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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 어떤 환각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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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장엄미사곡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모차르트, 베르디와 포레의 장엄미사 말고는 기억나는 것도 없다. 올 6월에 내가 사는 도시 시향에서 모차르트 장엄미사를 연주한다 해서 안 갔다. 아무리 호국보훈의 달이라 해도 그렇지 멀쩡한 초여름날 하필이면 장엄미사를 듣겠느냐고, 귀신나오게시리. 차라리 모차르트의 <다단조 미사>였으면 갔겠다. 문학동네의 타부키 선집 4번. <페레이라가 주장한다>는 여태 읽었는 줄 알았는데 읽지 않았더라. <다마세누 몬테이루의 잃어버린 머리>만 읽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판 타부키 두 권 다 읽은 줄 알았다. <…잃어버린 머리>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어서 <페레이라…>까지 읽은 줄 알았던 게지? 거 참. 이번에 <레퀴엠>을 읽어보니 혹시 <…잃어버린 머리>에 관한 내 기억이 부정확한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생겼다. 거 참.
이 책 <레퀴엠>의 앞날개에 적힌 것을 읽고 이번에 알았는데, 안토니오 타부키가 포르투갈 최고의 작가이자 시인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포르투갈어를 배우고 그의 대표작 <불안의 책>을 번역해 세상에 알렸다고 한다. 심지어 <레퀴엠>의 경우 작품 자체가 페소아와 그의 조국인 포르투갈에 대한 오마주라고 했을 정도. 작품을 읽어보면 정말로 그렇다. 통째로 페소아와 포르투갈에 바치는 헌정 작품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 읽어봤다. 쉽지 않다. 10년 정도 지났는데도 솔직하게 말해 지금 내 머리 속에 있는 작품이 페르난두 페소아가 쓴 <불안의 책>인지, 루이 페르디낭 셀린느의 <밤 끝으로의 여행>인지 가물가물하다. 둘 다 읽었는데 서로 교차 혼돈이 일어나는 바람에 멀미가 날 정도다.
그런데 안토니오 타부키가 페소아에 헌정한 작품 <레퀴엠>을 그리 인상깊게 읽었다고? 그렇다. 장엄미사 자체가 이미 죽어 저 세상 사람이 된 사람을 위하여 지내는 제사. 따라서 작품에는 이미 죽은 자와 산 자, 타부키 자신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자 ‘나’의 유년, 소년, 청소년, 청년 시절의 기억 속 인물과 장소들, 페소아의 다양한 가명 가운데 하나를 가진 인물, 페소아가 자주 다닌 카페 등이 배경 또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렇게 <레퀴엠>은 작가 스스로 말했듯 “산 자와 죽은 자를 같은 차원에서 만나는 하나의 소나타이면서 한 편의 꿈”일 수 있다.
7월의 마지막 일요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7월 말은 그늘에서도 40도를 기록하는 극강의 더위가 덮치는 날이다. 바로 어젯밤까지는 아제이탕의 포도나무 그늘 아래에서 평화를 만끽했지만 오늘, 무지하게 더운 날 아침, 리스본의 산토스에 있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다. 그, 위대한 시인, 아마도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일 지도 모르고, 평생 존경하며 완전히 복종했지만 이제 염증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는 시인, “나의 손님”을 항구에서 만나 이야기하고 자정 즈음 다시 아제이탕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 하루를 쓴 책이 <레퀴엠―어떤 환각>이다.
7월의 마지막 일요일. 이날 하루동안 처음 향한 공원에서 ‘나’는 젊은 마약중독자를 만난다. 오늘 ‘나’가 만나는 스물세 명 중에서 처음 만난 인물이다. 수염이 덥수룩한 20대 청년. 청년이 말한다. “이틀 동안 먹지 못했어요.” 마약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는 대답한다. “원칙적으로 나는 약을 하는 것에 찬성하는 편이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거고 실제로는 싫어한다오. 나는 편견이 심한 부르주아 지식인이라서, 길거리가 아니라 당신 집에서 깨인 친구들과 어울려 모차르트와 에릭 사티를 들으며 약을 하는 건 찬성할 수 있소.” 이렇게 말해도 청년은 페소아의 초상이 그려진 백 에스쿠두짜리 지폐 두 장만 달라고 구걸하며 ‘나’에게 묻는다. “페소아를 좋아하세요?”
두번째로 만나는 사람이 로토 가게 절름발이. 70대의 작은 체구를 지닌 노인이다. 로토 가게 절름발이 노인을 만난 ‘나’는 노인에 대해 기시감이 생기는 걸 알아챈다. 어디서 봤을까? 노인의 정식 이름은 프란시스쿠 마리아 페레이라 데 멜루. 스피노자 철학의 의미에서 영혼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가톨릭 신자는 아니란다. 생각났다.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 등장했던, 페소아를 괴롭히던 로토 가게 젊은이가 그 사이에 나이가 들었던 거다.
다시 강조해,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7월의 마지막 일요일. 그래서 시작하자마나 화자이자 작가 타부키 본인인 것이 확실한 ‘나’는 물기를 잔뜩 머금은 스폰지를 꾹 누른 것처럼 땀을 줄줄 흘린다. 머리와 얼굴, 가슴과 복부, 그리고 등. 새벽에 입고 나온 셔츠는 이미 푹 젖어버려 어디 가서 새 셔츠를 적어도 두 장은 사고 싶은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일요일에 문을 여는 옷가게는 리스본에 없다. 페드라스 네그라스가街로 가기 위하여 택시를 탄 ‘나’는 택시 운전수에게 일요일에 옷을 파는 가게를 혹시 알고 있으면 그곳에 좀 들렀다 가자고 말한다. 이 택시 운전수가 세번째 만나는 사람. 이이는 상토메 출신으로 리스본에서 한달 전부터 택시 운전을 하고 있어서 리스본 지리를 이탈리아 사람인 ‘나’만큼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다가 깜박, 운전수의 머리에 전등불이 들어온다. 프라제르스 묘지 입구에 집시들이 들어왔는데 집시들이 자기네 캠프에서 일요일하고 관계없이 장터를 열었단다. 그래서 집시 장터로 가 라코스테 폴로 셔츠 두 장을 사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집시 본 김에 손금도 본다. 이래서 집시 여인이 네번째 만나는 사람이다. 집시 장터가 어디? 프라제르스 묘지 입구. 신기하다. ‘나’가 택시에 올라 출발하자마자 술집에 잠깐 들르자 해서, 시원하게 냉장한 샴페인을 한 병 샀다. 술집에서 샴페인 판 점원은 오늘 만난 사람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다. 그 샴페인이 한여름에 시간이 좀 지나서 미적지근하게 됐을 때 택시를 대기시켜 놓고 프라제르스 묘지에 들어가 묘지 관리인한테 물어물어 ‘나’의 절친이자 이미 죽은 타데우스의 묘까지 들고 가서, 타데우스와 나누어 마신다.
묘지관리인이 다섯번째 만난 사람. 이미 죽은 타데우스가 여섯번째. 늙은 집시가 말하기를 ‘나’의 친구가 이 묘지 안에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묘지관리인한테 참 오랜 세월을 함께 한 옛날 친구 타데우스 바츨라프의 묘를 찾아달라 했고, 친구의 묘지 앞에서 친구 타데우스와 술잔을 기울이게 될 것을 미리 알아 샴페인을 샀을까? 이런 현상을 ‘나’의 환각이나 환상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단다. 대신 ‘무의식’이라는 말로 바꾸어 달라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이미지의 세계를 그린 작품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 무의식이 발현될까? 작품 초반에 무지하게 아픈 질병인 대상포진의 예를 든다. 갑자기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몸에 침투하여 신체 부위에 물집 형태의 병변이 일어나면서 해당 부위에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몸 속에 들어와 있던 수두 포진 바이러스가 몸의 저항력이 약해지면 그 틈을 타 신체의 한 부분에서 크게 발현해 숙주를 괴롭히다가 놀 만큼 논 다음 다시 잠복 상태로 돌아간다. 이것처럼 ‘나’의 무의식도 언제든지 무의식에 빠질 수 있는 상태이지만 늘 발생하는 건 아니고 비정기적으로 불쑥불쑥 무의식 상태에 이르게 하니, 작품 속에서는 아예 ‘무의식 바이러스’라고 일컫기도 한다.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본문이 128페이지에 끝나는 짧은 작품이지만 당연히 속도는 빨리 나가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독자가 저절로 집중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있다. 각 단계에서 만나는 사람과 배경을 이루는 허물어지는 집, 등대, 거리, 고장의 이름 같은 장치들이 어떻게 ‘나’의 무의식과 연결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도 예상외로 근사한 일이었다.
읽으면서 이제는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유혹도 생겼다. 그러나 10년 전에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선뜻 결심하지 못하고 있다. 처분하지 않은 건 분명하지만 책이 책장 어느 구석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겠고, 굳이 핑계를 대자면 얼마든지 댈 수는 있겠지. 그래도 미친 척하고 다시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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