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불멸 위픽
김희선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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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는, 안 된 이야기지만 절대 돈 주고 사지 않는다. 꼴랑 단편 하나 싣고 단행본입네, 하는 것도 웃기고, 66쪽에 10퍼센트 할인가 11.700원도 아깝지만 사실은 나라도 아마존 원시림을 지켜 지구 영속에 이바지하고 싶어서라고 구라 풀고 싶어서다. 근데 이 시리즈를 도서관에서 발견했다 하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어차피 도서관에 왔으니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은 거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내가 김희선 팬이다. SF를 별로 읽지 않아도 그렇다. 어쩌다 보니 이게 여섯 번째 읽는 김희선의 책이다.

  처음엔 외계인과 UFO 이야기를 많이 하다가, 영혼의 전이 또는 이동을 통한 특정 인간의 영속성을 모색하더니, <속초, 불멸>은 진정한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병이 깊은 아버지 김기홍씨가 죽기 몇 시간 전에 맏이인 딸을 불러 우주의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말한다. 이 부녀가 평소에 가까웠던 것도 아니다. 굳세게 필름식 사진관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아침부터 사진관 암실에서 시간을 보내다 동네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고, 가게에 돌아와 종이컵에 인스턴트 커피를 타 마신 후에 다시 암실에서 작업을 하는 무미건조한 일을 무려 40년이 넘게 지속했다. 이것 외에는 오직 하나의 취미를 즐겼을 뿐인데, 바로 비디오 테이프로 SF 영화를 보는 일이었다. 별로 애틋한 정이 없는 딸이 보기에 아버지가 하도 SF 비디오만 봐서 영화와 자신의 실제 삶을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었으니 매니아를 넘어 편집이랄까, 집착 수준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작가는 결론을 독자에게 맡길 것이다.

  이 “우주의 비밀”이 뭘까? 나는 앞 문단에서 “진정한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을 털었다.

  김기홍 씨는 주장하기를, 삼척이란 곳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가방끈이 그리 길어 보이지 않는 화자 ‘나’는 삼척이라는 지명이 “상상 속 장소에 불과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특별히 뭔가를 한 건 아니었다. 삼단논법으로 가설을 세우고 논거를 제시하지도 않았고 방정식이나 갖가지 수식을 써서 도시가 없음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버지는 삼척이라는 곳에 자신이 가서 무엇을 본다고 해도 그건 단지 환영일 뿐이라고 고집한다. 누군가의 비디오 아트일 수도 있고, 가상 무대일 수도 있고, 심지어 홀로그램일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 평소 SF 영화를 즐겼다고 하니 당연히 비디오 아트나 가삼 무대나 홀로그램을 만든 존재는 베데스타 행성에서 UFO를 타고 도착한 외계인일 확률이 대단히 높겠지만 작가는 끝까지 입을 봉한다.


  작품 이야기는 거의 다 한 거다. 아버지가 죽고 어느 날 인터넷에 ‘삼척’을 조회했고, 이게 알고리즘에 영향을 주었는지 유튜브 추천영상에 조회수 302회의 <삼척, 불멸>이란 동영상이 올라와 클릭해 봤더니 동해안 바닷가에 삼척이라는 도시를 만드는 설치미술에 관한 거였다. 삼척을 만들고, 우리에게 삼척이라는 환영을 심어주고, 견고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세계에 삼척이라는 틈을 끼워 넣는 작업. 그걸 왜 하필 ‘삼척’이라고 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발음하기 좋아서.

  한 남자가 자다가 꿈에 나비를 보았다며? 이 남자가 잠에서 깨더니 그랬다며?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 이런 의미에서 삼척이라는 곳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데 모두 삼척이 있다는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인지, 그걸 누가 알아? 삼척이란 장소만 대상이 아니다. 매릴린 먼로라는 미국의 여배우가 정말로 있었어?

  안 보고 믿는 자가 진복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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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4-07-25 0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위픽 시리즈 궁금해서 한 권 만났는데 새 책으로는 사지 않을 것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7-25 15:20   좋아요 0 | URL
안 사게 되더라고요. 달랑 단편 하나고요, 읽으려면 두 시간도 안 걸립니다. ㅋㅋㅋ

stella.K 2024-07-25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님의 간사함이 보이는군요. ㅎㅎ 저도 뭐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리즈 돈 주고는 안 사 볼 것 같아요. 요즘같이 불경기 고물가 시대에 당장 줄이거나 아예 지출항목에 없는게 문화빈데...ㅠ
그래서 삼중당 같은 문고본이 다시 나와줘야 한다니까요. ㅎ
그래도 이리 쓰시니 귀 얇은 저는 또 좀 혹하네요.ㅎ

Falstaff 2024-07-25 15:21   좋아요 1 | URL
아오, 간사를 들켜버렸네요. 눈치도 빠르셔요. ㅋㅋㅋㅋ
삼중당 문고 같은 건 이제 영원히 안 나올 겁니다. 우리나라도 당시엔 해적판 왕국이었잖습니까. 요즘에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해서 그렇지요. ㅎㅎㅎㅎ

하이드 2024-07-2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처음에는 어이 없었고, 도서관에서 보일때마다 빌려서 십여권 정도 읽었는데요, 읽다보니, 다시 읽고 싶은 책들도 있더라고요. 좋아하는 책은 사놓고 볼만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 책 안 읽는데, 책 읽는 문턱 낮춰주고, 일단 다 기본은 하는지라 소설의 매력에 익숙해지기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디자인이 진짜 잘 빠졌어요. 뭐, 팔리는 책들이 없고, 책 값 많이 오른 와중에 괜찮은 시도인 것 같습니다. <삼척,불명>도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4-07-26 05:36   좋아요 0 | URL
저는 편집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공간이 너무 널럴해서 글자가 몇 개 들어가지 않아 그나마 몇 페이지 안 되는 게 휙휙 넘어가더군요. 다 취향의 문제겠지요. 아무래도 제가 올드 패션이다보니 그런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