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의 일기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딩링 지음, 김미란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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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링. 1904년에 태어나 84년에 간 중국작가. 나는 적어도 한 편 이상 딩링을 읽은 줄 알았다. 굉장히 입에 익은 이름인데 그것 참, 뒤져보니 처음이네. 누구하고 헷갈렸을까? 얼핏 누군가가 떠오르는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네. 생몰연대를 보면 참 불쌍한 세대다. 청말(淸末), 군벌, 국민당/공산당, 중일전쟁 다 겪고 드디어 붉은 군대에 의한 해방 중국을 만났지만 기다리고 있던 건 대약진운동과 이어지는 문화혁명. 골로 간 세대. 딩링은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난 인텔리겐치아 답게 1930년에 좌익작가협회에 가입하고 날카로운 필봉을 과시하면서 스탈린문학상 2등상을 타기도 했지만 3년 후인 1955년(작가로서 최고의 전성기 시절에) 반당집단으로 비판을 받고 1958년엔 당적을 박탈당한 후 저 멀고 먼 흑룡강성 베이다황으로 쫓겨나 무려 20년간 노동개조를 겪는다. 하여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라니까? 왜 민주 공산주의는 없는 건지. 공산주의는 극소수에 의한 종신(또는 축출될 때까지 한정적) 독재를 해야 하는 건지. 그러면서 모든 예술행위를 말살시키는 건지. 뭐가 문제라고 생각하셔? 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자체가 제일 큰 문제이며 암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150년 전쯤 태어났으면 무정부주의자가 됐을 거 같기도 혀, 글치?


  <소피의 일기>는 1928년작. 딩링은 이 작품으로 본격적인 필명을 날렸다고 한다. 작품은 12월 24일, 소피의 사상에 입각해 이야기하자면 종교는 분명히 아편이니까 딩링한테는 전혀 의미가 없었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시작해 다음해 3월 28일 새벽 세 시에 쓴 것까지. 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20대 초반의 베이징 청년들. 주로 경대京大, 서울에 있는 대학, 즉 베이징 대학에 재학중인 학생들이며 연인 한 커플, 소피를 사랑하는 남자 둘. 그리고 친구 몇 명이다.

  일기를 쓰는 ‘나’ 소피는 폐병을 앓고 있다. 당시 폐결핵은 대단히 중한 질환인데 베이징의 황사를 견딜 수 있었을까? 뭐 작품 속이니까. 하여간 웨이디는 소피보다 네 살이 많지만 소피를 ‘누나’라고 곧잘 부른다. 어린 누나를 사랑하고 있다. 소피는 웨이디를 사랑할까? 거기까지는 아니고 가벼운 접촉도 할 마음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사랑은 분명히 아니다. 그냥 친한 동생 또는 오빠? 좋아, 그 정도야 뭐. 친구들 가운데 커플이 있다. 위팡과 윈린. 둘은 진짜 연인이다. 하지만 1928년. 아무리 당시의 선진국이자 문화국이라할지언정 이들은 사회의 양식에 따라 깊은 페팅조차 삼가한다. 하물며 혼전임신의 가능성이 있는 섹스야 말할 것도 없고. 소피는 이 커플을 보면서 비웃는다. 좋으면 하는 거지 뭘 또.

  이 그룹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조각같이 잘 생기고 키도 큰 남자 링지스凌吉士. 이름이 웃기다. 우리말로 발음하면 ‘능길사’. 싱가포르에 사는 화교. 베이징에 유학해 대학을 다닐 정도면 싱가포르에서 방귀 깨나 뀌는 집안이 틀림없다. 원래 결핵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인병이라고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도 해서 일종의 선망이 되기도 했다. 푸치니의 위대한 오페라 <라 보엠>과 베르디의 불멸의 작품 <라 트라비아타>를 떠올려 보시라. 이 능길사, 랑지스도 소피를 점점 사랑하게 된다. 소피 역시 웨이디 만큼 랑지스를 그냥 친구로 여기지 않아 저 뒤에 가면 부비부비 키스도 하는데 딱 그것으로 끝, 더는 진행시키지 않는다. 알고보니 잘 생긴 외모에 헌칠한 체격으로 베이징 골목마다 연인을 하나씩 숨겨두고 있다나? 확인한 바 없지만 풍문이 그렇단다.

  이게 다다. 친구들의 연애와 ‘나’ 소피의 연애, 그리고 병. 입원을 하고 퇴원을 하고, 베이징에서 벗어나 교외로 이사할 생각을 하고. 연애도 안 되고, 이사해봤자 병도 쉽게 낫지 않을 거 같은 1920년대 중국 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 젊은이들의 혼돈.


  도서관에서 발견하지 않았으면 안 읽었을 거 같다. 널럴하게 편집한 단편소설이라 본문만 98쪽에 2017년 정가가 14,500원. 1920년대엔 센세이셔널 했겠지만 지금 읽으면 뭐 별로 공감하고 말고가 없는 그냥 그런 청춘들의 고뇌, 괴멸. 당시에 쓴 작품 몇 개를 합해서 좀 두껍게 한 권을 냈으면 좋았을 듯. 그러나 그건 출판사 마음이니까, 너네 마음대로 하셔요. 책 한 권 읽는데 두 시간도 안 걸리면 문제 있는 거 아냐,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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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14 0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딩링, ㅋㅋㅋ 창비에서 나온 <내가 안개마을에 있을 때> 사두고 아직 안 읽은 거 같아요....읽은 줄 알았는데 안 읽었나 봅니다. 뭔가 배경이 답답해서 읽다가 덮었던 듯;;;; 그건 그래도 작품 수도 좀 더 있고 만원인데.....-_-;

Falstaff 2024-03-14 21:09   좋아요 0 | URL
저는 어이없게도 정말 형편없는 소설 <달팽이가 사랑할 때>의 딩모를 연상했다는 거 아닙니까. -_-;; 딩모 보다는 천 배쯤 낫습니다만.

stella.K 2024-03-14 0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값이 꼴값인뎁쇼? ㅎㅎ
딩링 저도 들어본 것 같은데. 제목도 그렇구요. 아, 소피의 선택과도 헷갈리겠어요. ㅋ

Falstaff 2024-03-14 21:10   좋아요 2 | URL
지만지가 자주 이런 짓을 합니다. 단편집에서 딸랑 한 두 작품 빼서 단행본으로, 그것도 비싸게 팔아먹는 거요. 아휴.... 옙. 소피의 선택도 헷갈리게 만든 거 가운데 하납니다.
근데 웃겨요, 표지 보면 ˝소피˝를 한자어로 ˝사비 여사˝라고.... ㅋㅋㅋㅋ

stella.K 2024-03-14 21:14   좋아요 1 | URL
아, 이제 보니 정말 그러네요. 웃겨요. ㅋㅋ

coolcat329 2024-03-14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총 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내가 안개마을...>을 읽었는데 앞의 두 작품은 공산당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마지막 작품은 또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주인공이 나와서 작가 딩링이 격변의 시대에 얼마나 작가로서 힘들었겠는지 알겠더라구요.

Falstaff 2024-03-14 21:12   좋아요 0 | URL
20세기 초중반에 출생한 중국 지식인 계급은 정말 험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근데 말하고 보니까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유럽인들도 마찬가지이긴 하군요. 하여간 20세기란.... 윽. 우리나라도 뭐 비슷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