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테이블
줄리언 반스 지음, 신재실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

  열한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작품집. 열 번째 읽는 줄리언 반스의 책이며 작가의 단편소설은 처음 감상하는 기회다. 사실 오늘의 독후감은 딱 한 줄이면 다 끝난다. 이렇게.


  “단편까지 재미나게 잘 쓰면 반칙 아냐?”


  내가 단편소설엔 좀 까다롭다. 근데 이 책에 실린 것들, 물론 전부 다 그랬다는 건 아니고, 대부분 어떻게 내 마음에 그리 딱 맞아 떨어지는지 참. 첫 작품부터 그랬다. <이발의 어제와 오늘>.

  이사간 동네에서 처음 이발소를 간 날. 혼자 가서 어떻게 깎아달라고 해야 하는지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믿지 못하는 엄마가 기어이 남자들만의 세상인 이발소까지 따라와서, “머리 끝은 약간 치고 뒤하고 옆은 짧게요.” 주문을 하고, 이발이 끝나 이발사가 “아주머니, 한 번 살펴보시죠.”라면서 작업이 끝났음을 통지하니 재까닥 “아주 멋지네요.”라고 응수했으나, 정작 이발소 문을 나서자마자 아들을 멍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턱 깎인 불쌍한 양 같네.”라고 투덜거리는 장면. 이렇게 시작한다. 그레고리는 이후부터 이발소를 혼자 다니며 벌써 긴 바지를 입는데도 “유년단원이지?”라고 묻는 덜 떨어진 이발사에게 “아닌데요.” “벌써 소년단원인가?” “아닙니다.” “십자군인가? 십자군은 아주 좋은 조직이야. 한 번 고려해봐.” 이 따위 말을 듣기도 하는 사이에 배꼽 아래 털이 나기 시작했고, 이발 중에는 할례를 하지 않으려면 사라센과 싸워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하니 끝까지 오줌을 참아가면서 어느 새 어른이 됐다. 

  이젠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보며 “젠장, 이 꼴이 뭐야.”라고 직접 불만을 하게 됐지만 날 선 면도칼을 쥐고 있는 이발사 앞에서 결코 불평하지는 않았다. 가르마를 어느 쪽으로 타겠느냐 하는 질문엔 “그저 올 백으로 넘겨주세요.” 해 놓고는 마치 소년시절의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듯이 머리를 홱 움직인 다음 이발 가운에서 손을 빼 손가락 빗으로 휙휙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심술도 이젠 그레고리 마음대로다. 어느새 그레고리는 이발사가 동성연애자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지만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이야기하기를 결혼 생활 27년차로 아이들이 둘인데 하나는 다 커서 독립했고, 딸은 아직 집에 있단다. 음. 내 엉덩이를 탐하지는 않겠군. 그러나 이발사는 오히려 그레고리더러 “손님은 결혼할 타입이 아닌 것 같네요.”라고 물어보는 것이 오히려 그레고리를 동성애자로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레고리도 그동안 제법 인생을 알아, 나이든 이발사한테 한 수 가르치기를 “결혼은 겁쟁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모험이지요.” 오냐, 많이 컸다, 많이 컸어.

  세월은 흘러흘러, 그레고리는 머리 깎으러 가기 전에 메니큐어 세트를 갖고 욕실에 들어가 손톱 가위로 수북한 긴 눈썹을 손질하고, 귓구멍에서 솟아오른 불필요한 털에도 가위질을 하고, 의기소침한 기분으로 코를 밀어 올린 다음 콧구멍을 조사하지만 특별히 긴 콧털은 없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 화장용 수건 끄트머리를 적셔 귀 뒷부분을 문질러 닦고, 연골질의 귓바퀴 홈을 썰매 타듯 누비고, 밀랍 같은 귓구멍을 마지막으로 쑤신 후에야 외출복을 입는다. 이젠 이발사한테 가지 않는다. 대신 뭐라? 헤어 스타일리스트? 오후 세 시에 스타일리스트 켈리와 예약을 해 놓고 찾아간 곳이 바넷 헤어. 의자에 앉으면 일단 뒤로 자빠뜨려 놓고 머리를 감긴다. (난 여태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풍경이다.) 차가운 손의 살찐 여자가 “너무 뜨거우세요?” “휴가 중이세요?” “컨디셔너 해드릴까요?” 이렇게 묻는 것도 몇 년 경험해보니 전혀 이상하지 않다. 작가가 고전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반스라서 헤어숍의 스피커엔 류트와 비올의 연주가 흘러나오고(다울랜드 아니겄어?) 드디어 등장한 예약 스타일리스트 켈리는 틀림없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나이를 먹어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인데, 자신의 아랫배와 허벅지 높은 곳, 그러니까 치골 부근, 또는 엉덩이를 그레고리의 어깨와 상박부에 약 오르기 적당한 시간차로 슬쩍 마찰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켈리는 스물일곱 살. 그레고리의 맏딸은 스물다섯. 그리고 딸이 하나 더 있다. 겁쟁이 그레고리가 했던 유일한 모험인 결혼도 벌써 28년을 무난하게 끌어왔다. 그는 벌써 40년 동안이나 머리 손질이 끝난 다음에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안다. “아주 멋집니다.” “훨씬 깔끔하네요.” 또는 “끝내주네요.” 또는 “고맙습니다.” 오늘도 그레고리는 그렇게 대답할 것이다.

  작가가 누구? 줄리언 반스. 단편이라고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서, 기가 막힌 소스를 조금, 아주 조금 뿌리는데, 그게 뭔가 하면, 야한 스냅. 이게 조금만 길어지면 외설스러워질 수도 있고, 기분좋게 끈적일 수도 있고, 독자의 맥동만 쓸데없이 높일 수도 있건만, 이 셰프, 반스는 독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장소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시간에 그러니까 난데없이 찰싹, 가비야운 손바닥으로 독자의 마빡을 토닥이고 지나간다. 정말 순간에 한 방 당한 듯한 느낌. 이 작품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작품마다 곳곳에 도사린 귀여운 장난 또는 딴죽. 거참.


  열 하나의 단편소설이 전부 노인들의 사랑, 섹스, 피폐, 추억(이라는 황량함), 실패한 도전, 그리고 죽음 또는 죽음의 기다림 같은 것이다. 이미 주인공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더 이상 실천할 능력도 되지 않고, 시대가 바라지도 않으며, 그럴 것이라고 추측해 나름대로 행동해 봤자 후배들에게 폐만 끼칠 뿐이다. 《레몬 테이블》에는 <레몬 테이블>이란 제목의 단편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 알았는데, 레몬은 서양에서 죽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럼 레몬 테이블은 죽음의 식탁, 죽음의 진열, 더 좋게 이야기하면 죽음에 가까운 노인들의 모음집이란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집 《레몬 테이블》은 이런 문장을 읽으며 책을 덮는다.


  “나는 문간에 서서, 레몬을 큰 소리로 불렀다.”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3-12-15 0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타티야나 톨스타야, 《톨스타야 단편집》
화요일. 조지 엘리엇, <사일러스 마너>
수요일.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깨어진 항아리>
목요일. 장 콕토, <무서운 아이들>
금요일. 아우구스트 스트랜드베리이, <꿈 연극>

잠자냥 2023-12-15 09:59   좋아요 0 | URL
금요일 전에 <꿈 연극> 읽어둬야겠는데요!

yamoo 2023-12-1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몬 테이블도 재밌었습니다. 이때 나온 반스의 책 중 <메트로폴리탄>이 가장 그저 그랬습니다. 이거 빼놓고 모두 좋았다능!ㅎㅎ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야무 님도 반스 되게 좋아하셔요, 그죠? ㅎㅎㅎ 반갑습니다.

stella.K 2023-12-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절판이네요. 도대체 이 책이 언제 나와서 절판이된건지. ㅠ 한권 인쇄소에 부탁할 수도 없고. ㅉ

Falstaff 2023-12-15 16:24   좋아요 0 | URL
저도 알라딘 헌책방에서 샀어요. 파는 곳이 있을 걸요?

잠자냥 2023-12-15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보다는 젊었을 때(?) 읽었는데 지금 읽으면 더 진하게 다가올 것도 같습니다. ㅎㅎ
단편도 참 잘 쓰죠 이 양반...ㅎㅎ

Falstaff 2023-12-15 16:25   좋아요 0 | URL
옙. 좀 묵은 시절에 읽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