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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와 인간 ㅣ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2
존 스타인벡 지음, 정영목 옮김 / 비룡소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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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벡의 중단편소설. 단편이라고 했으면 딱 좋겠는데, 본문이 191페이지에서 끝난다. 편집도 널럴하다. 눈이 전혀 피로하지 않다. 우리나라 같으면 장편이라 부르는 출판사도 있고, 경장편이라 칭하기에 딱 좋은 분량일 수도 있다. 이런 구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친애하는 작가 제럴드 머네인처럼 그냥 ‘픽션’이라고 하자.
스타인벡은 전형적인 서부 작가다. 총질하는 서부극이 아니라 주로 서부지역을 무대로 작품을 쓰는 작가라는 말이다. 동부, 특히 뉴욕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작가는 쌔고 쌨는데 중부와 서부는 얼른 떠오르는 작가가 별로 없다. 이 가운데 한 명이 스타인벡. <생쥐와 인간>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한 2백 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도시 솔대드 근처의 개빌런 산맥 언저리, 작은 강이 흐르는 오붓한 농장지역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책을 열면 두 남자가 보인다. 둘 다 청바지와 놋쇠단추가 달린 청재킷 차림이다. 볼품없는 검은 모자를 썼고, 둘 다 둘둘 만 담요를 어깨에 걸고 있다. 앞에 가는 남자는 작은 몸집에 검게 탄 얼굴을 한 영리하게 보이는 모습이다. 날카롭고 야무진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뒤를 따르는 남자는 반대로 거대한 덩치에 큰 눈과 흐릿한 눈동자 색을 갖고 있다. 한 눈에 봐도 순한 사람이지만 대단한 완력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작은 남자의 이름은 조지 밀튼. 큰 덩치는 이름이 재미있게도 레니 스몰. 이렇게 큰 스몰 봤어? 나중에 누가 이렇게 농담한다.
이들은 솔대드의 머리 앤 레이 농장 사무소에서 취업카드와 버스표를 받아 버스를 타고 오다 내려서 농장으로 일자리를 얻으러 가는 길이다. 여기 오기 전에는 북쪽 위드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다가 레니가 말썽을 일으켜 도망온 참이다.
먼 거리를 걷다가 물가에 이르러 쉬기로 결정한 조지. 무엇이든 조지가 결정하고 지시한다. 레니는 조지가 하는 말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조지가 레니의 주머니에서 뭔가를 빼앗는다. 죽은 생쥐다. 이제 세상 사람이 아닌 클라라 아주머니가 레니에게 산 생쥐를 잡아 주던 것이 버릇이 됐다. 레니는 부르러운 걸 만지기 좋아한다. 죽은 쥐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엄지 손가락으로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조금쯤은 행복해한다. 그러나 죽은 건 썩는다. 썩어가면서 악취와 진물을 토해낸다. 조지가 죽은 쥐를 저 멀리 던져버린다. 레니는 섭섭하다. 이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조지는 레니에게 조금만 더 돈을 모으면 작지만 땅을 사서 농사도 직접 짓고 토끼도 키울 거다, 그러면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는 네가 키워라, 이렇게 무마하고는 했다. 그래서 레니는 꿈이 토끼를 키우는 농장에 사는 일이다.
위드에서도 사건은 그렇게 벌어졌다. 레니는 손으로 예쁘고 부드러운 것을 쓰다듬는 걸 좋아한다. 벨벳 천도 좋아한다. 부드러우니까. 위드에서 여자가 입은 빨간색 드레스를 만져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빨갛고 부드러운 치마를 손으로 잡았고, 여자는 악을 쓰면서 얼른 손을 치우라고 했다. 레니는 손을 뗄 수 없었다. 그냥 “부드러움”을 만지기만 했을 뿐이고, 나쁜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여자는 더 악을 썼고, 그래도 레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여자는 이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비명을 들은 남자들이 주위에서 몰려왔는데, 여자는 레니가 자기를 강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조지는 레니를 데리고 숨었다가 밤이 오자 위드에서 도망쳐 길도 모르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달렸다. 레니의 이모 클라라 아주머니와 정이 들어 차마 레니가 당하게 내버려둘 수 없어서.
이게 문제다. 클라라 아주머니가 살아 있을 때, 생쥐를 잡아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라고 레니에게 주면, 손으로 살살 문지르기만 해도 어떨 때는 생쥐가 레니의 손가락을 물었다. 한두번은 참았지만 계속 물어뜯으면 그러지 말라는 의미에서 엄지 손가락으로 살짝 누른다. 생쥐는 레니의 거대한 손가락 힘을 이기지 못해 목이 부러져 죽어 버린다. 레니는 생명이 아니라 부드럽고 예쁜 것을 만지기 좋아해, 생쥐가 죽었어도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거였다.
그러니까 레니는 좀 모자란 사람이다. 일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라고 볼 수 있다. 조지가 무엇을 이야기하면 금방 잊는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조지가 레니에게 말한다. 물가를 따라 5백 미터를 가면 우리가 일할 농장이 나온다. 주인을 만나면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네가 말을 하면 주인은 너를 고용하지 않겠지만, 네가 일하는 모습을 먼저 본다면 너를 고용하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일을 하다가 만일에 문제가 생기면 여기 이곳, 내가 너한테 죽은 생쥐를 빼앗아 저 멀리 풀숲에 던져버린 이곳에 와서 숨어 있어. 그러면 후에 내가 와 너를 도와줄 테니까.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오후에 농장에 가서 일자리를 얻지 않고 이곳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아침에 가려는 것이 조지가 레니를 떨어내고 혼자 제 갈 길을 갈 모양이구나, 짐작할 수도 있다. 추리는 독자 마음이니까. 그러나 아니다. 콩 통조림을 저녁으로 먹고 숲의 빈터에서 밤새 잠을 자고 아침에 농장을 찾아가 일자리를 얻는다. 그러니까 작품이 끝날 때까지 조지는 레니 옆에 있는다는 뜻이다.
땅딸막한 농장주인 역시 청바지를 입었다. 노련한 농장주인이다. 레니의 정신이 그리 맑지 않은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농장 일꾼한테 머리 좋은 건 별로 필요 없는 일이라서 그 자리에서 둘 다 고용하고 마부 슬림의 반에 배치한다. 슬림은 현명한 일꾼이다. 일꾼 모두 인정하고, 라이트급 아마추어 권투선수로 주에서 우승까지 했던 주인의 아들 컬리도 함부로 까불지 못하는 위압적인 인물이다. 그가 조지와 레니를 여러 면에서 도와준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지만.
슬림은 암캐를 키우는데 이번에 새끼 여덟 마리를 낳았다. 비실비실한 다섯 마리는 강에 빠뜨려 죽였고 세 마리가 남았는데, 부드럽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레니한테 한 마리 주라고 조지가 부탁해 흔쾌하게 그렇게 한다. 레니는 일만 끝나면 아예 마구간에 있는 개집 옆으로 가서 강아지를 주물럭거린다. 개 키워보셨지? 새끼를 자꾸 주무르면 죽는다. 이걸 ‘손 탄다’, 라고 한다. 나도 어린 시절에 많이 들은 말이다. 그런데 레니는 자기가 얻은 강아지를, 이제 나고 사나흘밖에 안 된 새끼를 품에 안고 같이 자려고 한다. 안 될 말이다. 그래서 개집에 가져다 놓고 줄창 그곳에 찾아간다.
그러다가 한 번은 강아지가 레니의 손가락을 물었다. 갓난 강아지가 물었다 한들 그게 아프기야 하겠느냐만 그러지 말라는 의미에서 엄지손가락으로 새끼의 머리통을 뒤로 살짝 밀었는데 그만 목이 뚝 부러져 죽고 말았다.
농장주인의 아들이자 전직 권투선수였던 컬리는, 미국에선 작은 체구에 속하는 라이트급, 일꾼 중에 누구는 웰터급이라고 하지만 하여튼 크지 않은 체구에 단단한 몸을 가졌다. 자신의 작은 체구에 모종의 열등감을 가졌는지 꼭 덩치 큰 사람하고만 싸우는 습관이 있다. 이런 컬리 눈에 레니가 들어왔다. 여러 일꾼이 보는 앞에서 일방적으로 컬리가 싸움을 걸어 레니를 두드려 팬다. 그래서 조지가 큰 소리로 레니에게 “컬리를 붙잡아. 꼼짝 못하게 붙잡으라고!”하고 명령했고, 코피가 나고 눈이 찢어진 레니가 컬리의 주먹을 자신의 어마어마하게 큰 손으로 꽉 쥔 다음 꼼짝 못하게 힘을 주니까, 순식간에 우드득, 컬리의 손뼈가 부러지고 말았다. 정말 어마어마한 괴력이다. 강아지 목뼈 부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컬리가 레니에게 시비를 건 것이 몸가짐이 헤픈 자기 아내를 찾아 일꾼들 숙소에 들렀을 때였다. 신혼 부부인데 컬리가 아내한테 하는 말이라고는 누구와 싸워 잽과 원투 스트레이트로 피떡을 만들어버렸다는 얘기뿐이어서 남편한테 신물이 난 여자가 일꾼 가운데 이놈도 좋고 저놈도 좋고 기웃거리던 모양이었다. 일꾼들은 컬리의 나쁜 성격도 알고, 여자의 헤픈 몸가짐도 알아, 그녀를 멀리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컬리의 아내한테 아름답고 부드러운 것이 하나 있었으니… 레니는 어쩔 수 없이 농장에 오기 전날 콩 통조림으로 저녁을 먹고, 잠을 잤던 숲 속 빈터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고, 조지는 약속한대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만나러 그곳으로 향했는데, 아쉽지만 독후감은 여기에서 끝.
별 4개는 아쉽고, 5개는 좀 과하고.... 좋은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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