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길 - 최명익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5
최명익 지음, 신형기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03년에 평안남도에서 출생한 작가. 평양 보통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921년에 도쿄로 유학해 23년에 돌아왔다. 이 시기에 귀국한 도쿄 유학생들은 관동대지진에 이은 조선인 학살 사건으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해 돌아온 인물이 대부분이다. 하여간 최명익은 이후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고, 1928년부터 유방(柳坊)이란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하고 몇 개의 동인지를 발간한다. 이후 1936년에 잡지 『조광朝光』에 <비 오는 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다. 작품을 읽어보면 당시로서는 눈에 띄는 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읽으면 낡은 설정이 눈에 확 나타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시대를 반영하기 마련인 문학작품에서 식민지의 우울한 작가 입장에서 주인공 주변에 등장하는 무기력감과 우울증, 과도한 자의식 같은 것이 표출되었다고 주장한다면 독자는 할 말이 없다. 모두 여덟 개의 중단편을 실었다. 이 가운데 하얼빈을 무대로 과거에 혁명가였던 지식인 청년과 화류계 여성의 아편중독을 그린 <심문>과 고향에 어린 시절 결혼한 처가 있는 지식인 청년 이야기 <무성격자>, 공장 직공이 직장에서 집에 오는 길에 있는 사진관의 사진사와 친하게 지내다가 관계가 끊어지는 <비 오는 길>, 아니, 아니, 제일 마지막에 수록한 <맥령麥嶺> 빼고 일곱 작품이 다 좋았다.

  그런데도 이이의 이름이 낯선 건, 웬수 같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충돌 때문이었다. 도무지 좌익이나 공산주의하고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최명익은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 부근 평양에 머무르면서 평양예술문화협회의 회장을 지낸다. 나는 이게 작가가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의하여 결정했다기 보다, 그저 자리가 있고, 하라고 하고, 만약 하지 않으면 신상에 좋을 일은 하나도 없어 보이니 맡지 않을 수 없어서 덜컥 받은 자리라고 생각한다. 이이 같은 모더니스트가 공산주의자라니, 말도 안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이를 설명하기를, “1946년 김일성이 북한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점차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저 관운이 좋아 시키는 대로 넙죽넙죽 받은 거라고 본다. 안 하면 죽을 것도 같기도 했을 거고.

  이런 사람한테 공산주의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진짜’ 교과서의 공산주의면 혹시, 만의 하나 또 모르겠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닌 스탈린 식 독재에 복무하기 위한 문학은 이미 문학이 아니다. 이 책에 증거가 있다. 1947년에 북한의 출판사 문화전선사에서 발표한 중단편집 《맥령》의 타이틀 작품 <맥령>. 일곱 작품을 흥미진진하게 읽다가, 아니 이런 작가도 있었어? 역시 우리나라는 단편소설의 나라가 맞아, 갑자기 등장하는 <맥령>이라니. 한 순간에 맥이 영 빠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맥령. 한자어로 麥嶺, 보리 맥에 고개 령. 합하면 보릿고개. 때는 1945년 봄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를 맞아 패전이 거의 확실시 되는 일본은 마지막 발악을 하느라고 조선에서 말 그대로 발작적 공출과 젊은 남성에 대한 징병과 징용을 집행했다. 식민지 지역에서 언제나 제일 악독하게 피식민지 백성을 쥐어 짜는 것은 식민 모국에서 온 통치자가 아니라 현지 고용인이었다. 그리하여 작품의 무대인 면 지역에서도 면장이 면민들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짜내고 있는 인간 착즙기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 이상진이라고 쓰고 최명익이라고 읽는 소설가가 소개, 혹시라도 평양에 공습이 있을까 싶어 시골로 하방해 있으라는 소개명령을 좇기 위해 낙향해 있었다. 당연히 이상진은 면에 거의 유일한 인텔리겐치아이며 아래 위 모두에게 존경을 받는 명사. 다만 면장과 기타 군역 일을 하는 공무원들의 눈에는 참으로 아니꼽게 보이는 것이 몸에 무슨 드러나지 않는 질병이 있어서 정기적으로 진료증인가 뭔가를 제출해 병역을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상진도 1945년 봄에 처음 이곳으로 소개해 내려왔고, 오자마자 동네의 건실한 젊은이들하고 배포가 맞아 친하게 지내게 됐다. 공산주의 아래에서 생산된 작품이 거의 다 그렇듯이 젊은이들은 도무지 악할 줄 몰라서 이상진의 말을 예수님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하는 말인 것처럼 따른다. 그러면서도 자기들 나름대로 굳은 신념 역시 만땅.

  석주, 인갑이, 동석이 들이 병역 신체검사에 갑종을 받아 이제 남의 전쟁터에 징병 나갈 일만 남았다. 근데 인갑이가 상진에게 엉뚱한 걸 물어본다.

  “선산님. ‘나는 왜놈이 아니구 조선사람이외다.’를 영어로 어떻게 합니까?”

  왜 그런 것을 묻느냐고 다시 물어보지 않고도 인갑이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 줄 알아챈 상진. 인갑이는 이미 중국어로는 어떻게 말하는지 배워 놓았다고 한다. 만일 중국 전선으로 끌려가 중국 군인을 만나게 되면 써먹을 용처다. 같은 목적으로 또 태평양 전선으로 가게 되어 귀축이라고 하는 영국이나 미국 군인을 만나게 되면 써먹어야 하니까 영어로 어떻게 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작품이 한참 진행하여 드디어 얼마 있지 않아 인갑이네가 징병갈 때가 다가오자 이번에도 인갑이, 상진에게 묻는다.

  “데 김일성 부대는 상게두 백두산에서 왜놈하구 싸우갔디요?”

  이 다음부터 조금만 그대로 인용해보자.


  이런 인갑이의 말에 상진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김일성 부대!”

  인갑이의 말을 받아 외는 상진은 서슴없이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 이 젊은이는 날개가 있구나!’ 속으로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기막힌 진공관 속에서 김일성의 존재를 생각해내는 것만도 얼마나 씩씩한 비약이요, 찬란한 낭만일까.

  “물론 싸울 거요. 지금이야말로 그분이 더욱 힘 있게 싸울 때니까!”

  청구(靑丘) 조선의 산머리 우러러 선조의 웅대한 가지가지의 전설을 지니고 있는 백두산에서 동포의 의사를 대표하여 조국 해방의 봉화를 높이 들고 싸우는 한 영웅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며 상진은 대답하였다.


  1947년 작품이다. 미주엔 1941년에 발표했다고 쓰여 있지만 오식이다. 1941년의 평양에 청년 김일성의 이름이 그리 날리지 못했을 때라서 이런 표현은 쓰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더구나 1941년이면 최명익은 모더니즘의 최고 시절을 향유했을 텐데 뭐가 아쉬워 이런 글 같지도 않은 작품을 끼적이고 있었겠는가.

  아쉽다. 이 양반이야말로 남쪽에서 살았어야 했는데. 전쟁 후에도 남쪽에 남아 자신의 문학적 끼를 유감없이 휘날리고 그 다음에야 눈을 감아도 감았어야지, 세상에 <맥령>같은 작품이나 쓰면서, 나중엔 대하소설이라는 <사명대사>나 <이조망국사>같은 역사물이나 쓰다가 숙청당했으니 죽어서나마 눈이나 감았겠느냐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는데 1972년에 숙청을 당했다가 1984년에 (사후)복권했다고 한다. 70년대 초반까지 살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의 단어에다가 한 가지 허들이 더 있다. 평안도 사투리. 구개음화가 생기지 않는 이북말 특유의 발음을 그대로 쓴 경우가 많아 고어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독자들은 작품의 완성도와 관계없이 읽기에 곤란을 겪을 수 있겠다. 난 재미있게 읽었지만.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4-03-07 0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제대로 쓴 구어체는 읽을 때 진짜 좋더라구요 ㅋㅋ근데 북쪽말은 잘 모르겠고…이번에 수능특강 문학 훑어보다 마지막에 이문구 장평리 찔레나무 실린 거 보고 삘 꽂혀서 막 따옴표 안 충청도 말 다 소리내서 읽고 앉았다니까요 ㅋㅋㅋ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투리는 좋아하는 게 확실… 수능에 이문구 나오면 좋겠다…최명익 소설도 문학 빈출이라 샛길로 샜네요 ㅋㅋㅋ 월북 작가 작품도 열심히 출제되는 세상… 그런데 짜투리만 봐도 이 작가는 크게 재미는 없었어요… ㅋㅋㅋㅋ

Falstaff 2024-03-07 16:01   좋아요 1 | URL
윽. 빈출.... 빈번하게 출제한다, 라는 뜻인지, 貧出 아주 드물게 나온다는 뜻인지 막 헛갈렸다는 거 아닙니까. 자주 나온다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ㅎㅎㅎ 저는 정말로 오늘 날까지 이이의 이름도 몰랐습니다. 야만의 세월을 산 거 맞습니다.
근데 <맥동> 빼고는 괜찮은 걸로.....

잠자냥 2024-03-07 17:44   좋아요 1 | URL
헐 폴스타프 님이 최명익 모르셨다는 게 오늘 가장 충격입니다~!

Falstaff 2024-03-07 19:27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그때는 지구가 편평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월북 작가들은 아예 거론되지도 않았고, 소위 서울의 봄이 온 후에도 대단한 성가가 있는 극소수의 작가들만 알 수 있었답니다. 그들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했고요. 지구가 둥글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4-03-10 12:07   좋아요 2 | URL
ㅎㅎ 열반인님^^ 수능특강 문학을 공부하셨어요^^ ˝빈출˝ ˝최빈도˝ 이런 단어랑 멀어진지 오십년되었는데, 열반인님 덕분에 다시 환기 당했어요

놀러갈게요~~ 열반인님 서재

반유행열반인 2024-03-10 18:42   좋아요 2 | URL
얄라알라님 아직 공부는 안 하고 목차만 주루룩 봤어요 ㅋㅋㅋ드물게 빈출 아니고 이 작가 수능특강 모의고사 등등 제법 몇 번이에요. 나오는 작가만 계속 나와서 지루하기도 하고 이새끼들 출제범위 너무 일천하다 싶고 박상륭 나와라!!! 혼자 그러고 그런데 아마 안 나올 거 같고 ㅋㅋ 최근에 기형도 시인 시 출제되는 거 보고 으떤 강사는 이제 이상 시 나와도 놀랍지 않다 이러더라고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