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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양식집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2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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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의 마지막 소설이라는 거 하나 가지고도 도쿄의 종잇값이 하늘을 찔렀을 듯하다. 일본 문학사상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고별 작품. 굉장하지? 근데 이 책, 나왔다는 거 알았을 때, 뭐라고 마음먹었느냐 하면, 절대 돈 내고 사지는 않겠다, 대신 도서관에 있으면 얼른 빌려 읽겠다. 그래서 빌려 읽었다. 왜냐고? 지금은 손절했지만 한 시절 좋아했던 작가가 있다. 필립 로스. 오에의 <만년양식집>에도 찬조출연해서 오에가 세계적으로 위대한 작가라고 상찬하기도 하는데, 그의 마지막 작품인 <유령 퇴장>은 분명하게, 아니, 아니, 세상에 분명한 게 어디 있어, 그냥 내가 생각하기로, <유령 퇴장>은 뱀의 다리, 사족이었다. 나는 <유령 퇴장>의 독후감에 “이런 책은 돈 받고 팔면 안 되지. 오히려 책 찍어 놓고, 문학 공부하는 후학들이 책을 읽어준다면 대가로 몇 푼 씩 쥐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책은 노작가가 후학들에게, 자기 죽은 다음에 자기 말 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유언 또는 당부의 글이다.”라고 주접을 떤 바 있다. 로스가 고집/아집/자만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자신의 원고를 다 폐기하라고 유언했을까? 천만의 말씀. 그건 다 옛 이야기고, 지금은 판권이 출판사한테 넘어가서 작가가 불사르고 싶어도 어림없을 걸?
오에 겐자부로, 이 고집장이 영감은 다행스럽게 독자들에게 구차한 당부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에도 작품 속의 장면들이 자기 주위의 친분 있는 사람한테 신세진 바가 매우 커서 이젠 사건의 당사자들과는 불가능하고 적어도 그들의 가족, 후손들과 화해를 해야 할, 또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누군가 하면, 작품 속에 적어도 한 번 이상 나와 자살을 했거나, 사고사 했거나, 살인을 당한 후 자살로 위장해 버려진 당사자들의 애인과 아들. 아내 차카시의 오라버니이자 일본의 유명 영화감독인 하나와 고로. 이 양반은 여러 작품 속에서 영화 감독으로 출연해 5층이던가 3층 옥상에서 몸을 던져 상체가 납작하게 펴진 채 죽는다. 요즘에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하는 죽음의 형태이다. 하나와 감독이 쉰 살 먹었을 때 유럽, 구체적으로 베를린에 사는 일본 아가씨와 연애를 했고, 아가씨가 산달이 되자 도쿄에 있던 간호사 동생 치카시한테 해산하는 걸 도와달라고 구조 요청을 해 도와준 일이 있다. 다른 한 명은 기 형兄이라 불리는 열 살 가량 손 위 선배로, 오에의 작품 속에 두 가지 형태로 죽음을 맞는다. 하나는 텐쿠보 저수지에 죽은 채 떠 있는 것을 겐자부로의 여동생 아사가 기 형의 아내 오셋짱과 배를 타고 들어가 기 형이 조성한 저수지 내 큰노송나무 섬에 안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 형이 항문에 이물질을 꽂은 채 목을 매달아 죽은 것으로 연출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당시 20대였던 하나와 감독의 연인 베를린 아가씨는 40대의 시마우라 간호사가 되어 베를린에서 한국인 사업가의 간호를 위해 출장을 와 몇 주 간의 빈 시간을 사용하는 터이고, 기 형의 아들은 살고 있던 로스앤젤레스에서 후쿠시마 원전 폭발의 취재와 자원봉사를 위해 일본에 온 김에 아버지의 죽음에 관하여 자세하게 알고 싶어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오에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애인과 아버지의 죽음이 변주된 것을 절대 기쁘게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기 형의 아들 기 주니어는 아버지가 마치 오에에 의하여 시신훼손을 당한 듯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감정은 일찌감치 풀리지만 그건 전적으로 기 주니어가 사람이 좋아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나 같으면, 가뜩이나 어려서 돌아가는 바람에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을 터, 그런 분께 항문에 뭘 꽂은 채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느니 하는 인간을 곱게 볼 수도 없는 건 물론이고, 쉽게, 그렇게 빨리/쉽게 이해하려고/이해해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을 거 같다.
오에 겐자부로 입장에서는 위에 소개한 두 사람과의 화해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에만큼 자기 가족사를 소설에다 까발린 작가가 있으면 두 명만 대보시라. 만엔 원년의 민란에 참여했던 전력을 가진 증조부부터 시작해서, 시코쿠 숲을 조성한 할아버지,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붉은 가죽 가방 하나를 갖고 귀국했고 이후 홍수가 난 밤 홀로 조각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다 익사한 아버지, 시코쿠 지역의 전래 이야기를 온전하게 전해준 할머니와 현명한 어머니, 여동생 아사, 그리고 만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에 겐자부로(작중 ‘조코 코기토’)가 소설가로 성공할 만큼 작품의 스토리를 구성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모멘트를 가져다 준 아들 히카리(작품 중 ‘아카리’), 틀림없이 애증을 여러 차례 겪었을 아내 차카시, 부모와 발달장애 오빠 사이에서 터무니없이 일찍 철이 들어야 했던 딸 마키까지 직계가족들. 세월이 흘러 뇌 헤르니아로 죽어가는 걸 번히 보면서 그냥 죽도록 내버려둘까, 싶기도 했던 아들 아카리부터 시작해 모든 가족 구성원이, 물론 생활을 위해서이긴 했겠지만,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 조코 코기토의 압제 하에 살았다. 조코는 이들의 부양을 위해 적어도 이름이 나서 원고청탁이 이어지고 비싼 원고료와 인세를 받을 수 있기 전까지는 안 써지는 소설을 쓰기 위하여 최악의 조건에서 최상의 작업환경을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신의 작업을 위해 가족들이 슬슬 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당연시하게 됐고, 나머지 식구들의 불만은 점점 코기토의 행동을 ‘압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식구들 모두 아는 것을 당연히 아버지 코기토 혼자만 몰랐을 것.
이제 나이 들어 어느 새 70대 후반이 된 오에 겐자부로, 조코 코기토는, 책을 읽으며 분위기 상, 자신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가족과 적절한 소통을 통해 화해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게 전제조건인데, 걸음걸음 언제 죽음이 작가에게 들이닥칠 지 모르는 와중에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작품 속 먹이가 되어 온 가족들과 화해를, 더 크게 말하자면 자신이 함부로 사용했던 문학적 초상권 남용에 대하여 사죄하고 용서받기를 원했던 건 아닐까. 그러다가 판이 커지니 기 형과 하나와 감독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고.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할까, 평소에 기회를 찾고 있던 오에에게, 그리고 일본 전체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다.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 지진이 나고, 거대 쓰나미가 덮쳐 수천 명의 인명사고가 난다. 오에는 쓰나미로 인한 인명사고보다 원전 폭발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한 순간에 처리하지 않은 세슘 오염수가 후쿠시마 땅에 쏟아져 사방 30킬로미터까지 접근 금지 조치가 내려졌던 일. 이미 체르노빌과 스리마일 섬에서의 피폭상황을 알고 있던 차에 범 일본적인 반핵운동이 일어난다. 애초부터 반핵운동의 선두에 섰던 오에 겐자부로, 조토 코기토는 노구를 이끌고 반핵, 반 원전 시위에 적극 가담하게 되는데, 그건 조금 나중의 일이고, 지진과 피폭, 세슘 오염된 비가 내리는 대기 등에 관한 코기토와 아카리의 걱정이 작품의 처음과 나중에 등장한다. 아마 <익사>에서 나온 거 같은데, 코기토가 정말로 봤다고 생각하는 또다른 나, 또다른 코기토. 그게 조각배를 타고 떠나는 아버지의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다고 믿는 진짜 코기토는, 저 아이가 아버지를 보살필 거야, 여긴 채 아버지를 가게 두고 집으로 돌아섰듯이, 아카리에게는 또다른 자아 ‘아구이’가 있어서, 세슘 피폭 때문에 하늘에서 캥거루 만한 크기의 아구이가 떨어질 것이며 아구이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자신 뿐이라고 확신한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그리하여 시작과 끝은 반핵, 반원전으로 원자력 없는 세상, 나는 죽어 사라질 것이지만, 우리는 죽지 않을 거라고 매듭을 짓고 있다. 위에서 말한 화해, 용서(콧대 높고 악마처럼 거만한 오에가 결코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겠지만)를 통하여 생명의 연속성을 이어가자는 주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만년양식집>은 조토 코기토의 걱정스러운 집안 사람들만 나누어 볼 생각으로 만든 소책자로 시작한다. 골치 아픈 집구석. 코기토는 한정없이 예민하고 알코올 의존증 전력이 있는 가장, 엄마는 오빠가 자살을 감행해 성공했을 정도의 우울증 가족력이 있으며, 아들은 뇌 헤르니아로 인한 발달장애로 누군가가 수발을 들지 않으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예민한 감각의 중년 남자, 사십대 중후반이 된 딸 마키 역시 가족 구성원답게 우울증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버지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한편 아버지가 쓴 작품의 먹이감이 되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하고 싶은 말도 권위적인 아버지한테 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이제 (작품 속에서) 폭발시킨 듯하다. 여기에 고모 아사까지 포함해서, 차카시-아사-마키 세 명의 여성이 한 팀이 되어 그동안 앙가슴에 쌓이고 쌓인 맺힌 말과, 적어도 하지 못했던 말을 코기토 앞에서 신랄하게 퍼붓는다. 이 대화를 엮어 <만년양식집 플러스 알파>라는, 코기토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네 명이 읽는 가정판 잡지를 만드는데, 만들면 만들었지, 그걸 왜 출간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개라는 말씀. 작가가, 그것도 그리도 자부심, 자만심 강한 오에 겐자부로가 조토 코기토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작품과 등장인물, 차용했던 가족사가 이랬느니, 저랬느니, 뭐하러 이런 말까지 해서 크고 잘 생긴 뱀을 여러 개의 다리가 달린 지네로 만드느냐는 거다. 차라리 오에가 마지막 작품을 포기했더라면 그게 더 좋지 않았을까? 에잇,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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