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등 - 허준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44
허준 지음, 권성우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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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작가를 읽기로 하고 서가를 둘러보니 허준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시리즈 44번이라면 근현대 문학사에 작가의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진 인물이었을 텐데, 동의보감을 지은 16~17세기 허준 말고는 아는 바가 도통 없어서, 얼른 빌려 읽은 책. 당연하게 책의 앞날개에 쓰인 허준의 약사에 먼저 눈이 갔다.


  “허준은 19010년 2월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중앙고보 졸업 후 일본 도쿄에서 유학했다. 1934년 호세이 대학 문과를 수료한 뒤 귀국하여 『조선일보』에 <초>, <가을>, <실솔蟋蟀(귀뚜라미)>, <시詩>, <단장>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데뷔했고, 1936년 비평가 백철의 추천으로 『조광』에 <탁류>를 발표하여 소설가로 등단했다. (중략) 1945년 12월 27일 홍명희, 임화, 박태원, 김기림 등과 함께 ‘경성조소문화협회京城朝蘇文化協會’ 창립식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이 주최하는 ‘전국문학가대회’에 참석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소설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첫 소설집 『잔등』을 을유문화사에서 발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 월남하여 잠시 서울에 머물렀고, 1958년 니콜라이 두보프의 <고독>을 번역했다는 것 외에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군. 공산주의자로 전쟁 전에 월북, 침략군과 함께 서울 진주. 1958년 이후 행적 미상. 이러면 내가 이이의 이름을 모르는 건 당연하다. 도무지 배울 수가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남긴 중단편이라고 해봤자 열 편 남짓. 그것도 미완성 작품까지 포함해서. 가만. 이 정도인데 다른 출판사도 아니고 우리 문학이라면 둘째 자리를 줘도 깽판을 칠 악마처럼 거만한 문학과지성사가 자기네 전집에 이름을 올렸다? 얼른 4층 열람실에 올라가 읽기 시작, 그날로 다 읽어버렸다. 살 빠지면 의자에 오래 앉아 있어도 엉덩이에 뾰루지 안 난다. 금방 배겨서, 아파서 그렇지. 다섯 편의 중단편소설, 본문만 240쪽가량, 해설, 연표, 자료 합치면 290쪽.


  윽. 놀래라. 허준의 문장은 길다. 긴 문장을 쓰는 작가들이 노상 그렇듯이 현란하게 달린다. 그러다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가끔 독자로 하여금 읽다가 잠깐 멈춰서 지금 읽는 절passage에서 주어와 술어를 찾느라고 헤매게 만들기도 한다. 게다가 30~40년대 단어와 이북 사투리가 섞여 있으면 독자는 가끔 환장換腸, 창자가 뒤섞여지기도 하니 각오를 해야 할 것. 요즘 젊은 분들은 엄두도 못 낼 한자어까지 불쑥 등장하면 말이지. 가끔. 정말로 가끔. 이런 것만 미리 감안을 하든지 각오를 하고 읽으면, 장담하니, 긴 호흡의 문장을 읽을 때의 구구절절함, 애간장이 녹는 공감과 격통 같은 것에 가슴을 절일 수도 있고, 한 풍경이 눈 앞에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리게 삼삼할 수도 있고, 작가는 6이라고 이야기 했음에도 독자는 아득바득 8이나 9 정도로 들을 각오를 하게 만들기도 한다. 긴 문장이라도 세상의 허튼 긴 문장하고 이런 면에서 차별이 진다. 아주 맛나는 문장과 소묘와 방점과 속을 채운 감정들.

  모두 다섯 편의 중단편을 실었다. 이 가운데 나는 데뷔작인 <탁류>를 인상깊게 읽었다. 물론 대표작은 표제로 쓴 <잔등殘燈>이겠지만 <탁류>가 더 내 마음에 와 닿았다는 데 어쩌랴.

  주인공 현철은 천성이 우울하고 젊음의 비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퇴폐적 낭만 취향의 인물로, 스스로를 무능력하고 인생에 해태懈怠한 사람으로 치부하던 시절에 “만나기도 처음이요, 보기도 처음인 덩실덩실 벌레와 같이 뒹구는 음분한 늙은 창부 무릎 위에 몸과 마음과 돈과 아쉬운 것 없이 다 맡기고, 나를 건져달라고 하던 그것이, 그것이 또 동시에 (내) 결혼을 의미하였던 것”, 즉 한 시절엔 향란이란 이름으로 “총독부 누구누구, 경찰서 누구누구, 변호사 의사 무슨 시장패들 할 것 없이 다 참 쳐주”던 기생이었다가 나이 들어 싸구려 창부로 떨어진 여자를 골라 그날로 사랑을 맺고 결혼을 해버린 터수다 향란의 본명은 그냥 ‘순’이라고만 나온다. 전형적으로 잘못된 결합인데, 신분의 차이를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리자면, 현철은 중산층 이상의 인텔리겐치아, 순이는 세상의 밑바닥 출신이다. 둘이 결혼이라는 것을 “해버린” 후에, 순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있는 집 아드님이 처음엔 그리 혼인이라는 것을 했지만 수치스러운 자신하고는 재산도, 배움도, 가정교육도, 환경도, 생각하는 방식도 완전히 다른 터에, 언젠가는 자기한테 싫증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 게다가 혼인 생활이 언제나 즐거울 수는 없는 법, 심하게 부부싸움을 하기도 할 것인데 함부로 몸을 팔던 자신의 이력이 남편의 입을 통해 한 번은 나오지 않을까 하는 시한폭탄성 조바심을 강박처럼 갖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익힌 밑바닥 생활은 세상의 모든 남자가 전부 자신이 상대로 하던 치들처럼 색을 밝혀 틈만 나면 치마를 들치려 하는 본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파렴치한으로 보게 만들었고, 이 범위 안에 당연히 남편 현철도 포함되리라 단정한다. 그리하여 부부가 세들어 사는 당시 의식수준으로 보면 가장 하층민인 갖바치 집의 고명딸 채숙이, 이제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라도 순이는 채숙이가 여자라는 이유로 심각한 질투를 부린다. 물론 남편이 어린 채숙이하고 손을 잡고 강변에 산보를 가면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그래도 기어이 이사를 가게 할 정도로 강짜를 부리면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지 않을까. 그리하여 새로 이사를 간 셋집에는 이번엔 채숙이 다니는 소학교의 여선생이 하숙을 하고 있어서 순이는 새롭게 복장이 터지기 시작하고, 늘 그렇듯이 우연히 순이로 하여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서 드라마는 점점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뭐 그런 이야기.

  이렇게 작품 이야기를 하는 건 사실 반칙이다. 내용은 그러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졌다. 등장인물의 감정의 움직임. 미세하게 시작하였으나 결국 격동을 치고 마는 감정의 변화와 갈등을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소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오랜만에, 비록 지금 시각으로 보면 낡고 헤졌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어차피 사는 건 고통 속의 몸부림이란 걸 다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결국 폭발해버리고 마는 저 30년대식 아침 드라마. 그게 이렇게도 흥미로울 수 있다니.


  두 번째 작품 <습작실에서>는 도쿄를 무대로 하는 전혀 흥미롭지 않은 조선 유학생 이야기, 세 번째 <잔등>은 허준의 대표작으로 해방이 되고 간도에서 조선으로 귀향하는 한 공산주의자의 여로를 그린 작품, 네 번째 <속습작실에서>도 꽤 재미있었으며, 마지막 <평대저울>은 해방 후 가난한 인텔리겐치아의 생활을 쓴 작품이지만 그리 울림은 없다.

  허준. 작품이 워낙 적어서 이제 더 읽을 건 별로 없겠지만 여태 이이의 작품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도 별나게 생각이 들만큼 좋은 작가 아닌가 싶다. 우리 문화계에 분단이란 것이 얼마나 큰 손실을 초래했는지 아쉬운 바가 작지 않다. 남쪽에 살고 전쟁통에 죽지 않았다면 더 좋은 작품활동을 계속 했을까? 아무래도 그랬을 확률이 훨씬 높겠지. 그래도 자기 신념을 따랐으니 언제 죽어 귀신이 됐는지도 모르는 인생마저 후회는 없었으리라. 그리 생각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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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11-17 06: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커트 보니것, <타이탄의 세이렌>
화요일, 유진 오닐, <애나 크리스티>
목요일, 아르카디,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금요일, 오라시오 키로가,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꼬마요정 2023-11-17 10:32   좋아요 1 | URL
폴스타프 님은 다 계획이 있군요!!!
분단 때문에 우리가 못 읽거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많겠죠ㅠㅠ 전 가끔 북한 쪽 지명이 나오면 저기가 어디 붙어있더라... 한참 생각하곤 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Falstaff 2023-11-17 15:35   좋아요 0 | URL
전쟁 이전에 알던 작가는 거의 다 풀린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전후에 활약하는 작가는 뭐 그렇게 알고 싶지 않고요. 북의 체제에서는 문학이란 자체가 정치의 도구일 뿐인데요 뭘.
분단이 되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훨씬 다양한 장소와 배경과 기타등등을 향유할 수 있었겠지요. 그건 정말 아쉽습니다.

syo 2023-11-17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평가원 9월 모의고사에 한번 출제된 적 있는 작품이더라구요. 허준이라는 소설가가 있다는 걸 문제풀다 알게되었습죠....

Falstaff 2023-11-17 15:32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까? 그건 그거고 싸이오 님, 오랜만입니다! 아직 심통이 나신 걸 보니 여전하신 모양입니다!

stella.K 2023-11-19 1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헙, 문학과지성사가... 악마 같은 출판사인가요?
저는 출판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어서 말입죠.

탁류는 책만식만 썼던 게 아니군요. ㅎ

Falstaff 2023-11-20 04:35   좋아요 1 | URL
그럴 리가요.
문학과지성사는.... 당연히 악마 같지 않은데, 다만 악마같이 거만하다는 것입지요.
제 친구 가운데 가톨릭 신부가 하나 있어요. 그 동무한테 제가 자주 쓰는 말로 ˝너는 천사처럼 순결하고, 악마처럼 거만해.˝ 물론 어느 책에서 본 글입니다. 그게 입에 붙어서 자꾸 쓰게 되네요. ㅋㅋㅋㅋ

stella.K 2023-11-20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어느 책에 나온 말일까요? 그 신부님 인기 많으시겠는데요? 함 뵙고 싶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