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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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의 경비원>을 재미나게 읽어서 이이의 새 책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얼른 읽었는데, 루이스 어드리크, 이이를 좋아하는 독자가 생각보다 많은가 보다. 도서관에 어드리크의 책이 거의 다 있는 걸 보니까. 어드리크는 독일인 아버지와 프랑스-원주민 혼혈 어머니 사이의 일곱 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났다. 루이스의 부모가 노스다코타 주의 가장 오른쪽, 가장 아래쪽에 있는 리치랜드 카운티의 와페턴 시의 인디언 기숙학교 교사로 있어서 작가도 인디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데, 따져보면 혈통의 1/4만 인디언 계이다. 그러나 핏줄보다 자란 환경과 어울린 사람들, 생각하는 방법이 그들과 더 유사하다면 스스로 본인이 인디언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들 조금도 문제될 건 없겠다. 겨우 책 두 권을 읽고 이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만 루이스 어드리크는 윌라 캐더, 윌리엄 포크너, 셔우드 앤더슨, 카슨 매컬러스를 잇는 지방주의 작가처럼 노스다코타를 작중 무대로 삼는 건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작중에 주인공 델핀이 소설책 읽기에 맛을 들이는데, 집중해서 읽는 소설가 중에 포크너와 캐더가 들어 있기도 하다.

  <밤의 경비원>은 미국 정부와 인디언들이 “국가 대 국가”의 계약으로 인감도장 찍은 것을 지키려는 치페와 부족의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은 작가의 아버지처럼 독일계 이민 남성과 20세기 이전에 이민을 온 백인 가정의 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장소는 여전히 노스다코타인데 자리를 조금 올려서 리치랜드와 인접한 북쪽 카스 카운티의 아거스빌Argusville. 아거스빌은 작품에서 소개한대로 도시가 설 이유가 없었음에도 단지 철도가 놓이고 정거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저절로 사람들이 모여 작은 마을을 만든 곳이다. 위키피디아에 나오기를 20세기 말까지는 인구가 150명이 되지 않았다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면소재지보다도 작은 동네였다. 버스정류장이 있고 정류장 앞에 구멍가게 하나, 짜장면집 하나 있는 촌동네 생각하면 딱이다. 지금은 주택 건축 붐이 크게 불어 2020년 기준 인구가 무려 480명이다. 그러나 시대는 1922년부터 1954년까지.


  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 저격수로 참전한 피델리스 발트포겔. 저격수의 본질은 원샷원킬이다. 다만 한 발의 발사를 위하여 그는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는 정물로 있어야 했으며, 드디어 목표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아무 머뭇거림과 선입견과 판단 없이, 숨을 들이마시고 약간 뱉은 상태에서 참고, 맹목적으로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원래는 어울리기 좋아하고 사교성도 있는 청년이었지만 전쟁, 특별히 저격수가 된 이후로 그는 자신의 생명보존을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해 무한히 기다리고, 무한히 인내하는 습관을 들여야 했으며, 이 습관 때문에 적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아군에게도 참으로 재수없는, 정이 안 가는, 보기만 해도 소름 돋는 인간으로 취급 받았다. 하는 일이 오직 생명 제거를 위한 일이라서. 가까이하면 어쩐지 죽음이 그만큼 빨리 올 듯한 느낌. 그에게는 하인리히라는 이름의 전우가 있었다. 그가 피델리스를 두 번 살려주었다. 한 번은 적의 총알이 피델리스의 턱을 관통하고 지나갔을 때, 또 한 번은 정신을 잃고 진흙탕에 엎어져 있을 때 장갑차가 그를 깔고 지나가려 했을 때. 모든 사람이 피델리스를 경원해도 하인리히는 절대 그러지 않았으며 그를 보면 늘 웃음을 지어주었다. 선한 하인리히는 가슴에 건 로켓 속에 든 애인 에바 칼프의 초상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에바와 결혼하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는 전쟁 말기에 퇴각하면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자신을 두 번이나 살려 주었음에도 피델리스는 그를 묻어주지도 못하고 걸음을 돌려야 했다. 일단 살아야 했으니까.

  1918년 11월 말. 전쟁이 끝나고 꼬박 열이틀을 걸어 프랑스 국경에 접한 집에 도착한 피델리스는 며칠 동안 잠에 빠져 있다가 몸을 깨끗이 하고 오일렌슈트라세 17번지에 있는 방치된 느낌의 집을 방문한다. 지금은 피델리스의 주머니에 든 하인리히의 로켓 속 여인 에바 칼프를 찾아. 사랑하는 하인리히가 아닌 그의 전우가 방문한 것으로 단박 불행한 일을 알아챈 만삭의 에바는 정신을 잃고, 피델리스는 며칠 후 하인리히와 약속한 대로 에바에게 청혼을 해 결혼한다. 그녀의 크고 둥근 배에서는 숲속 벌꿀의 달콤한 끝에 남는 쌉싸래한 맛이 났다.


  드디어 1922년이 왔다. 전후 보상금 문제로 자국 화폐를 무한정으로 발행해 불행의 마르크화 시대를 맞이한 도축장인Meisterbutcher 발트포겔 가문은 저격수 출신의 둘째 아들이 제대할 때 가져온 라이플 총을 메고 숲에 들어가 밀렵을 해 잡아온 멧돼지를 발트포겔 씨가 장인솜씨로 유럽에서 제일 맛있는 소시지로 만들어 팔아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그래도 괜찮게 지냈다. 에바의 아들 프란츠가 벌써 세 살이 되었을 때, 루트비히스루에 광장에서 난생 처음 미국의 흰빵을 구경할 수 있었다. 세상에나. 빵이 각이 질 수가 있다니. 독일인이 구운 빵은 언제나 모서리가 둥글다. 그러나 미국인이 만든 빵은 새하얀 색깔에 각이 또렷한 사각형. 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는데 한 마디가 더 들렸다. 이 빵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기계를 통해 무한정 생산하는 것이라나. 아, 미국의 첨단 기계 기술에 넋이 나간 피델리스는 그 자리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뉴욕에 도착한 피델리스가 아는 영어라고는 기차, 기차역, 서쪽, 최고의 소시지, 정육점 주인, 일자리, 돈, 땅 밖에 없었고, 가방엔 약간의 내의와 아버지가 정성들여 만든 유럽 최고의 소시지, 기가 막히게 잘 드는 가업용 칼 여섯 자루와 칼갈이 봉, 표면의 거칠기가 각기 다른 여섯 개의 숫돌, 주머니 속 35센트가 전부였다. 이미 발전할 대로 다 발전한 동부보다 서부에 더 큰 기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애초부터 시애틀로 갈 예정이었던 피델리스는 이제 뉴욕 역에서 가방을 펼쳐놓고 아버지의 소시지를 팔기 시작했다. 가방을 들고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온몸에 위장막을 감고 엎드려 숨을 죽이고 하루 종일, 심하면 몇날 며칠을 꼼짝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에 숙달이 된 피델리스의 놀랄만한 인내심에 뉴욕시민은 놀라 자빠져 그의 소시지를 거의 대부분을 산다. 이때 생각하기를, 나머지는 열차 안에서 팔면 되겠다 싶어 돈이 되는 대로 차표를 끊어 서쪽으로 출발한 피델리스. 그는 얼마 가지 못한 뉴다코타주 아거스빌에서 하차한다. 일단 이곳 정육점에 취직을 해 돈을 벌어 다시 서쪽으로 갈 요량으로. 그러나 생각대로 되면 그게 인생인가? 그는 그곳을 영영 떠나지 못한다. 그것보다 돈을 벌어 시 외곽에 정육점을 차리고, 누나 마리아 테레사와 아내 에바와 (에바의)아들 프란츠를 데려오는 선에서 타협을 한다.


  피델리스가 이후에 마르쿠스와 쌍둥이 에리히와 에밀을 낳아 모두 네 명의 아들을 두는 사이에, 미시시피 상류의 작은 타운인 아거스빌에서 연극공연을 하다 만난 보잘것없는 농장 출신의 억센 폴란드 여자(라고 일단 알아두면 좋을) 델핀 바츠카와 1차대전에 참전하여 몸의 여러 곳에 흉터가 생긴 반 오지브웨족 인디언 시프리언 라자르 커플은 극단에서 독립해 둘이 한 팀으로 균형잡기 쇼를 하면서 생활한다. 커플 이상이 아닌 커플. 시프리언이 전쟁에 나가 이질에 걸려 사내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주장했다. 생전 처음 듣는다. 이질은 한정없이 설사를 하는 병인데 그게 어떻게 생식기 혈관과 연결이 지어지나? 책을 1/5 정도 읽으면 이유가 나온다. 그는 사내 구실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였고, 남자와 동성애를 하는 장면을 하필이면 델핀 바로 앞에서 저질러 버린다. 함께 한 침대에서 자면서도 시프리언은 델핀을 누이처럼 좋아하고, 나중엔 사랑하게 돼 청혼까지 하지만, 델핀은 이를 거절한다. 자꾸 캐나다 매니토바 주의 고어필드에서 철물점 주인과 야밤에 공공장소의 벤치에서 벌인 일이 떠올라서. 그는 지브웨족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아 미국 시민권도, 투표권도 없는 상태였다.

  델핀은 어려서 어머니 마리가 일찍 죽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버지 로이는 돌이킬 수 없는 알코올 중독자라, 학교 공부에 뛰어나 전액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음에도 애당초 진학을 포기한 채 비참한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지역 극단에 들어간 거였다. 이것도 그렇게 알아두자. 1934년, 궁핍했던 시절. 미국의 서민들은 삶의 고단함을 눅여줄 웃음거리가 필요해 델핀과 시프리언은 돈을 제법 벌었다. 그래서 둘은 싸구려 보조 보석 반지를 두 개 사서 나누어 끼고 아거스빌로 귀향길에 오른다. 네군도 단풍나무에 둘러싸인 고립된 농가는 그나마 변두리라 사람의 눈에 띄지 않아 다행이었다.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슈납스에 취한 아버지는 뛰쳐 도망을 쳤고, 집에서는 상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역한 냄새가 풍겼으며, 진짜로 들어가보니 온갖 난장판에 토사물과 바싹 말라버린 사람들의 분뇨가 찌든 악취를 발산했다. 며칠을 청소해도 역한 악취는 사라지지 않아, 결국 냄새의 근원인 마루 밑 식료저장고를 열어보니 그 안엔 잊히지 않을 만큼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들이 바글대는 세 구의 시체가 들어 있었다.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로 환상과 환청과 섬망을 겪는 아버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주인공은 위에서 소개한 피델리스 발트포겔과 델핀 바츠카. 이들이 어떻게 엮이는지, 그건 이야기하지 않겠다. 제목 “정육점 주인들의 노래클럽”에 대하여. 피델리스는 전쟁 때 했던 저격수나 직업인 도살과 정육점 칼잡이 일과 대비되게 매우 고운 리릭 테너의 목소리를 지녔고, 성량도 괜찮아 노래하기를 즐겼다. 독일에서도 정육점 주인들과 도살업자들만으로 구성한 노래클럽이 있어서 미국에 정착한 피델리스는 자리를 잡자마자 정육점 주인들로만 구성한 노래클럽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아거스빌에 정육업, 도살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겨우 두 명. 도무지 한 팀을 꾸릴 수 없어서 모든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합창단을 조직했다. 그리하여 첫 모임은 발트포겔의 도살실에서 열었는데, 천장이 높은 도살실이 의외로 울림이 좋고 널찍하게 퍼져 아주 그만이었다. 참석한 인사들도 고을에서는 막강하게 대출전문 은행가 바리톤 줌브러게 씨와 그의 직원 포틀랜드 채버스, 아거스빌의 폴스타프라고도 불린 한 시절의 셰익스피어 전문 연극인이었던 팔세토(무진장 높은 고음) 음역의 보안관 호크, 고을에 한 명 밖에 없는 의사 하차 싸, 그리고 주인공 델핀 바츠카의 아버지인 술꾼이자 바리톤 로이 씨 등등이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 사건도 난다. 사건들로 이 가운데에서도 비명에 가는 사람이 당연히 생긴다. 그 사이에 독일군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와 달리 미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들도 있고, 독일군으로 참전한 아들도 있고, 아들이 행여나 유대인을 학살하지 않았나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도 있다. 이렇게 1954년까지 두 가족이 사는 모습을 그린 작품.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지만 이런 미국식이면 좋다. 읽다가 울기도 했지 뭐야. 당신도 정말 읽을 생각이면 각오하시라. 눈물 한 방울 정도는 찔끔 할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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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1-12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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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1-12 0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관심 책이라 보관함에 담아두기는 했는데 표지가 좀 ㅋㅋㅋㅋㅋ 이상해서 선뜻 손이 안 갔거든요. 폴스타프를 울리다니 읽어야겠습니다…..근데 그거 소주방울 튄 거 아닌가요?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1-12 07:25   좋아요 1 | URL
열람실에 쐬주 못 가져 들어갑니다. ㅎㅎㅎ
표지 사진 보시면, 백인일 수도 있고, 선주민일 수도 있고... 막 그렇잖아요. 재미납니다.

레삭매냐 2024-01-12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어제 이 책 무너진 제 책탑
정리하다가 발견했어요.

미처 샀는 지도 모르는 그런 책
을 북플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
물론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밤의 경비원>도 읽다 말...

Falstaff 2024-01-12 16:1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어서 읽으셔요. 이 여사님 작품이 재미있더라고요. 눈에 보이면 더 읽을 예정이랍니다.

coolcat329 2024-01-12 1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밤의 경비원은 기억하는데 작가 이름은 이제서야 제 머리에 각인이 되었어요. <밤의 경비원> 부터 읽어봐야 겠습니다. 이번 글 읽으니 엄청 끌리네요~^^
작가 찾아봤는데 분위기있는 미인이십니다.

Falstaff 2024-01-12 16:11   좋아요 1 | URL
옙. 글을 진지하면서도 재미있겠 쓰더라고요. 딱 제 스타일. ㅋㅋㅋ

그레이스 2024-01-12 2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도를 못따라가겠네요.^^

Falstaff 2024-01-13 15: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좀 많이 올리나요? 좀 줄여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