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문지 스펙트럼
오에 겐자부로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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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가지 측면에서 놀란 작품이다. 하나는 오에의 문장. 내가 여태 오에 겐자부로를 헛 읽은 거 같다. 아니면 이이가 조밀하게 직조하는 날실과 씨실의 얽힘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들은 그냥 넘어간 것인지도.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보다 오에 겐자부로가 부사와 형용사를 높은 비율로 사용한 작품을 나는 기억할 수 없다. 스토리 중심으로 우직하게 밀고 나가는 작가인줄 알았는데 아오, 이렇게 유려하고 아름답고 꾸밈도 많은 문장을 자유자재로 쓰다니. 다른 하나는 새싹을 뽑는 것도 모자라 기어이 어린 짐승에게 총질을 하는 어른의 비정함을 노골적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 일반에서 어린이는 현재 또는 미래의 희망을 은유하는 것이 보통이라서 놀라움이 더했는지도 모른다.

  내게 의외였던 두 가지를 합쳐 말하자면, 집단 이기심에 의한 약자에 대한 폭력을 유려하고 감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어내는 놀라운 광상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해서 심미적 문장으로만 되어 있지는 않다. 적재적소엔 바로 그 문장이 아니면 어울리지 않을 칼로 벤 듯한 글도 읽힌다.


  “살인의 시대였다. 지루한 홍수처럼 전쟁이 집단적인 광기가 인간의 정념 구석구석에, 몸의 빈틈없는 구석구석에, 숲이며 도로, 하늘에 범람하고 있었다.” (14쪽)


  태평양전쟁 말기. 연합군 폭격기가 도심을 공격하기 시작해 피해자가 속출하자 급기야 일본 군부는 시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린다. 일본처럼 태평양 너머 저 멀리 있는 본토가 폭격당하고 있다면 당연히 이 전쟁은 지는 전쟁이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군부는 더욱 악착 같이 집단 최면을 시도해 국민들 역시 더욱 교조적이 되는데, 일본처럼 전장과 후방이 극단적으로 먼 거리일수록 더 할 것임은 당연하다.

  나는 일반적인 일본 사람들의 성향을 알지 못한다. 다만 천 년 세월동안 무신정권 치하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센 자한테 약하고 약한 자한테 강하게 진화되어 왔다는 건 이해한다. 전쟁 말기의 극단적 애국주의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심리. 이 두 가지가 아니라면 작품 속의 일본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모든 행위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감화원 소년들이다. 도시에 소개령이 내려지자 감화원에서는 원생들의 부모에게 연락해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가 각자 알아서 소개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대다수 가족들은 결코 자신들의 못된 혈육을 맞으러 나타나지 않았다. 주인공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못살게 구는 선배를 찔러 감화원에 오게 되었는데, 아이를 데려가라는 편지를 받은 아버지가 군화 신고 징용일꾼모자를 쓰고 동생까지 데리고 나타나 ‘나’를 데려가기는커녕 동생마저 감화원의 집단 소개의 일원으로 붙여 놓고 가버렸다. 그래서 ‘나’의 아무 잘못 없는 어린 동생까지 합해 열다섯 명의 원생들이 변변치 않고 푸르죽죽한 제복을 입고 헝겊으로 만든 신발을 신은 채 1차 소개원의 신분으로 걸어서 멀고 먼 시골까지 걸어가고 있다.

  감화원. 비행이나 범죄를 저지른 청소년들을 가두어 두고 교정하는 시설이다. 다수를 가두어 두면 반드시 그곳을 이탈하려는 사람이 발생한다. 1차 소개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남쪽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녀서 미나미(남쪽)이란 별호로 불리는 남창 출신 소년이 다른 어린 소년과 함께 적절한 밤시간을 틈타 대열에서 이탈했다. 이미 시골지역으로 접어들어 인적이 드문 고장이거늘 이들은 시골 어른들한테 붙잡혀 무수하게 구타당하고 순경에게 넘겨 버렸다. 시골. 이곳은 외지에서 온 사람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튕겨내는 농민이란 또 하나의 바다였다. 감화원 아이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간신히 표류하고 있는 섬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가는 곳마다 시골사람들은 이들을 에워싸고 현기증이 날 만큼 감탄하며 보고 있었는데, 원생들은 눈길에서 일상적인 굴욕과 어두운 분노를 함께 느껴야 했다. 그러나 원생들의 일상들은 몸과 마음에 극도로 상처를 입으면서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 연거푸 가로놓여 있어 그것들과 맞부딪혀가는 수밖에 없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탈주한 감화원 원생을 잡아 넘기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직접 잡아서 두드려 팬 다음에 경찰을 불러 신병을 인수하는 건 조금 과하다 싶지만, 경찰에게 탈주한 원생이 어디에 숨어 있다는 것을 신고하는 정도야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지금은 일단 이렇게만 하고 넘어가자.

  하여간 감화원생들은 소개지로 출발한 다음부터 지칠 줄 모르고 탈주 시도를 반복했으나 매번 악의에 불타는 시골마을 사람들한테 붙잡혀 초주검이 되어 다시 끌려오기를 계속했다.


  감화원생은 마지막 소개지로 가는 도중에 해군 하사관학교 병사들이 길을 가득 메운 것을 목격한다. 이들 가운데 중년의 헌병도 끼어 있다. 하사관학교 병사 한 명이 탈영을 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벌써 “산사냥”을 사흘째 하고 있다. 산사냥이란 건 총기가 별로/거의 없는 농촌사람들이 대신 죽창이나 막대에 대검을 꽂은 무기를 들고 산을 샅샅이 훑으며 창질, 칼질을 해가는 것으로 멧돼지 사냥보다 더 끔찍하다고 한다. 산 사람을 사냥하는 것을 말하는지, 산 속에서 사냥하는 걸 말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예전부터 내려오는 변절자, 탈옥수 체포에 주민들이 동원되었던 것이 발전한 것 아닐까 싶다. 나중에 정말 산사냥의 결과를 읽을 수 있다. 이 탈영한 해군 하사관 학교 병사를 조선인 리(李)가 숨겨주고 있었는데 발각이 나서 산으로 도망갔다가 사냥을 당해 끌려올 때는, 죽창에 찔린 그의 왼쪽 배가 열려 내장이 밖으로 돌출되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건 나중 일이고, 하사관학교 병사들이 소득 없이 철수할 때 감화원생을 이끌고 가는 보호 교관이 헌병 하사관에게 접근해 말을 잘 했는지 그의 트럭에 태워 마지막 최종 목적지인 두메 산골 부근까지 그날 밤 안에 가게 되었다. 이 책이 열한 번째 오에 겐자부로. 감화원생이 내린 곳이 오에의 다른 작품 속에 자주 나오는 자신의 동네 부근인 거 같다. 매우 익숙하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지난번 홍수 때 길이 끊어져 이젠 벌목한 나무 운송용 궤도차를 타고 깊고 깊은 골짜기 건너 저 편 마을이었다. <만옌 원년의 풋볼>을 예로 든다면 그해 민란이 일어나던 경사진 산지역. 골짜기는 <익사>에서 ‘나’의 아버지가 마을을 빠져나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골짜기보다 훨씬 더 깊게 만들어 놓은 거 같다. 최종적으로 도착한 두메산골에서 언덕을 조금 올라간 곳의 경종(tocsin) 망루, 그 오른쪽에 있는 절이 이들의 숙소이다. 도착지에서는 친절하던 대장장이도 이곳에 오자마자 안면을 철회하고 냉정하며 거칠게 변한다. 이곳의 모든 주민들이 감화원생을 경원하는 것이 훤하다.

  마르고 키가 큰 늙은 촌장이 이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소나무 산을 개간하는 것. 만일 도둑질, 방화, 폭력을 하는 녀석은 마을사람들이 죽도록 패줄 것이며, 규율을 어긴 자는 반장을 정해 기억해 두었다가 보고를 하란다. ‘나’는 엉겁결에 반장이 되어버린다. 밤에는 밖에서 문을 닫아 열쇠를 채워버린다. 밤새 불이나 전부 타서 죽거나 말거나.

  다음날 이들이 맡은 첫번째 작업은 동네에 널려 있는 죽은 짐승을 땅에 파묻는 일. 개와 고양이와 죽은 쥐를 들고 냇가로 가보니 그동안 죽은 짐승이 작은 둔덕처럼 쌓여 있다. 오전 내내 땅을 파 이것들을 묻고 나니 점심 때. 밥을 먹고 땅을 다지기로 하고 철수를 했지만 오후가 되도 아무도 이들을 찾아오지 않는다. 저녁이 되고 밤이 되고 새벽이 되자 이들은 동네가 비어 있음을 알아챈다. 짐승들이 죽어나간 것이 전염병이 돌아서였으며, 역병이 사람에게도 옮아 흙집에 죽어가는 여인하고 딸이 있을 뿐, 밤 사이에 모두 피난을 간 거였다. ‘나’는 밤에 이상한 낌새를 느껴 그들이 도망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이들이 이곳을 탈출하는 방법은 궤도를 따라 올라가는 것과 가파른 산을 넘어가는 것, 이렇게 두 가지이지만 괘도 저편엔 교묘하게 차단벽을 세워 벽을 오르려 매달렸다가는 벽과 함께 깊고 깊은 골짜기로 추락할 것이고, 산을 넘어가본들 역병지역에서 온 감화원생을 기다리는 건 또다른 폭력 뿐이었다. 이들은 소년 열다섯 명만 전염병이 나도는 마을에 남겨놓고 그렇게 간 거였다.

  나는 이런 장면은 진짜 처음 볼 뿐더러, 비슷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들이 탈출을 했으면 신고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어린 아이들만 역병지역에 두고 자기들끼리 도망한다는 발상은 우리나라 옛 이야기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정말 오에가 살던 지역에서는 양식, 그냥 사는 방법, 환란에 처했기 때문에 가능한 수단 안쪽에 이런 방법이 들어 있을까? 이들과 협력하고 앞에서 말한 탈영한 해군 하사관 학교 병사를 돌보는 유일한 사람은 조선인 리 말고는 없었다.


  역병의 한 가운데에 떨어진 감화원 원생들 열다섯 명. 이 가운데 미나미와 함께 탈주하다가 잡혀온 어린 소년 하나는 계속 호소하던 복통이 악화되어 일찍 숨을 거두고 남은 열네 명이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보낼까? 그러나 뜻밖에도 이들은 ‘어른’의 감시와 간섭이 없는 산골 외딴 곳에서 유토피아를 만들어낸다. 며칠 못 가서 엉망으로 망가지고 말지만. 읽어보시라. 후회하지 않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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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30 07: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진짜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아름다움… ㅜㅜ

유부만두 2024-01-30 14:21   좋아요 3 | URL
저도요. 진심입니다. 잠자냥님 팔스타프님과 공감하는 데에 더 기쁘고요.

Falstaff 2024-01-30 16:31   좋아요 3 | URL
윽. 지금 오후 네시 반. 취기 돌기 전에 얼른 댓글 달아야 한다는... ㅋㅋㅋ
근데 막상 댓글 달려고 하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좋은 작품이니까,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입죠.

잠자냥 2024-01-30 16:39   좋아요 3 | URL
이미 취하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4-01-30 16:43   좋아요 2 | URL
ㅎㅎㅎ 리뷰에 건배!!!

stella.K 2024-01-30 17: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면 무슨 원예에 관한 책인가 할 텐데 꽤 괜찮은가 봅니다. 저는 이 사람 책 두 권 가지고 있는데 에너벨리에 질려서 못 읽겠던데. 역시 노벨문학상은 영ᆢ하며. 근데 팔님 리뷰 읽으니 혹하네요.

Falstaff 2024-01-30 16:33   좋아요 2 | URL
저는 오에, 이 양반이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랍니다. 당연히 독자에 따라 호오가 있겠지만 다행스럽게 저하고는 딱! 거 뭐냐, 하여튼 뭔가가 맞았는 듯합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4-01-30 13: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도 꼭 읽어야지 했던 책인데 잊고 있었습니다. 커피 주문하면서 같이 주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4-01-30 16:33   좋아요 1 | URL
그러셨군요. ㅎㅎㅎ 틀림없이 좋은 시간이 될 겁니다. 저도 커피 주문해야 하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