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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6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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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가 시도한 첫 장편소설. 열심히 쓰다가 죽음이 임박하자, 엄숙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았던 카프카는 자신이 쓴 모든 원고를 불살라 버리라고 절친이자 편집자인 막스 브로트에게 유언한다.
질문. 카프카가 진짜로 자기가 쓴 작품이 싹 잊혀지기 바랐을까? 그랬다면 왜 하필이면 출판사 편집인 친구한테 유언을 했을까? 문학에 관심이 없는 형제, 자매, 옆집 아저씨, 배추 장수 기타 등등 5만원짜리 지폐 서너 장만 옆구리 찔러주면 20세기 초반의 가난한 시절엔 난로에다 불이라도 땠을 거 아닌가벼? 뭐 그렇다는 거지 내가 뭘 알고 우기는 건 아니다. 그랬겠지, 그랬겠지.
미완성 장편소설 세 편 가운데 <성>과 <소송>은 읽었고, 어떻게 <아메리카> 또는 <실종자>엔 손이 가지 않아 다음에 읽지, 다음에 읽지, 차일피일하다가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온 김에 읽었다. 이게 우연히 2024년에 처음 올리는 독후감일걸? 하여간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간략하게 요약을 해보자면, <성>과 <소송>은 같은 미완성 작품이라고 해도 중간에 툭 끊어졌다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거지 하나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싶었다. 반면에 <실종자>는 분량과 관계없이, 원고지는 제법 채웠지만, 스토리가 여전히 펼쳐지고 있는 전개의 단계에서 갑자기 막이 내려가는 바람에 거참, 점잖은 체면에 막말 할 수도 없고, 하여간에 내가 여태 읽기를 미룬 것이 이유가 있다, 이렇게 주장해도 별 탈이 없어 보였다.
장편소설 읽다가 만 거 같은 미완성 작품 읽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후지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작품 자체가 별로인 것들을 출판사가 미쳤다고 발간을 하겠느냐고. 최근에 읽은 미완성 작품이 구 체코슬로바키아 작가 야로슬라프 하셰크가 쓴 <훌륭한 병사 슈베이크>이고,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미완성 장편이 토마스 만의 희극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이요, 가장 아쉬운 미완성은 고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이다. 이들 작품이 다 좋다. 슈베르트의 D.759 교향곡이 <미완성>임에도 여전히 절찬리에 연주하는 것도 좋아서 그런 거지 다른 이유는 없는 것과 같다.
열일곱 살 먹은 독일 청년 카를 로스만은 35세 먹은 하녀 요하나 브루머의 꾐에 넘어가 그만 동정을 갈취당하고 만다. 진짜로 이런 일 있다. 내가 안 본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만화가게에서 여주인 김*선씨가 고등학생을 하나 어떻게 한다며? 아휴, 이거 얘기해야 하나? 많고 많은 처 이모부 가운데 좀 예쁘장하게 생긴 막내 처 이모부가 중학생일 때 진짜로 만화가게 아줌마한테 당해서 딱지를 뗐단다. 이런 식으로 (1920년대 나이로 보면) 중년의 요하나에게 동정을 바친 카를 로스만에게 돌아온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요하나의 임신 통보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를의 아빠 로스만 씨는 이미 낳은 아이 야코프의 양육비 부담과 추문을 피하기 위해 부자의 연을 끊고 함부르크를 거쳐 미국으로 쫓아버려, 이민선의 3등칸을 타고 뉴욕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기서 카프카의 전매특허가 나왔다. 아버지에 의한 추방. 정확하게 말하면 아들 추방. K는 국가로부터, 측량사는 성주한테 추방당해 결코 이들을 만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카를 역시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는 것.
그건 그럴 수 있지. 전작이 있으니 놀랄 일은 아니다. 정작 내가 놀랐던 장면은, 17세 아기 아빠 카를이 뉴욕 자유의 여신상을 보더니 여신이 횃불이 아닌 칼을 들고 있다고 보는 장면이었다. 어, 이게 뭐야? 설마 카프카가 자유의 여신상을 몰라서 횃불이 아니고 칼을 들고 우뚝 서 있다고 본 건가? 이거 무슨 메타포나 상징이나 하여간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싶었다. 아, 씨. 프란츠 카프카, 이 양반이 또 작품 시작하자마자 사람 뇌 흔들리게 만들고 말았다.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거였다. 자유와 칼. 무력이 없으면 자유를 유지, 보존할 수 없다는 뜻일까? 잠깐 공산주의도 했던 카프카가 그리 생각했으리라고 보는 건 좀 무리일 텐데. 좋다. 나중에, 언젠가 힌트가 나오겠지. 그러나 책을 덮을 때까지 이 문제를 해결할 힌트는 보이지 않았다. 혹은 발견할 수 없었다. 여간해서 잘 읽지 않는 해설을 보니, 카를이 승선한 배가 여신상 아래를 지나가면 여신이 들고 있는 것이 횃불인지 칼인지 모를 것이고, 그게 카를의 눈에 칼의 손잡이처럼 보였다는 거다. 아이고, 거 참.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들 많다. 그럴 듯하지 않나? 한스 홀바인이 그린 <대사들>을 보면 그림 아래쪽에 극도로 찌그러진 시계가 그려져 있다. 이게 계단참에 걸린 작품이라는데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림을 볼 사람을 위해 부러 그렇게 그렸다는 거다. 그림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째 자유의 여신상 아래를 지나가는 배는 생각하지 못했나 그래. 만일 역자 이재황의 생각이 맞다면(맞는 거 같다) 천재는 아니더라도 영재 정도는 될 거 같다.
이제 뉴욕에 왔으니까, 알렉산드르 바리코의 <노베첸토>에서 보듯이 (반드시 한 명은)누군가가 육지다, 미국이다, 신세계다, 외쳤을 것이고 사람들이 한 편으로 우그르르 모였을 것이고, 드디어 자유의 여신상이 나타났을 것이고 그 아래로 지나갔을 것이니 배 안은 시끌벅적 짐 챙기고, 잃어버린 거 없나 뒤적거리고, 순식간에 남의 물건을 슬쩍 하는 종자들도 있을 것이고, 서로 상륙하더라도 연락은 하고 지나자, 명함교환도 하고 그랬을 터, 젊었다기보다 아직 어린 카를 역시 아빠의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갑판에 나갔다가 그만 아이고, 객실에 우산을 두고 왔네, 이런 이유로 명함을 받은 프리츠 부터바움 씨한테 가방을 맡긴 채 다시 선복에 있는 3등 객실로 내려가 길을 잃고 만다. 프리츠 부터바움 씨는 이 한 장면에 등장하고 사라진다. 이제 독자는 카를 로스만의 성격을 이해할 차례. 오지랖이 대단한 친구다. 길을 잃고 돌아다니다가 당시엔 석탄을 땐 증기선이니 석탄을 보일러에 넣은 화부火夫의 방을 두드려 그의 방에 들어간다. 이 인간이 좀 불평불만자라서 화실보다는 회계과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많을 정도라 루마니아인 일등기관사 슈발 씨가 해고해버릴 예정이다. 사실과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화부의 말만 듣고 열받은 카를은 화부와 함께 회계주임에게 갔다가 그곳에서 선장, 회계주임, 상원의원 야코프 씨를 만나 입에 침을 튄다. 카를에게 이름을 묻는 대나무를 들고 있던 야코프 씨. 알고보니 그는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외삼촌 에드바르트 야코프였던 거다. 야코프, 유대인 아닌가? 하여간 뭐. 그리하여 이것으로 화부, 선장, 회계주임, 기관사는 영원히 사라진다.
야코프 씨의 집 7층에 살게 된 카를. 1층부터 6층까지는 야코프의 사무실인 건물이다. 카를이 말만 하면 거의 다 들어주는 야코프 외삼촌. 말 한 마디에 그랜드 피아노까지 들여왔을 정도. 카를은 새벽 다섯 시 반에 승마학교를 가서 상류사회 필수코스를 익히고, 일곱 시부터는 경영전문대학의 교수한테 영어 교습을 받아 몇 달 만에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한다. 야코프는 유럽에 없는 업종인 일종의 중개운송업을 하는데, 대규모 구매, 저장, 운송, 판매를 하나로 통괄하는 사업으로 미국 각지에 업체를 두는 거대 회사의 회장이다. 30년 전엔 항만 구역의 조그만 점포 하나로 시작을 했지만. 야코프 씨에겐 키 크고 뚱뚱한 친구 두 명이 있었으니 그린 씨와 폴런더 씨. 이들과 만나 내밀한 사업 이야기를 하다가 폴런더 씨가 자기 집에 들러 하루이틀 자고 가라고 권하는 것을 야코프 씨는 반대하고 카를은 그럼에도 좋다고, 꼭 가고 싶다고 해서 하루 밤을 보내기로 하는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 또다시 카프카. 유럽에선 아버지에게 추방당해 미국으로 왔으니, 이제 미국에서도 아버지 비슷한 인간에게 한 번 더 추방을 당해야 할 것. 자기 의견이 무시당한 것에 완전히 기분이 잡친 야코프 씨는 그린 씨를 통해 앞으로 자기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말을 카를에게 전한다. 완전 빈털터리로 내쫓기는 카를. 가장 싼 여인숙의 공동숙소에서 밤을 보낸 카를 앞에 엔지니어를 자칭하는 두 건달이 등장하니 하나는 아일랜드 출신 로빈슨이요, 다른 하나는 프랑스 출신 들라마르슈이다. 이들은 야코프 씨가 장만해준 카를의 옷이 취직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입을 털어 카를의 옷을 팔아 50센트를 건네준 뒤 직장을 찾아 먼 길을 걸어가면서 그나마 남아 있는 카를의 돈을 뜯기 시작한다. 감을 잡은 카를도 당하고만 있을 바보가 아니라 그들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옥시덴털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로 취직한다.
호텔에서 자신을 위하여 최대의 편의를 보아주는 주방장의 도움으로 좀 편히 있나 싶었으나 사건이 생겨 해고당하고, 기어이 다시 로빈슨과 들라마르슈의 손아귀로 넘어가 들라마르슈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이야기는 갑자기 뚝 끊겨버리고, 그만이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이다. 원고지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정리가 된 상태에서 끝나야지 이건 정말 중도무이라 독자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한 번 더 읽어보면 독자가 알아서 정리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더 읽어볼 정성도 없어서 말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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