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등 쏜살 문고
패트릭 해밀턴 지음, 민지현 옮김 / 민음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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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패트릭 해밀턴은 작가이자 수습 변호사 아버지와 그의 두번째 아내, ‘올리비아 로이’라는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엘렌 아델 호클리와의 사이에서 1904년에 태어났다. 전형적인 중산층 속물계층인 부모. 아버지 월터 버나드는 자신이 위대한 작가라고 떠들고 다녔지만 잘 봐줘도 평범한 작품을 몇 개 만들어냈으면서도 스코틀랜드 왕위의 적정 상속자라고 평생을 술 마시고 꼬장부리다가 갔다. 속물이기는 마찬가지였던 엄마도 콧대가 하늘을 찔러 하인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식들은 최상류사회의 일원으로 키우려 했으나,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 덕분에 가산을 좋은 술 마시는 데 탕진하여, 열다섯 살의 패트릭을 웨스트민스터에서 퇴학시키는 것으로 사실상 집구석은 문을 닫았다고 봐도 좋겠다.

  패트릭 해밀턴은 이 시기, 열다섯 살 때부터 시와 산문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누이동생 랄라도 ‘다이애나 해밀턴’이라는 예명으로 무대에 서기 시작했다고.

  위키피디아는 이이의 작품 성향을 “전간기 런던의 거리문화를 디킨스적 방식으로 보고 있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과 신랄한 블랙유머”를 그린다고 소개했는데, 오늘 소개하는 두 편의 희곡이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인 <가스등>과 <로프>와는 좀 먼 평가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다.


  패트릭 해밀턴은 작품 가운데 <가스등>이 영국과 미국에서 각기 다른 감독에 의하여 영화로 만들어 졌는데, 이 중에서 1944년에 미국의 조지 큐커 감독이 잉그리드 버그만과 샤를 부아이에를 캐스팅해 제작한 흑백영화가 널리 알려져 있고 나도 이 영화를 보았다. 하도 오래 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여튼 허연 달덩이 같은 얼굴의 키와 덩치가 가히 발할의 브륀힐트 급인 잉그리드 버그만이, 그녀의 어깨 정도까지 올 정도로 그냥 보통 체격인 남자 샤를 보아이에의 가스라이팅에 하릴없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이 좀 어색했던 게 기억나지만, 너무 오래됐다, 그동안 쌓인 두 명배우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세월을 거치면서 왜곡되었는 지도 모른다. 샤를 부아이에가 보통 배우인가, <가스등> 말고도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다>와 <애련> 등에서도 명연을 보여준 옛 시절의 명배우.

근데 샤를 부아이예와 함께 등장하는 파트너, 소심한 캐릭터를 소화하기엔 피지컬이 너무 좋은 잉그리드 버그만. 그래도 당시 영화 전문가들이 보기엔 이 커플이 괜찮은 조합으로 보였나 보다. 훗날 <개선문>에서도 라비크와 조앙 마두 역으로 다시 한 번 은막 위에 모습을 비치는 것을 보니까. 아휴, (배우로서의 자질을 말하는 ‘체급’이 아니라 신체적)체격이 덜 맞는 이유로, ‘안 맞는다’고 하면 눈이 삐었다고 할 분도 계실 것 같아서 그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걸 꼭 밝혀야겠다.

  하여간 버그만이 이 영화 찍고 10여 년 있다가 율 브리너의 파트너로 <아나스타샤>를 찍었을 때도 율 브리너의 박박 대가리가 어깨 근처에 오니까 열을 받은 브리너가 버그만한테 무참하게 댁댁거렸다는 건 유명하다. “난 절대 계단 위에 올라서 연기하지 않을 거요!”

  사실 잉그리드 버그만이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처럼 상대 배역이 적어도 게리 쿠퍼 정도 되어야 비로소 어울리는 커플이랄 수 있지 않을까? 다른 거 말고 비주얼 상으로는.


  예전에 영화 한 편, 그것도 더빙한 “명화극장”을 보고 몇 십 년만에 원작인 희곡 <가스등>을 읽는다. 우리나라 서점에서 작가 패트릭 해밀턴을 검색하면 이 책 한 권만 뜨는 걸로 보아 우리나라 초역일 거 같은다(아닐 수도 있다). 읽어보니 이런 수준의 작품이건만 왜 이리 더디게 번역을 했을까? 잘 안 팔리는 희곡 장르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말로만 가스등이지 사실 몇 년 전부터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이후에 비로소 영화 <가스등>도 새롭게 알려져 이제 나온 것일 수도 있겠다. 그저 이렇게 짐작해본다는 말이다.

  이제 원작을 읽으니 과연 두 주인공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물론 중요하지는 않지만 이게 궁금했던 것도 뭐 이해는 하시겠지?

  남주 잭 매닝엄은 키가 크고 외모가 준수한 45세 정도의 남자. 잘 차려입고 지나치게 말끔하다. 살면서 아내 벨라를 쉼없이 가스라이팅 해왔으니까 당연히 무지하게 권위적이고, 자기보다 아래쪽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권위적이라기보다 위압적이라고 하는 편에 가깝다. 이게 다 이유가 있다. 원래 출신이 범죄자. 그것도 희대의 보석, 19세기말 기준으로 1만5천 파운드 이상 나가는, 아홉개의 ‘발로 루비’로 장식한 브로치를 강탈하기 위하여 앨리스 발로라는 이름의 노부인 집에 잠입했다.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마부들의 곤궁한 삶을 지원하는 데 열심이었던 노부인을 초저녁에 칼로 찔러 무참하게 살해하고, 낭자하게 피를 흘리며 죽어 넘어진 노부인을 무시한 채 밤새도록 집안을 뒤졌지만 애초 목표로 했던 발로 루비 아홉 개가 박힌 브로치를 찾지 못해 도망할 수 없었던 내력이 있다.

  이것이 15년 전의 일. 이후 10년 이상, 오스트레일리아에 살면서 현지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한 자신의 과업, 아홉 개의 발로 루비가 박힌 브로치, 이걸 어쩌나. 어쩌면 콧대 높은 범죄자의 자존심인 줄도 모른다. 그걸 손에 넣기 위하여, 15년 전부터 아직도 궁리하고 있는 것이 도대체 집 어디에다 숨겼을까, 하는 것이었다. 벽과 벽 사이의 공간을 만든 작은 손 금고가 있을까? 방이나 허술한 창고의 바닥 한 부분을 뜯어내면? 많고 많은 가구 가운데 어느 허술하게 보이는 가구의 저 깊고 깊은 속에 장치한 비밀 서랍일까? 그의 고민은 깊어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더 커진다. 그리하여 그동안 번 돈을 몽땅 가지고 혼자 본명 시드니 파워를 ‘잭 매니엄’으로 바꾸고 영국에 잠입한 상태.

  앨리스 발로 부인의 집을 사야 한다. 그래야 집을 홀랑 뒤져 보석을 찾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돈이 모자란다. 자기 돈으로는 발로 부인의 옆집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필요하다. 발로 부인 집을 사기 위하여 서른 두 살 먹은 과부인지 노처녀인지 하여간 돈 많고 미인인 벨라를 유혹해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 매닝엄은 벨라로 하여금 예전 앨리스 발로 부인의 집을 사게 하고, 신혼여행 이후 줄곧 그 집에서 거주하며, 아름다운 벨라한테 쉼없이 가스라이팅을 가해 이제 다 시들어버리게 만들어버렸다. 이 상태에서 막이 올라간다.


  예를 들어, 잭 매니엄이 벽에 걸려있기는 하나 관심있게 쳐다보는 사람 한 명 없는 초상화 한 점을 슬쩍 집어 내려, 아내 벨라가 물건을 자주 가져다 두는 특정한 장소에 슬쩍 두고, 벨라한테 묻는다.

  “어, 벽이 비었네. 당신이 초상화를 뗐군.”

  벨라는 자기가 안 그랬으니, 안 그랬다고 해야 할 밖에. “아닌뎁쇼?”

  그럼 매니엄은 집에 두 명 있는 하녀 하나하나 불러 네가 치웠니, 물어보고, 당연히 하녀들 역시, 아닌뎁쇼, 라는 대답이 나오면 성경에 키스를 함으로써 진실임을 담보하라고 압박한다. 뭐 꿇릴 것이 하나도 없는 하녀들이야 못할 일이 없다. 그래 성경의 양가죽 표지에 입술을 때고 쭉쭉 키스를 박는다.

  이후에 벨라한테, 그래도 당신이 안 그랬다고?

  벨라 역시 자기가 안 그런 것이 확실하니까 입술을 뾰죡하고 내밀고 자기도 하녀들의 침이 묻은 성경 양가죽 표지에 쭉쭉 키스를 할 밖에. 그러나, 여태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매니엄이 자기가 숨겨놓은 벨라의 장소에 가서 초상화를 가져오면, 벨라는 틀림없이 자기가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장소에서 초상화가 나왔으니, 자기가 잠깐 정신이 빠진 사이에 그런 짓을 했다고 믿게 된다. 물론 처음이었더라면 안 그랬겠지만, 이런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어야지.

  남편이 사준 결혼 반지, 예물 시계, 중고지만 어여쁜 브로치, 하다못해 어제 식료품 가게에서 가져온 영수증까지. 오늘도 영수증 좀 보자고 남편이 슬쩍 물어봤다. 분명히 책상 위에 던져 놓았는데 귀신이 곡을 하는지 그것도 없어져 버렸다. 그건 자기가 아니면 버릴 사람도 없는데, 점점 내가 미쳐가는 건 맞는 모양이다. 이런 것이 가스 라이팅. 전부 남편 매닝엄이 한 짓. 이렇게 아내를 미친 여자로 만들어 집에서 합법적으로 쫓아내 정신병원으로 보낸 다음이면 마음 놓고 집을 뒤져 문제의 보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이게 정말로 될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 하나. 15년 전 앨리스 발로 살인사건 당시 초짜 수사관으로 심증은 가지만 발언권이 별로 없어 본격적으로 수사하지 못했던 형사가, 이제 경위 정도의 계급이 되어 다시 이 집을 방문한다. 그래도 사건의 해결이라는 관점보다, 어떻게 특정인을 계속적인 강박으로 인해 비인간이 되게 만드는가를 관찰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재미있다.

  앱 북적북적에 별 넷 반 주었다. 두번째 작품 <로프> 역시 재미있지만 조금 번잡해서 반 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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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9-07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이 작품 정말 재미나던데... (영화보다 더) ㅋㅋㅋ 왜 이제야 이 희곡집으로 처음(?) 소개된 것일까 의아했어요.

Falstaff 2026-09-07 11:04   좋아요 0 | URL
희곡이 워낙 인기가 없어요. 현상문예 공모전에서도 희곡 상금이 단편 상금 절반 정도 되는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요. 희곡은, 심지어 우리나라 희곡도 라틴어로 쓰여 있다는 얘기도 있고, 뭐 그래서 그런가 봅니다.

얄리얄리 2026-09-07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스등‘..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영화네요.

Falstaff 2026-09-07 11:05   좋아요 0 | URL
넵. 제가 부아이에를 좋아합니다. 추억 돋는 배웁니다. ㅎㅎ

바람돌이 2026-09-07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맞다 이거 잠자냥님이 예전에 쓴 글 보고 읽고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또... 이건 꼭 읽으라는 얘기죠. ㅎㅎ

Falstaff 2026-09-07 17:34   좋아요 0 | URL
제가 뭐라고 읽어보시라, 마시라... ㅋㅋㅋ 저야 예전 영화의 추억이 특별해서 말입죠. 즐겁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