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적 친화력 을유세계문학전집 127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장희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실러가 죽은 다음에 갑자기 팍 기력이 떨어져버린 괴테는 나이를 셈해보더니 벌써 환갑을 맞은 늙은이. 오히려 깃펜을 휘날리는 노익장을 과시하여 쓴 소설이 <선택적 친화력>. 생각 잘 했다. 몸을 움직여야 오래 산다. 괴테는 무려 23년을 더 살다 간다. 이 바이마르 공국의 추밀고문관 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은 몇몇 분이 알고 계실 터. 그래도 이렇게 괴테의 새 번역이 나오면 구태여 읽어보는 심사는 뭘까? 혹시 나도 괴테 님을 좋아하게 될 지 몰라서? 아니면 괴테를 싫어하는 이유를 더 보태고 싶어서?

  아니, 그거 말고, 나는 왜 괴테를 싫어할까? 괜히 유명하고 널리 존경받는 작가를 깎아내리고 싶어하는 아마추어의 유치한 허풍일 수도 있겠다. 근데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는 좋아하는데? 그렇다고 막 떠들고 다니는 걸? 젊은 시절에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도 싫고, 노년에 완성한 <파우스트>는 더 싫다. 내가 읽어본 추밀고문관 님의 작품 가운데 어떻게 하나도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지, 나도 안타깝다니까. 이 <선택적 친화력>을 포함해서 말이지. 작품 속에 괴테가 나오는 것 중에 제일 재미있게 읽은 책이 토마스 만이 쓴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일 정도. 다른 작가도 아니고 토마스 만의 책을 “재미있다” 라고 쓰고 있다니까 그래.


  부유한 남작의 응석받이 외동아들 에두아르트는 옆 동네 귀족 아가씨 샤를로테와 어린 시절부터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서 배꼽 밑에 터럭이 수북할 때쯤 되면 당연하게 샤를로테한테 장가들어 살 줄 알았지만, 아빠 남작이 하도 욕심이 많아서 옆의 옆에 있는 동네의 돈이 무지무지하게 많은 중년 과부한테, 싱싱하고 교육 잘 받고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아들을, 드셔보시라고, 은쟁반에 올려 장가보내 버렸다. 갑자기 옆구리가 허전하게 된 샤를로테는 우거지죽상을 하고 있다가 역시 아빠가 가운데 끼어 중매를 드는 바람에 평소 존경은 하지만 결코 사랑하는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던 중년 돌싱과, 에라 나도 시집이나 가버려야겠다, 결혼을 해 어여쁘고 똑똑하고 교만한 딸 루치아네를 낳아 살았다. 물론 중년 돌싱 남편 역시 무지, 무지무지하게 부자인 건 당연하고.

  그런데 이 에두아르트와 샤를로테 두 명이 진짜 은총받은 남녀라서 중년의 과부 홀아비 출신 아내와 남편이 거의 동시에 숟가락을 놔 버린 거다. 세상에 이런 행운아들이 어딨어? 그리하여, 새로 생긴 홀아비와 과부는 인생의 한창 좋은 나이인 30대 중반 정도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이때 샤를로테가 거두어 기르는 죽은 절친의 딸 오틸리에가 있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여자 나이 삼십대 중반이면 이미 원숙한 중년이라 자기 마음은 다음으로 하고 아직도 에두아르트가 자신을 사랑하리라고는 아예 바라지도 않던 샤를로테는 오틸리에를 에두아르트의 두 번째 아내로 들일 심산이었다. 그러나 십여 년 만에 첫사랑 샤를로테를 만난 에두아르트는 눈알이 홱 돌아버려 오직 샤를로테에게 돌진, 결국 둘 다 두번째 결혼에 이른다. 미친 것들. 인생의 첫 결혼은 몰라서 해봤다고 치고, 그 지옥 속으로 또 자진해서 들어가? 안 그랴? (이렇게 쓴 거 마누라한테 들키면 난 세상 하직한다. 좀 걱정된다.)

  가뜩이나 부유한 집안의 딸 아들이었는데 죽은 아내, 남편이 또 어마어마한 유산을 남겼을 터라 이들 금고 안에 쌓인 금덩이 은덩이가 물러 앉아 눌러 붙을 지경. 저 언덕에 높이 솟은 성에 살면서 인생의 황금기를 무위도식하는 (아, 부러워라!) 남자는 자신처럼 일 년의 황금기인 4월을 맞아 수목원에서 접목 작업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자는 성 맞은편 암벽에 짓고 있는 새 집의 부속건물인 정자 공사를 감독하느라 올라가 있다. 딸 루치아네와 양녀 오틸리에는 기숙학교에 보내 성에서는 부부와 부부를 시중하는 하인, 하녀들만 있어 여차하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는데, 이 신혼부부가 하도 깨를 많이 쏟아 기름을 짜 넘쳐 흘러 그랬다는 설도 있다.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인권사상이 알프스를 넘어 바이마르까지 쳐들어올까 두려워한 독일 제국諸國이 프랑스하고 한 바탕 전쟁을 벌일 때 에두아르트와 함께 참전한 대위가 있었는데 이이처럼 지식, 재능, 학식, 솜씨 있는 인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시절은 줄곧 인재를 시기하는 터라, 대위는 바야흐로 우울한 상태에 빠져버려 한 몸 뉠 자리도 찾지 못하고 있어 에두아르트 남작께서 이 동무를 안타까이 여겼다. 대위의 가장 큰 고통은 다방면에 걸쳐 능력과 열정이 있음에도 도무지 할 일을 찾지 못하는 것이었으니 에두아르트는 그를 성으로 불러들여 지금 하고 있는 새집 건축과 인근 토지를 측량하게 하고 후에 농장경영 전반을 맡겨볼 의향이었다.

  하지만 샤를로테가 선뜻 수긍하지 않는다. 극성스런 반대는 아니었으나 신중하게 결정할 일이라는 주장. 어떤 경우라도 사람 사는 일에 3자가 들어오면 문제가 발생하리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샤를로테도 속으로 걱정거리가 있었으니, 진중하고 진실되지만 도무지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의붓딸 오틸리에 때문이었다. 그러나 때를 맞추어 학교로부터 편지가 와서 총명하고 이기적인 루치아네의 극성이 오틸리에를 괴롭히고 있으니 일단 집에 데려갔다가 루치아네가 졸업한 다음에 다시 학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샤를로테한테는 의붓딸이지만 에두아르트 입장에선 완전한 타인이 집에 들어와 살게 되는 것. 그리하여 성에는 부부와 대위, 그리고 오틸리에 이렇게 네 명이 살게 된다.


  18세기 말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또는 내가) 가장 신경 쓰는 건 작품 속에 꼬불쳐 둔 복선을 찾는 일이다. 이 작품 속에서도 많은 복선을 깔아 두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만 소개하자. 샤를로테가 대위의 능력과 열정, 학식에 완전히 만족을 하게 된 이후, 부부가 일종의 화학 현상에 관하여 배운다. 이때 나오는 것이 “선택적 친화력.”

  화학에서 “친화적”이라는 것은 “자연 속의 어떤 것(원소)들이 서로 만나는 순간 금방 서로를 붙잡거나 규정하는 것”이란다. 쉽게 말해 결합하는 현상.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만나 물이 되는 거.

  “선택적”은 “어떤 관계가 다른 관계보다,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선호되는 현상”.

  두 개를 합해 선택적 친화력이라 함은 AB가 CD를 만나 AC와 BD로 변하는 거다. 여기다 샤를로테가 뭐라고 초를 치는가 하면,

  “나는 서로 헤어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두 사람의 긴밀한 결합이 제3의 인물의 우연한 등장에 의해 해체되고. 애초에는 그처럼 아름답게 결합되었던 이들 중 하나가 무기력하게 저 멀리로 내쫓기는 안타까운 경우를 잘 알고 있답니다.”

  답 나왔다. A: 샤를로테, B: 에두아르트, C: 대위, D:오틸리에라고 하면, AB+C+D는 어떤 방식으로 선택적 친화력을 보여줄까? AC와 BD? AC와 B 그리고 D? A와 C와 BD? 아니면 AB와 CD? 이게 제일 바람직하겠지? 세상은 결코 바람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은, 다들 아시고.


  표지 그림은 존 에버릿 밀레이의 <검은 제복의 브라운슈바이크 병사>다. 추밀고문관님이 손수 쓴 <선택적 친화력>을 읽는 것보다 같은 그림을 표지로 한 D.H. 로렌스의 <무지개>를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내가 괜히 추밀고문관, 추밀고문관 한 게 아니다. 2부로 가면 아이고, 독일의 나이 든 관리 아니랄까봐 여기저기서 독자를 가르치려 들어서 많이는 아니고 조금 재수없는 지경까지 간다. 결말 부분으로 가면 모든 독자가 그럴 것이란 건 아니고, 내 경우에 정말로 목불인견,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 수준의 신격화 비슷한 것도 나온다니까. 괴테가 잠깐 노망이 났던 것이 분명하다.


.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3-11-10 0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이정록, 《풋사과의 주름살》
화요일, 잭 케루악, <빅 서>
목요일, 베르톨트 브레히트, <제3 제국의 공포와 참상>
금요일, 허준, 《잔등殘燈》

stella.K 2023-11-10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노망은 잠깐이 아닐 걸요? 시작일지도 모르는ᆢㅋ
독일문학을 재밌게 읽기는 좀 어려운 거 같습니다. 요즘 것은 몰라도. 저도 파우스트, 베르테르 억지로 읽은 기억이납니다. 그래도 왠지 친화력은 그 이름 때문인지 읽어보고 싶었는데 넘기는게 날 거 같네요. ㅋ 저 도표식 문체 존경함다.ㅎ 괴테 할배 작위가 추밀고문관이었군요. 우리나라의 뭐쯤될까요? 문화부장관쯤 되는 건가요? 😂

Falstaff 2023-11-10 16:42   좋아요 1 | URL
18세기, 19세기 독일 소설은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요. 암만해도 19세기까지 소설은 프랑스 소설이.... ㅎㅎㅎ
추밀고문관은 사전에도, 지식백과에도 어떤 역할인지 나오지 않는 신비의 직책인데요, 토마스 만의 작품인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창비세계문학55의 각주 9번인가 하여튼 근방에 보면 ˝군주의 최측근 요직˝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문관‘이니 굳이 장관이라면 그저 무임소 장관,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꼬마요정 2023-11-10 1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깐 노망이 났던 게 틀림없다 ㅋㅋㅋㅋㅋㅋ 책은 리뷰보다 재미없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 저는 그냥 괴테가 좋아서 몇 개 읽었는데 또 다시 생각하면 딱히 이 사람이 왜 좋지 하기도 해요. 나이가 들면서 취향이 바뀌나 봅니다.

Falstaff 2023-11-10 16:43   좋아요 1 | URL
그만큼 결론 부분에 나오는 장면이 심하게 하품난다, 어이없다, 눈이 찌푸려진다, 정도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ㅎㅎㅎ

호시우행 2023-11-10 14: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표현에 빵 터졌습니다.ㅎㅎ 하지만 나이 든다고 다 노망나는 건 아닙니다.ㅠㅠ

Falstaff 2023-11-10 16:54   좋아요 0 | URL
당연하지요. 나이 든다고 다 노망들면 재미없어서 누가 노인이 되려 하겠습니까.
근데 늙어서까지 너무 똘망똘망해 섦은이들 하는 거 하나하나 다 따지고, 시시비비하고, 계산하고, 충고하고.... 그런 것도 보기 덜 좋더라고요. 나이 들수록 침묵의 기술을 익혀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한 발 떨어지는 법도 배우고 말입지요.

호시우행 2023-11-1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명하십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