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노이즈
돈 드릴로 지음, 강미숙 옮김 / 창비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블랙스미스란 이름의 소도시가 미국에 있(었)다고 치고, 배비트와 잭 글래드니 부부가 거기서 살았고, 둘 다 초혼이 아니라서 (잭은 심지어 다섯 번째 결혼이기도 하다)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네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이게 다가 아니라, 소설책에 그냥 잠깐 얼굴만 비치는 딸이 하나 더, 이름만 등장하는 다 큰 딸도 하나 더 있어서 하여간 최소 여섯 명의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을 중심으로, 복잡한 소설을 만들어 놨다. 주로 등장하는 네 자식들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제일 나이 많이 먹은 아이가 하인리히(14). 이제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들었으나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보다 생애 처음으로 부모가 하도 열등해서 하찮게 보이는 시점을 맞이하여, 이젠 부모의 말을 자신이 알고 있는 최신의 과학적, 기술적 필터를 거쳐 접수하는 바람에 사사건건 또박또박 말대답을 올려 부치는 머리 좋은 (잭의) 아들. 드니스(11)가 둘째로, 아주 집요한 성격으로 친엄마 배비트가 요새 건망증이 부쩍 심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왜 갑작스런 건망증이 시작되었는지 탐색하다 의붓 아빠와 힘을 합쳐 급기야 원인을 밝혀내는데 성공한 딸. 셋째는 다시 잭의 딸로 원래 이름인 스테파니를 “얘, 스테파니야!”라고 부르면 오지게 열을 받는 관계로 ‘스태피’(9)라 칭하는데 요새 왜 자기 역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방이 나오지 않는지 잔뜩 불만에 차 있어, 하루에도 댓 번씩 젖멍울이 섰는지 아닌지 거울에 비쳐보는 걸 드니스가 발견했고 드니스는 그걸 엄마한테, 엄마는 다시 아빠한테 정보를 제공하는 바람에 가족 거의 전부가 알고 있다는 걸 스태피 혼자 모르고 있다. 막내둥이 와일더는 이제 서너 살 정도의 유아지만 겨우 스무 단어 정도로만 의사소통을 하는 귀염둥이로 친엄마 배비트의 삶에 가장 의지가 되는 꼬맹이. 그래도 무시하지 마시라, 세발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호연지기를 품고 있는 미국의 희망이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소도시 미국의 평균가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아빠 또는 의붓 아빠 잭의 직업은 대학교수. 그것도 학과장이다. 무슨 학과냐 하면, 놀라지 마시라, “히틀러 학과.” 미국 대학과 학문의 틈새시장을 적절하고 기묘하게 파고들어 미국 최초로 “히틀러 학과”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고 스스로 학과장 자리를 꿰찬 미국 판 김 선달. 잭에게도 세 가지의 고민이 있으니 첫째가 자신의 애독서이자 먹고 살기 위한 필독서인 <나의 투쟁>을 독일어 원본으로는 읽어보지 못했다는 거. 즉 독일어를 하나도 모른다는 것. 불과 몇 달 후 전 세계에서 몰려온 히틀러 전공자를 모아놓고 3일간 학회가 열릴 예정인데 미국 최고의 히틀러 전공 교수인 자신이 정작 독일 말을 하나도 모른다면 말이 돼? 그리하여 새로이 그리고 비밀리에 독일어를 배우고 있는 것. 둘째는 집에서 눈으로 보이는 거리의 고속도로 위에서 어느 날 산업 폐기물을 잔뜩 싣고 가던 트럭이 전복되는 바람에 살충제 폐기물인 극강의 유독물질 나이어딘 D를 기체 상태로 흡입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피소에서 컴퓨터로 조회해보니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데이터가 나오는 바람에 죽음에 대한 극한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마지막 세 번째는 아내 베비트 역시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다가 공포 방지의 묘약이자 신약으로 인체실험 중인 다일러를 구하기 위해 미스터 그레이와 몇 주에 걸쳐 시외 지저분한 모텔에서 대낮에 관계를 맺었다는 고백을 들은 일이다. 이 세 가지만 아니라면 미국 중소도시의 약간 상위 중산층의 전형으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지녔겠지만 세상살이가 마음먹은 대로 되면 그건 삶도 아니고, 하다못해 소설도 아니다.
 위에서 말한 잭의 세 가지 고민은 전적으로 본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작가 드릴로는 여기에서 국한하지 않고 거의 모든 현대인의 삶에 깊숙이 개입한 테크놀로지와 화학적 또는 과학적 삶의 분석(인간의 사고와 생각이란 건 대뇌피질 속의 뉴런 간 화학적 조합에 불과할 뿐이닷!), 개인성의 데이터 화(01001110010011110101010 같은 이진법의 세계정복), TV와 영화에 의한 인간의식의 획일화 및 감각적(포르노 적) 통일성, 넘쳐흐르는 상품과 상표의 홍수 속에 선택만 강요당하는 20세기 말의 군상, 최대의 행복을 위한 산업발전의 이면에 감춰진 환경오염 문제까지 정말로 거대한 담론을 잭의 세 가지 고민 속에 다 용해시켜 놓았다. 여기에 유년기를 벗어난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문제까지 섞이면, 과연 드릴로, 이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구글 검색해봤더니 이렇게 생긴 양반이다. 

 

 

 

 이 해골 같이 생긴 아저씨에 대해 창비는 “1936년 이딸리아 이민 2세로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나고 (……) 토머스 핀천과 더불어 포스트모던 소설의 양대 축을 형성한다는 평가를 받고”있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 이 책 <화이트 노이즈> 역시 지극히 포스트모던한 작품으로 읽어야 하며, 내 경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토머스 핀천의 작업보다 훨씬 친숙하게 읽을 수 있어서 (가장 최근에 읽은 토머스 핀천이 한 달 반 전 <바인랜드>였으나, 읽은 당시엔 감명까진 아니어도 재미있다고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뭔 내용이었는지 거의 잊었다) 당장 이 해골 아저씨의 다른 책을 검색해서 일단 보관함에 넣어 놓았다. 진짜다. 한 번 읽어보시라. 재미난 책이다.
 오늘, 책의 극히 일부만 소개했을 뿐이다. 얼마나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는지는 직접 보시라는 뜻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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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0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저도 돈 드릴로를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18-01-09 13:41   좋아요 0 | URL
문제가.... 독자평이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점인데 말씀이죠.
하여간 전 재미있어서 다른 작품 찜해 놓았습니다. 올해 안에 읽을 거예요. ㅎㅎ

레삭매냐 2018-01-09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아도 돈 드릴로의 책들을 하나둘씩
사모으고 있던 차에 <화이트 노이즈> 잘 감상
했습니다.

아니 다른 것도 아니고 히틀러 학과라니요...
역시 대단한 발상이 아닐 수 없네요.

돈 드릴로는 이 책부터 읽어야지 싶네요.
<바인랜드>는 사서 잘 모셔 두고 있습니다만.

Falstaff 2018-01-09 14:28   좋아요 0 | URL
소설 하나에 하도 많은 이야기를 해서 그 속에 빠지는 느낌이 들 정도더군요.
하여간 말빨 하나는 정말 죽여줍니다. ^^

AgalmA 2018-01-09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리뷰 <작가란 무엇인가> 돈 드릴로 인터뷰 작품만큼이나 역시 좋았어요^^b

Falstaff 2018-01-10 09:24   좋아요 0 | URL
아, 그 책이요!
그렇군요. 기회가 닿으면 시도해봐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