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시인선 224
유수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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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달 전에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고 어머나, 어머나, 요즘 세상에 우리나라에 남자 소설가도 있네, 했다가 찐따 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엔 유수연이 여자인 줄 알았다가 시집 읽기 전에 먼저 구글 검색해보고 남자 시인인 걸 알아 다시 한번 찐따 되는 불상사를 겨우 막았다. 요즘엔 이름에도 젠더가 없나? 글쎄, 영희가 남자고, 철수가 여자래. 남자 영희? 흠모해 마지않았던 고 리영희 선생은 알지만 여자 철수는 아직 못 봤다. 하여간 남자 수연, 유수연은 1994년에 춘천에서 태어나 안양예고와 명지대에서 시를 공부하고, 성균관대학 대학원 경영학 석사 졸업했다는데 MBA를 말하는 건가? 진로에 고민 많았겠다. 2017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면 생일이 지나지 않아 이이의 나이 스물둘. 춘천이 물이 좋아 오랜만에 20대 초반에 등단한 시인이 나왔나보다.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의 초판이 2024년 11월. 서른 살에 두번째 시집을 냈다. 시는 당연히 20대 후반에 쓴 것들이겠지. 시를 쓸까, MBA 딴 김에 회사를 경영할까? 회사를 경영하면서 시를 쓰면 된다. 암만해도 우리나라에서, 세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시 하나 쓰면서 먹고 살기엔 너무 팍팍하잖아.

  근데, 인제에서 나서 스무 살에 시집 가 춘천에서 70년 가까이 산 김여사 말에 의하면, 춘천이란 도시가 말만 그럴 듯하지 도시를 휘감고 흐르는 북한강과, 북한강물을 가둔 온갖 댐에서 날이면 날마다 짙은 안개가 밀려와 그런 모양인데, 도시 건설 이래 숱한 폐병쟁이를 양산한 것도 모자라 우울증 환자의 단위 인구별 밀도도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한다. 물론 이건 소양강댐을 지으면서 졸지에 고향을 잃은 실향민 신세로 떨어졌으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이 젊은 시절에 폐병이 도져 군대 징집 면제를 당한 김여사의 다분히 억하심정적 발언이라 그리 믿음직하지 않은 의견이지만 유수연의 시집을 읽는 도중에 왜 여사의 말이 문득 떠올랐을까?

  시집의 1부 소제목이 “네가 웃으니 내 세상이 위로가 돼”이다. 네가 웃어주어야 겨우 내 세상이 위로를 받는단다. 나 혼자 내 세상을 위로할 방법이 없는 시인. 스스로 위로하는 최선의 방법을 알려주노니, 자위를 해라, 자위를. 크리넥스 한 장이면 된다. 돈도 안 들잖아? 괜히 잘 살고 있는 ‘너’한테 실없이 웃으라 하지 말고. 하고 싶은데 자위도 안 되고, 너는 웃어주지 않고, 이러면 결국 남는 건 우울밖에 더 있겠어? 20대잖아, 20대. 지나고 보면 화려했던 거 같은데, 정작 20대 시절을 지내고 있는 이들은 환장하게 어려운 시절. 특별한 사정이 없는 20대라면 적어도 7할은 연애 또는 사랑 때문일 수도 있다. 눈에 확 들어온 건:



  형 물이잖아



  사주를 봐준다는 말이 좋다 내 미래를 예비해주는 것 같다 내 미래를 걱정해주는 말씨도 좋다


  태어난 날 미래가 정해진다는 건 미신 같지만 설명이 가능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해를 진심이라고 부른다


  나는 금이니 자기랑 잘 맞을 거라던 너는 이제 없지만


  네가 내 생일을 알아내기 위해 사주를 봐주겠다고 한 걸 나중에 알았을 때 내가 태어난 게 처음으로 좋았다 (전문, p.16)



  1부 소제목의 ‘너’가 나의 사주를 봐주겠다는 핑계로 생년월일을 알아냈다. 이런 ‘너’가 있는 게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좋게 만들었다면, ‘너’와 나는 보통 사이를 초월하는 건 분명하니, 연인이라고 봐도 좋다. 근데 ‘너’는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이 시, 은근한 커밍아웃인 것처럼 읽히기도. 어쨌거나 내가 태어난 걸 좋게 생각하게 해준 너는 이제 없다. 안타깝지만. 원래 그런 거야. 만난 사람은 언젠가 헤어지게 되어 있거든. 어려운 말로 하면 회자정리會者定離.

  그 후배는 금이고 나는 물이란다. 쇠와 물. 쇠, 금인 너는 나를 잘 떠났다. 함께 있어봤자 너는 나 때문에 녹이 슬어 시간이 지나면 나 부스러질 팔자이니. 하긴 그게 사랑이지. 내가 부스러질지언정 너에게만 기대 사는 거. 사랑, 징글징글한 거, 그거 맞아.



  습작


  꿈에서 보았다는 말은 진부하지만 꿈에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은 진부하지 않다 특별하지 않지만 사소하지도 않은 것은 잊혀질 수 없다 팔목에 꽂았던 링거 바늘 자국이, 몸에 박힌 연필심이 오래 머무는 것처럼 나도 몰랐던 내 몸의 어느 점과 같이, 당신이 말해주기 전까지 모를 그런 흔적으로 꿈은 계속 남아 있고 꿈을 앓다 내가 남아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은 꿈이고 베개는 베개이고 이 슬픔이 슬픔이 아닐 수 있다는 건 지난 내 시의 흔적이다 ‘우리 사랑을 내버려둔 채 사랑하도록 해요’라는 유서를 쓰고 그런 유서만 아니라면 죽을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유서를 쓰고만 산다 내게서 더는 다정한 마음을 찾지 말아달라고 고장난 바람이 날개 끝을 검게 물들이는 동안 여름은 가지 않고 새들이 계속 구름을 끌고 창 끝으로 사라졌다 닫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적는 동안 당신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가 되고 문득 오늘의 슬픔이 어느 날의 기적이 될 수 있기를 그러나 베개가 많이 젖었네, 많이 울었어? 아니, 아 그러면 젖은 머리로 잤구나 오늘은 말리고 자, 말해주던 너는 꿈에도 오지 않는다 눈을 뜨면 아무도 없는 건 모든 삶이 꿈에서 쫓겨난 탓으로 둔다 아무도 없지만 너는 종종 내 옆에 눕고 나는 계속 어떤 문장을 너처럼 안고 잠든다 (전문, p.17)



  위 시의 핵심 단어는 “슬픔.” 시인은 앞뒤 재지 않고 슬픔을 그냥 슬픔이라 발음해버리고 말았다. 슬픔은 끝내 유서와 죽음까지 이어지고, 북한강의 안개 같은 추억 또는 그냥 기억 속에서 치마 걷고 미친년 또는 물귀신처럼 서 있는 근화동 소양강처녀상像처럼 나타나, 울었어? 아니라고? 그럼 젖은 머리로 잤구나, 앞으로는 꼭 말리고 자렴, 하고 말해줄 지도 모른다.

  내 불만은 시에서 직접 슬픔, 눈물, 유서, 죽음이라는 구체적 명사가 등장하는 일. 그래서 언짢은 건 아니고 내 취향상 슬픔, 눈물, 유서, 죽음, 그리고 사랑, 희망 같은 건 노래 속에 포화상태가 되어 저절로 드러나야지 애초에 이리 발음해 나오는 걸 즐기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노여워하지 마시라.

  시인은 “외로움은 혼자 하기도 하고 / 둘이 각자의 외로움으로 슬퍼하기도 한다”거나 “하다 하다 돌까지 사랑하려 한다 /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 오래 사랑받아온 돌도 많다”더니 “돌에 하는 사랑을 둘이 못할 것 없었다” 하기도 한다. “슬픔이 바나나보다 빨리 익는다” “보기도 좋은 슬픔이 울기도 좋은 걸 누가 모르나” 누군가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는 건 행복하다” 등등 사랑, 슬픔이라는 단어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냥 막 출현한다. 다시 말하는데, 그런 게 내 마음에, 무수히 많은 독자 가운데 겨우 한 명에 불과한 내가 읽기에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리 마음 쓸 것도 없다. (인용한 시귀절 전부 시집에 나온다. 일일이 출처를 밝히지 않겠다.)



  서른



  삶을 밀려 쓴 것 같다


  답지가 아닌 타인을

  계속 들춰보고 싶다


  맞아, 삶엔 답이 없다

  알아, 그래도 있지 않을까


  깨지지 않는 것만으로

  더는 이해받을 수 없다


  그 온도에 물이 끓는단다

  그전에 멈추면 안 되는 거란다


  멈춰도 오래 따뜻할 수 있다


  뜨겁지 않은 체온으로

  사람을 데울 수 있다는 것


  서로가 서로를 안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삶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전문. P.76)



  시인한테도 시간은 능률능률 흘러 어느 새 서른살이 되었다. 그간 숱한 서른 살이 된 시인의 시를 읽었지만, 어떠셔? 좀 약하지? 서른 살이 뭐야? 세상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쥐뿔도 아는 것 없는 시절. 여차하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한 걸음 내딛는 듯한 갈팡질팡의 시기. 뭐 나 그리고 내가 읽은 서른 살 시인들이 모두 없이 살아서 이렇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멈춰도 따뜻할 수 있고, 삶은 그래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서른살을 보내는 시인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래도 서른살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은 온다”가 제일 멋있었어.

  따뜻할 수 있고, 문제가 되지 않는 삶, 서른살을 사는 시인도 21세기의 불안까지 떨쳐내지는 못하는군.



  원죄



  지갑을 떨군 사람에게 이거 떨어뜨렸다 말하니 자기 것이 아니라 말한다 자기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이 제 몸을 더듬어 지갑을 찾는 시간보다 짧다 그는 감사하다 말하고 사라졌다


  이거 당신 거 아닌가요

  누군가 쫓아온다


  아닌데요 아니에요 제 것이 아니에요

  수없이 말해도 내 몸을 더듬어 넣어준다


  놓고 간 게 있어요

  내 정신 좀 봐


  다녀오겠다 나선 이가 다녀왔다 말하지 않았다


  그는 문에 단 풍경이 하도 시끄러워 떼었다고 했다

  그 말고는 여닫을 이 없는 말수 적은 목재 문이지만 (전문. p.77)



  지갑 떨어뜨려놓고 주워 줘도 굳이 내 거 아니라고 하더니 그냥 고맙습니다, 말하고는 사라진 인간이 시인이었구나. 왜 그랬을까? 만인 앞에서의 쪽팔림? 내가 지갑 같은 걸 떨어뜨리는 인간이 아니라는 자만? 혹은 모르는 사람이 말을 시켜서? 그보다는 워낙 외로움을 타는 인간이라 딱 그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반응장애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시 쓰는 사람 가운데 종종 보이지. 쯧쯧. 농담이다. 나, 신경정신과 적으로 아는 거 쥐뿔도 없다. 나도 그냥 해본 말이다.

  이제 서른한 살의 팔팔한 시인이니 구름 같은 앞날을 기대할 수 있겠다. 아무쪼록 큰 시인이 되기 바란다. 그러면서 시 감상은 매정하게 한 것 같아 면목 없다. 춘천 출신이라 처가 식구 본 거 같아 더 미안하다. 좋은 말 좀 화끈하게 해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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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12-08 1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달 전에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고 어머나, 어머나, 요즘 세상에 우리나라에 남자 소설가도 있네, 했다가 찐따 된 적이 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빵터졌습니다.
아니, 근데 이 시인은 남성 시인...! 저도 여자인 줄 알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5-12-08 15:24   좋아요 1 | URL
ㅋㅋㅋ 자냥님도 참... 쪽팔리게시리 콕 찝어서 말씀입죠.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5-12-08 1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구병모ㅡ남자
유수연ㅡ여자 아닙니까? ㅎㅎ

Falstaff 2025-12-08 19:0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 말이요!!!

yamoo 2025-12-08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이름 여자 이름이 참 알 수 없더라구요...
중성적인 이름은 승현이 있구...현주라는 이름은 여성이 많지만 남성도 꽤 있죠.
현경의 경우도 여자가 많지만 남자도 있고, 은영이라는 이름도 남자 이름이 꽤 있죠. 고3때 담임 별명이 미친개 였는데, 이름이 오은영이었어요..ㅎㅎ 완전 상남자 스탈인데...이름 보면..ㅎㅎ
심지어 김미경이라는 남자 이름도 있더라구요..
근데 제가 본 이름 중 잊혀지지 않는 이름....최고다 씨...성이 최가이고 이름이 고다....주민센터에서 기둘리고 있는데 최고다씨~~라고 부르는...공뭔도 이름이 희한했는지 이름 맞냐는 소리를 바로 앞에서 들었네요..ㅎㅎ

Falstaff 2025-12-08 19:03   좋아요 0 | URL
별 이름이 다 있군요!
배철수 할머니도 계신다더군요. 허연 콧수염 DJ 배철수의 방송에 나왔다는데요, 유튜브인지, 라디오 방송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