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타야 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타티야나 톨스타야 지음, 이수연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소비에트 연방에도 “백만장자”가 있었다. 타티야나 톨스타야의 할아버지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그랬다. 1917년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자 혁명에 반대하여 조국을 떠난 귀족의 후예 톨스토이 선생은 놀랍게도 6년 후에 러시아로 돌아가 대단한 특권 계층 대접을 받아 세간에서 “백만장자 작가”라고 했던 거다. 물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과 넓은 의미에서 같은 가문이긴 하지만 이젠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인기도 없고 지명도도 없는 과학소설SF 작가한테 레닌과 스탈린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대접을 했을까? 하여튼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손녀딸이 타티야나 톨스타야다. 1951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출생해 유복하게 자라 좋은 교육을 받은 톨스타야는 1987년 단편소설 <황금 댓돌 위에 앉아>로 데뷔를 했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우리가 아는 많은 러시아 여성 작가들, 빅토리아 토카레바,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같은 이들처럼 망치와 낫의 붉은 기가 내려가는 대신 러시아 삼색기가 모스크바 크렘린에 게양된 1989년 이후였다.

  소비에트 시절에선 여성 작가들이 여성의 독특한 세계를 문자로 만드는데 애로사항이 있었던 거 같다.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하면 뭘 하겠느냐만, 당시 좌파 세계, 진보 세력을 진두지휘했던 소비에트는 엉뚱하게 인민들의 사상마저 통제하려는 가장 골통 우파적이라 할 수 있는 파시즘적 통치를 하는 바람에 여성들이 촉각을 세울 수밖에 없는 이슈들, 예컨대 섹스, “임신, 출산, 육아, 임신중단, 이혼, 경력, 매춘, 강간, 동성애”(역자해설 인용) 같은 것들을 거의 언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성 인권이 출발하는 시점에는 당연히 그간 여성들이 피해를 입었던 사회 전반의 병리현상을 다루어 문제제기를 해야 할 터인데 그걸 발언하지 못하게 하니 러시아 문학판은 마초들의 권력형 유희장 비슷하게 변질되었다. 그리하여 앞에서 언급한 작가들도 거의 다 소설가, 극작가라는 문학 종사자라기보다 언론인, 평론가 같은 비문학 글에 집중하고 있다가, 드디어 러시아라는 동토에 봄바람이 불자마자 원고지를 펼치고 여태 자신들이 참아 왔던 문제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진짜 한 번 읽어 보시라, 유럽이나 동아시아 여성작가와는 또 다른 매우 참신, 독특한 소재와 필체와 스토리를 만날 수 있을 터이니. 남자 작가들은? 그들은 소비에트 시절에 자기 원고를 해외에 빼돌려 그곳에서 출간을 하고 유배를 당하든지 (이민이라는 방식을 통해) 조국과 모국어에서 추방당했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그게 작가의 숙명이란다.


  《톨스타야 단편집》은 “톨스타야의 대표 단편집 《오케르빌 강》에 수록된 단편들 중에서 네 편을 실었다.” 역자 해설 115쪽에 의하면 지만지가 이런 야만스런 짓을 했다, 이거다. 이왕 번역을 하고 책을 출간하려면 한 권을 통째로 해야지 거기에서 달랑 네 편만, 그것도 표제작품도 빼 버리고 책을 내다니, 오랜만에 백수가 큰 맘 먹고 저지른 내돈내산인데 어찌 속이 편할 수 있겠느냐! 짜증 제대로네. 별 두 개 주려다가, 작품이 괜찮아서 참고 참았다.

  이 책에서는 앞 문단에서 이야기한 여성들이 제기하는 사회 병리적 현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자본주의 속에서 살게 된 러시아와 러시아 시민, 사회를 독특한 시각으로 보는 매력이 있다. 제일 앞에 실린 <밤>은 정신지체가 있는 뇌성마비(인 것처럼 보이는 장애)를 가져 엄마의 보호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소년의 불행을, <백지>는 외과수술을 통해 “자존심”과 더불어 세상 사는 데 가장 쓸모없는 “양심” 조직을 절개하고, 수술이 끝나자마자 안면 싹 바꾸는 현대인의 모습을, <새와의 만남>은 소년 페차가 본 어른 세계의 비열함과 슬픔을, <매머드 사냥>은 남자 한 명 잘 만나 팔자 고쳐보려는 젊은 여성의 허상을 그리고 있다. 네 편 다 재미있다. 그러나 해설을 빼고 겨우 112쪽. 이제 본격적으로 읽을 만하면 뚝, 책은 끝난다. 원, 참. 그래도 한 2백쪽 가까이 가줘야 아마존 밀림이 살아 남는 거 아니냐고.

  단편들이라 내용 소개를 더 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래저래 독후감 빨리 쓸 수 있어서 좋긴 하지만 영 찜찜하다.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3-12-18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번역서 중엔 발췌번역이 꽤 있더라고요. 한 번 속은(?) 경험이 있어서 지만지는 책 정보를 잘 살피고 있어요.

Falstaff 2023-12-18 08:35   좋아요 1 | URL
옙. 그나마 다행인 것이 발췌본은 표지에 발췌라고 써 놓았더라고요. 저도 그건 절대 안 읽습니다.

은하수 2023-12-18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전 단편집이 영... 맘에 안찰때가 많아요^^

Falstaff 2023-12-18 08:39   좋아요 0 | URL
아효, 중요 작품을 쏙 빼고 번역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거 말고도 패트릭 화이트가 쓴 빼어난 단편집 <불타버린 사람들>도 중요한 작품을 빼고 번역본을 냈답니다. 그때 화이트가 갑자기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범우사에서 속도전을 하느라고 외국서적 해적판으로 번역해 냈기 때문이었는데, 지만지는 그것도 아니고 거 참 아쉽습니다.

stella.K 2023-12-18 1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는 <톨스타야 단편집>을 완역하라! 완역하라!

이러면 지만지가 좀 볼까요? 욕 먹을 짓이네요.ㅉ 언쩐지 톨스토이를 연상시킨다 했더니 과연 그렇군요.

Falstaff 2023-12-18 16:50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지만지, 간혹 숨어있는 명작을 출간해서 그렇지, 하는 짓은 욕 먹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