 혼동하는 일은 없었으리. 그리하여 내 의식 속에서 육사는 더욱 찬연하게 빛나는 투사요 시인이다. 20여 년 전 아이들에게 내가 골라 사준 몇 권 안 되는 위인전 속에 육사가 있었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미娥眉  - 구름의 백작부인 -



  향수鄕愁에 철나면 눈섶이 기난이요
  바다랑 바람이랑 그 사이 태여났고
  나라마다 어진 풍속에 자랐겠죠


  짓푸른 깁장을 나서면 그 몸매
  하이얀 깃옷은 휘둘러 눈부시고
  정녕 왈츠라도 추실란가봐요


  해ㅅ살같이 펼쳐진 부채는 감춰도
  도톰한 손결 교소驕笑를 가루어서
  공주의 홀笏보다 깨끗이 떨리요


  언제나 모듬에 지쳐서 돌아오면
  꽃다발 향기조차 기억만 새로워라
  찬젓때 소리에다 옷끈을 흘려보내고


  초ㅅ불처럼 타오르는 가슴속 사념思念은
  진정 누구를 애끼시는 속죄贖罪라오
  발아래 가득히 황혼이 나우치리오


  달빛은 서늘한 원주圓柱아래 듭시면
  장미薔薇쪄 이고 장미쪄 흩으시고
  아련히 가시는 곳 그 어딘가 보이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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