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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들을 끌어내라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3
힐러리 맨틀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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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메리 톰슨은 1952년 잉글랜드 더비셔에서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계 톰슨 부부의 딸-아들-아들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러면 나같이 순진한 독자들이 생각하기로, 톰슨 양이 맨틀 군과 결혼해서 힐러리 맨틀이 됐구나, 이럴 텐데, 더 재미있는 내력이 있어서 소개한다. 힐러리 점점 자라 칠 세 되었을 때, 엄마 마거릿이 자기 애인 잭 맨틀 씨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하숙생으로 들어와 애인이 된 것이 아니고, 애인더러 자기 집으로 와서 살라고 한 것. 왜 그랬을까? 가톨릭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아서? 자세한 건 모르겠고, 마거릿은 애인 잭 선생을 자기 침실에 들게 하고, 남편 헨리한테 다른 방에서 자라고 주문했다. 이렇게 4년을 살다가 (이쯤 되면 아빠도 보살이다, 보살!)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게 나니까 더는 남우세스러워 계속 살지 못했는지 이사를 결심했는데, 당연히 엄마와 잭 맨틀 씨, 그리고 세 아이가 함께 체셔의 로밀리로 옮겨갔고 더비셔 옛집엔 아빠 홀로 남았다. 이게 힐러리 생전에 마지막으로 목격한 아빠의 모습이었단다. 이후 잭 맨틀은 아이들의 비공식 계부가 된다. 비공식? 역시 여전히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나? 그건 모르겠다. 힐러리 메리 톰슨은 자연스럽게 힐러리 맨틀로 성을 갈았다.
이후 런던 정경대와 셰필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지질학자 제럴드 맥어윈과 결혼해 보츠와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9년간 살다 다시 돌아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토머스 크롬웰과 헨리 8세 시대를 조망한 역사극 삼부작 <울프 홀>, <시체들을 끌어내라> 그리고 <거울과 빛> 모두 부커 상 최종심까지 올라가 이 가운데 <울프 홀>과 <시체들을 끌어내라>가 2009년과 2012년에 상을 받아 상금으로 각 5만 파운드씩 10만 파운드를 벌었다.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앞의 두 작품을 세계문학 시리즈로 출간을 했고, 이 소식을 듣자마자 동시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는데 두번째 작품이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시체들을 끌어내라>를 먼저 읽게 됐다. 이 책을 거진 다 읽어가는 도중 1부 <울프 홀>이 들어왔다고 연락이 올 건 뭐람. 이런. 하긴 뭐, 인생이 다 그렇지.
2022년에 뇌졸중 합병증으로 생을 접었으니 이이의 나이 70. 마거릿 대처 살해 같은 평소 발언/창작 등을 보면 한 편으로는 젊은 시절의 청년공산주의연맹 회원인 것도, 20대 초반의 정신병력도 이해가 간다. 가톨릭 교도로 나고 자란 힐러리의 고민 가운데 하나는 왜 신부와 수녀가 친절한 사람들이 아닌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고. 당연한 것을 몰랐다. 사제 그룹은 제1 그룹이었거든.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말이지. 하여간 힐러리 메리 맨틀은 종교와도 확 금을 그어버렸다. 여기, 넘어오지 마! 죽을 때 그래서 무서웠을까? 이 사람의 일생이 웬만한 소설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스물일곱 살 때 폐경을 맞아 출산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말도 꺼내지 않았다. 출산하지 “않은” 것과 “못한” 것은 심각하게 다른 이야기이다.
<시체들을 끌어내라>는 헨리 8세 시절 가운데 종교개혁을 감행, 성공회를 국교로 해 로마 교황청하고 완전히 등을 댄 시절. 그러니까 캐서린과 공주 메리가 왕비-공주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당하고 있던 시절, 1535년부터 “내 목은 가느니까 힘들지 않을 거다.” 영화 <천일의 앤>에서 앤 불린이 망나니에게 이리 말하고 어여쁜 얼굴과 금발 머리카락을 신체에서 툭, 분리시킨 1536년 봄까지의 일을 당시 내무부장관으로 헨리8세를 위하여 종교개혁과 캐서린과의 이혼, 그리고 앤 불린을 처형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토마스 크롬웰의 시각으로 시절을 조망한 작품이다. 그러니 3부작의 1부 격인 <울프 홀>을 먼저 읽지 못한 게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1부에서는 앤 불린의 처형보다 훨씬 의미있는 잉글랜드의 종교개혁과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무효 소송을 다루었을 테니. 3부에선 드디어 1540년, 토끼를 잡았으니 사냥개를 삶아라! 토사구팽, 볼 일 다 본 헨리8세가 크롬웰의 목 역시 뎅겅 자르겠지.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롬웰을 죽인 건 실수였어, 내 잘못이었어. 우는 시늉 한 번 하고. 그냥 내 짐작이다. 얼른 <울프 홀>을 읽으면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
1535년 9월. 첫 장면은 광활한 잉글랜드 벌판에서 매와 ‘그레이스 크롬웰’과 ‘앤 크롬웰’이라고 이름 지은 사냥개를 데리고 왕과 내무장관 토마스 크롬웰이 사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왕은 토머스 모어의 참수형에 서명을 하고, 그의 목이 런던교에 걸렸다는 보고를 들은 다음 화이트홀을 떠나 울프 홀에 도착해 서부 잉글랜드의 주들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순행을 시작했다. 훗날 세계사에 기록될 격변에도 불구하고 튜더왕조는 50년간 전쟁 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는 중이었다. 없기는 왜 없었겠어? 그냥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이지. 스페인 왕가 출신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이모이기도 한 캐서린 왕비와의 혼인을 무효선언 했으니 잉글랜드가 태평성대 반 세기를 외치고 있더라도 이제는 로마 교황청은 물론이고 루터파에 의하여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몇몇 작은 공국을 제외한 강대국들, 스페인, 프랑스, 신성로마제국과 팽팽한 긴장의 끈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 시기이기도 했다. 만일 스페인-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가 연합을 해 그들의 배와 대포가 영불해협을 건너기라도 한다면 잉글랜드는 괴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긴장감이 가장 강력한 내무장관 토마스 크롬웰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바깥 사정.
국내 사정은 점입가경이다. 천생 여우인 앤 불린이 헨리 튜더를 꼬드겨 정실부인을 내치게 만들고 그 자리를 꿰찬 건 지난 일이라 그렇다 쳐도, 앤이 혼전임신한 엘리자베스 하나만 떨구고는 이후에 회임할 때마다 태를 떨구기만 한다. 헨리가 캐서린하고 20년을 살고도 혼인무효 또는 이혼을 결정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들을 낳지 못해서라고 주장한다. 앤 불린은 이 기미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사냥을 떠난 왕을 수행할 때 헨리의 팔뚝을 톡 건드리더니, 숲 속에서, 나 잡아봐라, 하고는 쪼르르 더 깊은 숲으로 도망갔던 것. 큰 키의 거구이며 힘도 장사인 헨리는 어 이거 봐라, 싶어 냅다 달려가 앤을 한 손에 잡았는데 포동포동하지만 골격이 작은 앤은 그만 풀숲에 폴싹 쓰러졌고, 그래서 우연인지 고의인지 하여간 헨리 왕이 쓰러진 앤의 위를 덮친 형국이었는데 거 참 신기하지, 그때부터 앤의 몸엔 있을 게 없어지고 조금씩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던 거다. 그리고 뭐라 떠들어대기 시작했냐 하면 내 배 속엔 헨리의 아들이 자라고 있다! 이러니 서둘러 혼인을 하지 않을 수 없기도 했겠지. 앤의 호언장담대로 아들이 태어나면 이미 16세 사생아 해리 리치먼드 공작이 있기는 하지만 정실 후계 아들을 두고 싶은 욕심이 하늘을 찌르는 왕인데 말이지. 그래서 잽싸게 토머스 모어의 목을 쳐가며 앤을 왕비로 만들어주었건만 태 속에서 나온 건 삼신할미가 스윽, 칼집 낸 자국밖에 없는 엘리자베스였으니 헨리의 실망이야 뭐.
천성이 경박한 앤은 정식 왕비가 된 후에 남편 헨리한테 바락바락 기어오르기도 한 모양이다. 성질이 급하지만 날 때부터 신사로 교육받은 헨리. 그럼에도 화딱지가 하늘을 찌르는 건 숨기지 못했다. 자기가 왕인데, 무오류의 존재인데 비천한 출신의 왕비가 바가지를 긁으니 속이 좋을 리가 있나? 그래 가끔 격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럴 때마다 앤이 국면의 개선을 위해 내세운 무기가, 헨리, 내가 왕자를 배서 예민해졌나 봐. 홍홍홍. 그럼 이때부터 몇 달간 왕과 궁정은 기대를 크게 갖기 시작하고, 임신한 왕비와 동침하는 건 잉글랜드 궁중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 헨리8세는 다른 무수리들을 찾아 별의 별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면서도, 아들, 아들, 제발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만 뽑아라, 벙글벙글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지만, 아뿔싸, 그때마다 정말 유산인지, 아니면 애초에 임신이 허위 주장이었던지 어느 한날 앤의 치마는 선혈로 적셔지고 앤은 꼬챙이처럼 말라간다.
아무리 미모의 얼굴과 체형을 가졌다고 하지만 결혼생활에 아내의 미모가 갖는 효용기간은 의외로 짧다. 헨리 8세도 마찬가지였다. 천성이 경박하고, 거만하고, 사치스럽고, 하고 싶은 건 몽땅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앤 불린의 경우엔 효용기간이 더욱 짧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권력에 대한 욕심이란. 캐서린 전 왕비가 빨리 죽었으면 호시탐탐 모종의 기회를 노리는 것도 모자라, 몸이 쇠약해진 캐서린이 언제 죽을지 궁금증이 넘쳐 내무장관한테 직접 가서 보고 얼마나 더 있어야 진짜로 죽을지 나한테 얘기 좀 해주셔, 명령 비슷하게 부탁하기도 한다. 이걸 바보도 아닌 왕이 모를 수 있을까? 여기에 하나를 보태 또 임신을 했다, 그러고 또다시 유산을 했다면서 증거로 피투성이 무슨 작은 형체의 것을 왕의 시종한테 보여주기까지 하니, 이것도 한두 번이지, 16세기답게 일종의 미신으로 포장한 의심이 왕의 마음과 뇌를 부식시킨다. 앤이 시종들과 놀아나는 거 아냐? 저게 진짜 왕의 정자로 만들어진 거야? 정말로 이렇게 믿었다는 게 아니라, 이제 앤 불린과의 사이에 염증이 난 헨리의 심정을 알아챈 대신들이, 주로 크롬웰이 악역을 담당해, 크롬웰과 그 일당들이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왕비 앤과 젊은 시종들. 이들은 순전히 농담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일한 전력이 있는 앤 불린의 성적 방종, 처녀 시절 헨리 퍼스와의 연애 같은 것으로 앤 불린은 결혼 당시 처녀가 아니었으며, 심지어 엘리자베스의 진짜 아빠도 헨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것에서부터, 젊은 귀족 출신 왕실의 시종 가운데 평소 크롬웰한테 불손하기 짝이 없던 프랜시스 웨스턴, 브래러턴 등과 농담을 하면서 왕이 죽으면 너하고 재혼할 지도 모르지, 감히 왕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반역을 도모하기도 하는 거다. 적어도 이 말을 입에 올린 건 사실이라 실제로 웨스턴과 브래러턴이 앤의 침대에 올랐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농담 한 마디에 불쌍한 두 청춘은 목이 달아나게 생겼던 거다. 하나 더. 앤의 친동생 로치퍼드 경 조지. 앤이 프랑스에 오래 있어서 낯이 익지 않은 로치퍼드 경 조지는 다 성장해 누나 앤을 보고 자신과 비슷하게 생긴 미인이라서 더욱 끌려 육체적으로도 가까워진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남매의 정이 없어 그럴 수 있었다. 이건 심하게 비위가 틀어진 한 여인, 바로 로치퍼드 경의 아내이자 앤의 올케인 로치퍼드 여사의 주장이다. 이 여사님이 앤의 시녀 가운데 한 명이라 크롬웰에게 쪼르르 달려가 거짓인지 아닌지 하여간 고자질을 하기를 둘이 키스를 했는데, 그게 보통 키스가 아니라 텅 슬라이딩 키스여, 텅 슬라이딩. 프랑스 식! 앤이 헨리하고 잘 때도 프랑스 식으로 한 거 알아?
왕은 노골적으로 시모어 가문의 딸이자 앤 왕비의 시녀로 일하고 있는 제인 시모어에게 꽂혀 있는 중이었다. 앤과 달리 전혀 곁을 주지 않는 여인. “예쁠 것 없고 아무렇지도 않은 사철 발벗은” 이미지.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거만하고 그래서 천해 보이기 쉬운 앤에게 질려 이제 정반대의 모습에 혹 빨려들어간 상태. 왕은 화이트홀의 자기 방, 큰 책상에 앉아 직접 왕비 앤 불린의 반역죄에 대한 기소장을 구술해 쓰게 하고, 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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