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혹은 모호함 1 세계문학의 숲 44
허먼 멜빌 지음, 이용학 옮김 / 시공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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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으면서 먼저 번역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먼 멜빌. 특유의 잘난 척하는 만연체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라 이이를 번역할 때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을 영어를 공부한 사람들로부터 직간접적으로 무척 많이 들었다. 그럼 어떻게 멜빌의 글을 한국의 독자에게 한글로 들려줄 것인가. 한국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원문의 글을 조금 훼손시키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보다 원문 또는 원문의 뉘앙스에 충실하기 위해 직역 수준의 한국어로 바꿀 것인가. 바람직하지 않은 번역이라고 전에 침 튀었던 한 작품의 경우, 내가 입에 거품을 물고 개번역이라고 침을 튀니 독후감을 본 역자의 한 지인이 역자에게 연락하고, 역자가 읽어보니까 이거 뭐 개뿔도 모르는 것이 독후감이라고 공개된 장소에 글을 써놓아 선량한 독자들을 현혹하는지라, 답글을 달아 원래 해당 작가의 글이 현지인도 이해하기 힘든 기상천외한 은유를 많이 썼는데 (아주 정중한 글로 썼다. 내 표현이 워낙 날 것이라 분명히 번역한 사람은 독후감을 읽고 화가 많이 났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정중하게 답글을 달았다. 틀림없는 신사라고 생각한다) 그걸 한글로 옮기면서 방향을 원문을 그대로 전달하는데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설득하려 했다. 지금 검색해보니 그분의 답글은 그 사이에 삭제되고 말아 정확한 인용은 할 수 없었다.
 당시 문제의 작품을 썼던 작가보다 한 세기 앞서 활약한 허먼 멜빌. 그의 악명 높은 화려하고 긴 문장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난 번역에 관해서는 소비자다. 그리하여 역자의 판단에 따라, 한국의 독자가 쉽게 읽히게 할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원래 뜻을 조금이라도 더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직역을 할 것인지는, 직업으로 번역을 선택한 번역가의 철학에 완전히 일임한다.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에. 다만 부탁하건데, 전에 번역문에 관해 열을 냈던 작품에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로 번역한 우리 문장을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내가 읽으면서 읽기를 마치는 순간 직빵으로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게만 만들어달라는 거다. 이거 어려워? 하긴, 육군 대령 출신의 아버지가 아들 둘을 때려잡는데, 이렇게 얘기했다나? “내가 너희한테 뭘 많이 바라는 거 아냐. 딱 세 가지야, 세 가지. 근데 그걸 못해주는 거냐? 착하고, 건강하고, 공부 잘하고. 간단하잖아. 겨우 이거 들어주는 게 그렇게 힘드냐?” 엎어져서 빠따를 맞는 형제는 “아버지, 그중 하나라도 잘 하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슈?” 속으로 이렇게 얘기했다나. 겨우 독자밖에 안되면서 너무 과한 걸 바라는지는 모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한글 문장을 좀 알기 쉽게 써달라는 부탁’이란 말로 요약하면 되겠다.
 이 책의 역자 이용학은 서울대와 단국대에서 멜빌을 공부해 박사를 했단다. 자기 전공을 번역하는 일. 그럼 처음부터 이 사람은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초점을 맞추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아니나 달라, 딱 그랬다. 그리하여 19세기 초반 미국의 상류사회에서 쓰던 말버릇을 그대로 직역을 한다. 아이고, 돌아가신다. 문제는 긴 문장을 쓰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긴 문장, 그것도 은유를 비롯한 무수한 수사를 포함한 문장을 이국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거 같다는 점. 나야 그런 일을 안 해봤으니 모르지만. 두 권 합해서 약 79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 직역에 따른 어색한 문장이 와장창, 눈 많이 내린 아침에 굵은 소나무 둥치를 발로 걷어찬 것처럼 우수수 쏟아져 처음 100 쪽 지나가기 전까지는 참 적응이 되지 않더라. 거기다가 아까 한 얘기, 한국말로 쓴 한국어 문장도 왜 그렇게 알아듣지 못하겠는지 한 번 예를 들어보자.


 “천사가 축원을 하며 내려다본다고 청년은 생각했다. ‘내 그대에게 그대의 그 무수한 아침 인사들을 돌려주겠어. 루시, 그대가 하룻밤을 무사히 넘길지도 생각 못했는데, 세상에 무한한 낮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니!’
 ‘저런, 이봐요, 피에르, 어째서 당신네 청년들은 사랑할 때는 늘 혼언장담을 하는 거예요?’” (1권 11쪽)


 먼저 “혼언장담”은 내 오타가 아니라 정말 책에 그렇게 써 있다는 점을 밝히고, 지금부터 질문. 청년 피에르가 도대체 무슨 뜻의 이야기를 했기에 루시가 당신네 청년들은 사랑할 때 호언장담을 한다고 했을까요? 답? 모르니까 묻지 설마 내가 아는데도 물어볼까.


 “그 미망인은 중용 문화의 섬세한 지성을 겸비하고, 어떠한 위로할 길 없는 슬픔으로도 속 썩지 않고 비참한 근심 걱정들로 심신이 결코 지치는 법이 없는 때에, 변동 없는 계급, 건강, 부유함이 갖는 늙지 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힘의 두드러진 본보기라 할 수 있는 여인이었다.” (1권 12쪽)


 뭐 내용은 알겠다. 한 과부가 있는데 지성도 있고, 심리적으로 건강하고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은데다가, 재수 없이, 거기다가 또 아름답기도 하다는 거 아냐. 이건 틀림없이 원문의 훼손을 극히 작게 하느라 그냥 직역을 감행한 한국어 문장일 것이다.


 “피에르는 이런 식으로 자주, 연인의 부드러운 인연을 맺게 되기 전에 누이를 갖게 해달라고 하늘에 축원하곤 했다. 하지만 남자가 간절히 빌며 반대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청년시절의 진심에서 우러나는 몇몇 기도들에 응답해주는 것임을 그때 피에르는 몰랐었다.” (1권 18쪽)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미리 암시하는 복선이 되는 문장으로 대단히 중요한 대목인데, 첫 문장은 그런대로 이해가 간다 해도 두 번째 문장은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다. 볼까? ‘남자가 간절히 빌며 반대할 만한 것’이 도대체 뭐야? 그게 ‘누이를 갖게 해달라고 하늘에 축원’하는 일이라면 그래도 수긍할 수 있을 텐데 그것도 아닌 거 같고.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대목을 찾아보면 두 번째 문장에서 ‘남자’를 하느님 또는 신, 아니면 셔먼 등등 간절히 빌 대상이 되어 청년이 진심에서 우러나 기도하지 말라고 반대한다는 뜻이면 맞겠다, 그러니까, 이건 책의 내용과 완전히 반대되는 해석이라고 결론을 낼 수밖에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예를 더 들라고? 관두자. 요약하면, 요새 번호 먹이는 거에 맛들인 거 아시겠지, ① 번역한 ‘한국말’을 이해하는데 독자가 허벌나게 고생하며, ② 역자의 영역을 건드리는 거 같아 안됐지만 과한 직역에 의해 읽어내기가 난감한 경우,가 과하게 보인다는 걸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①번 사항은 100 쪽 넘어가면 이제 어느 정도 면역이 돼서 그냥 그런가보다 넘어가는 수준, 전적으로 독자가 짧은 시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경우엔 이후 별 무리가 없긴 하다. 하지만 아주 오래 있다가 난데없이 이런 문장 등장하면 좀 곤란을 겪는다.


 “어떤 정해진 형태의 숭고하고 순수한 전형적 신념을 받아들인 것에 대한 모든 본질적인, 하이에나 같은 반발력들 중에서, 사회 일반의 인습적인 허풍들에 넌더리나서, 그들의 자유롭지 못한 현세의 인간 속성으로 불완전하게 인식되었지만 신성한 어떤 이상들, 즉 그 자체가 불완전하게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길은, 어떤 두 사람의 마음도 완전히 그것에 합의하지 못할 만큼 따라갈 수 없는 이상들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본질적으로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염원들을 흔히 나타내는, 저 피할 수 없는 괴팍한 바보스러움만큼, 그 회의주의적 경향에 있어서 그렇게 강력한 것은 없다.” (2권 260쪽)


 주어가 뭐야? ‘강력한 것’. 술어는, ‘없다’. 좋아. 그럼 이 한 문장이 주장하는 바는? 이거 그대로 옮겨 쓰는 일도 쉽지 않았다. 문장의 뜻을 모르고 옮겨 적는 것이 쉬운 줄 아셔? 정말이다. 이쯤 되면 이거 비문 아냐? 멜빌을 연구해서 박사 받았고 더구나 이 책을 직접 번역한 이용학은 이 문장이 뭘 주장하는지 알고 있을까? 독후감의 앞에서 예를 든 전에 읽은, 비문이 수두룩한 소설을 번역한 점잖은 사람이 내게 그랬다. 내가 시비건 문장이 자기 원고에 없는데 이상하다고. 근데 그게 자랑은 아닐 거 같다. 자기 이름 달고 나오는 책, 원고 던져주면 그걸로 끝이야? 책임은 출판사에 있다고? 이용학은 뭐라고 얘기할까 궁금하다. 두 사람 모두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에서 나온 미국문학 분야인 것도. 한 번 수상하게 보니까 끝도 없다.


 이 책. 젊음의 대책 없는 실수. 인생을 걸고 한 한 번의 거짓말이 어떻게 인간을 돌이킬 수 없게 하는지를 쓴 19세기적 세밀화. 거기에 신화적 근친상간의 요소가 살짝 가미된 가공품. 굳이 읽을 필요 없음. 다른 세계문학 시리즈와 비교해 오탈자 겁나 많지만 그래도 집중하지 못하게 할 수준은 아님. 혹시 읽어보겠다고 주장하시면 역시 말릴 의사는 없음. 다 읽고 판결은 엄연히 당신의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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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10-11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아- 이 책 언젠가 읽어보려고 적어두었는데.... 말씀하신 문장들을 보니 도저히 읽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호언장담합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17-10-11 12:40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하시리라 ˝혼언장담˝ 했었는데요. ㅋㅋㅋㅋ

qualia 2017-10-11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네요. 번역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줍니다.

Falstaff 2017-10-11 12:41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마울 뿐입니다.
근데 저처럼 좀 까다로운 독자가 있어야 번역의 품질도 올라가지 않겠어요?
ㅎㅎㅎ 물론 자뻑입니다만.

sprenown 2017-10-11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 시원합니다. 우리 번역계의 수준이 좀 더 올라가야겠죠..사실 우리 독자가 주인입니다. 할말 잘 하신겁니다.

Falstaff 2017-10-11 15: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근데 뒤가 좀 캥기기는 하는군요. 몇번 태클당한 경험이 있어서리... ㅎㅎ

sprenown 2017-10-11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판하고 논쟁하면서 발전하는것 아니겠습니까? 잘못에 대해 반성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