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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수현 옮김, 해도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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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 깊게 읽은 책 가운데 한 권이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다. 시간이 좀 흘러 디테일한 스토리는 생각나지 않지만 미국 캘리포니아 솔러스의 숲을 파괴하지 말라는 시위 참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로, 예수가 지구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아메리카에서 자라던 오래된 나무들, 진정한 지구의 주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을 각 등장인물들의 굴곡진 삶과 함께 뭉클하게 그린 작품이라고 기억한다. 이어서 읽은 작품이 <갈라테아 2.2>.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데이터 프로세서로 일 한 경력이 있는 리처드 파워스답게 거대한 고등과학 연구소를 배경으로 기계에 감정을 주입하려는 학자 등 인공지능, AI를 통해 기계에 신경망을 형성, 감정을 가진 기계를 만드는 내용이다. <갈라테아 2.2>는 읽으면서 무수하게 쏟아지는 컴퓨터 관련 전문용어가 넘기 힘든 진입 장벽 역할을 해서 그렇지 그것만 극복하면 누구에게나 추천할 만한 참 괜찮은 소설이다.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이하 “새들이”라고 씀>이 내겐 세 번째 읽는 리처드 파워스이며, 이것으로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한 파워스의 작품은 다 읽는다. 책의 주인공 화자 ‘나’, 시어도어 번은 ‘미친개’로 통하던 한 사기꾼의 아들이자, 오수 정화조 청소부로 인생의 첫걸음을 내딛어 열네 살부터 알코올에 의존하는 시절을 시작했다. 잡다하고 작은 범죄와 공부라는 평행세계의 삶을 살던 시어도어, ‘시오’라고 불리던 ‘나’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주정뱅이 견습생이었는데, 미친개와 이혼하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온 엄마네 회사에서 지원하는 장학금을 얻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후 술을 딱 끊어버리고 학업에 정진해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에서 박사를 마치고, 지금은 우주생물학 전공의 태뉴어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아무리 기회의 나라 미국이라 해도 개천에서 용 났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개천에서 날아오른 미국 용은 용이 된 후에 절대 고개를 돌려 자기가 솟구친 개울을 쳐다보지 않는다. 시애틀에서 만난 작지만 행성 같은 여인 얼리사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영위하다가 아들 울새, 로빈을 키워 아홉 살이 됐다. 불행하게도 공장식 사육을 반대하고 동물권을 주장하던 아내/엄마 얼리사는 2년 전에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도로에 불쑥 나타난 주머니쥐를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히 꺾는 바람에 사고가 나 현장에서 즉사해버렸다. 남편 시오와 아들 로빈은 얼리사와의 추억과 상실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시오는 로빈을 데리고 미친개 할아버지 대신 외갓집을 찾아 외조부모, 외삼촌과 이모 내외와 명절을 지내고는 했다. 절대 개천을 쳐다보지 않는다니까.
아홉 살의 로빈은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이 찍힌 아이다. 제이든이 유일한 친구였는데 로빈이 엄마 이야기를 꺼냈고 제이든이 교통사고 이야기를 했으며, 이를 모욕으로 느낀 로빈이 금속 보온병을 집어 제이든의 얼굴을 후려쳐 광대뼈 골절의 부상을 입혔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주로 로빈이 괴롭힘을 당하는 입장이었지만, 로빈은 자기 관심 사항이 아닌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반면, 집중하고 있는 일을 방해받거나 자신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해를 입으면 극도의 히스테리를 나타내는 증세가 있다. 네 명의 전문의가 진단을 했고, 이 가운데 두 명은 아스퍼거, 다른 두 명은 각기 강박장애와 ADHD 의견을 냈다. 로빈의 최대 관심사는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없애지 않는 것이다. 자연히 (아홉 살짜리가)채식주의자이며, 극도의 환경 보호자이며, 생명 종의 멸종을 위해 인류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분히 엄마 얼리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넓은 의미에서 북미대륙의 숲을 보존하기 위해 지상 50미터 상공 위에 텐트를 치고 시위를 벌이는 <오버 스토리> 인물들과 유사점을 보인다.
빠질 수 없는 등장인물이 오래 전 얼리사의 연인이기도 했던 심리학자 마틴 커리어. “디코디드 뉴로피드백”이란 시스템을 탐구하고 있는 학자로 기능성 자기공명 영상 장치인 fMRA에 AI를 연결하여 두뇌를 스캔하고 있었다. 이때 피실험자에게 공포, 놀라움, 비탄, 황홀 같은 이미지를 연상하게 하여 사람마다 특징적인 뇌의 움직임을 읽은 AI가 개인마다 독특한 감정 상태를 파악한다. <새들이>에서 이런 작업을 처음 만난 독자는 조금 낯설 수 있으나 이 아이디어는 <갈라테아 2.2>에서 기계에게 좋은 감정을 주입하기 위하여 하루 몇 시간씩 모차르트를 반복적으로 들려주는 괴짜 박사의 행적과 비슷하다. 설마 커리어 박사가 진행중인 “디코디드 뉴로피드백”이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 이건 작가 리처드 파워스가 화자 ‘나’ 시오의 입을 통해 말하듯 일찍이 SF 소설 2천 권을 독파한 내공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상의 장치이리라. 이 장치를 통해 마틴 커리어 박사는 이미 죽어 몇 년이 지난 엄마의 뇌 스캔을 AI가 해석한 정서, 감정을 그대로 로빈이 습득하게 하여 상당한 시간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잘 조화되어 지내기도 한다.
시각은 시어도어 번 선생의 가족으로 국한하면 싱글파? 아니, 홀아범 시오가 아스퍼거, 강박장애, ADHD 가운데 하나일 로빈과 생활 또는 생존하는 힘겨운 삶을 그린 작품이라 볼 수 있다.
로빈은 어려서부터 잠을 잘 자지 못하고, 한 계절에 몇 번씩 야뇨 증세를 보여 침대를 적셨으며, 소음에 매우 민감하고, 세탁기 위에는 반드시 원숭이 인형이 있어야 하는 등 다양한 것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다. ‘나’를 뺀 사람들은 한 번에 이해하기 힘든 발음으로 이야기하여, 작품 속에 로빈의 대사는 따옴표가 아니라 작은 따옴표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합성섬유가 닿으면 끔찍한 습진이 발병하고, 수시로 발작적 비명을 질러대는 등 사회성이 결여되어 동급생들의 잔인한 험담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야기한 것과 같이 생물종의 항상성에 대단한 관심이 있어 모든 죽어가는 것에 지독한 히스테리를 보여 후반부에 아빠 시오가 운전 중에 다람쥐를 로드 킬 하자마자 마틴 커리아 박사가 상당히 괜찮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치유를 다시 원위치 시켜 버리는 첫 번째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아서, 로빈은 시오에게 홈 스쿨링을 하겠다고 요구하고, 그대로 된다.
홈 스쿨링을 하기 전에 작품 속에서 로빈이 얼마나 적응하지 못하는지를 독자에게 이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작품은 아빠가 아들을 데리고, 십 년 전에 시오와 얼리사가 탐조 여행을 왔던 스모키 산맥에 야영을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천문학자 아빠는 하늘에 빈틈없이 10의 29 제곱 만큼 달려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지능을 가진 외계 생물이 살고 있는 행성이 은하계에 얼마나 많은지, 이런 은하계가 또한 얼마나 많은지, 이야기하며, 드바우 행성과 팔라샤 행성, 펠라고스 행성 등 아빠가 지은 지능생물이 존재하는 별들에 관한 상상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든다. 이렇게 가상의 행성을 꾸며내는 일은 책의 전편을 통해 로빈의 심리를 달래거나, 좋은 쪽으로 고양시키거나 할 때마다 수시로 등장한다. 그러다 결국 학교를 자퇴한 이후에 우주생물학 교수 시어도어 번 선생은 커리큘럼을 교육청에 제출하고 직접 아들을 교육시키며, 로빈의 의사결정을 실행할 수 있게 배경을 만들어주는 등 헌신을 하느라 종신교수 직을 취소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로빈에 대하여 한 마디. 일찍이 엄마 얼리사는 죽기 전에 남편 시오한테 로빈이 나이는 어리지만 속에 완전한 성인이 들어 있는 것 같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이 비슷한 언급을 하면, 그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십중팔구다. 마치 소설 속 예언자나 무당의 말이 언제나 들어맞는 것처럼. 파워스의 원작이 그런지, 번역을 하면서 역자 이수현이 아동이 쓰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로빈은 행동이나 말이 절대 아홉 살, 열 살짜리가 아니다. 몇 단계의 과정을 거친 제대로 익은 성인만이 생각하고, 제안하고, 발언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을 쉽게 해치워버린다. 본문에도 여러 차례 나오는 것처럼 로빈의 성향을 가진 아이들 가운데 소수는 특정 부분의 천재를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걸 무슨 “스펙트럼”이라 하는 모양인데, 로빈 역시 이 범주에 든다고 여길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너무 자주 그러면, 좀 징그럽다.
이렇게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 내내 아빠 시오가 불쌍했다. 물론 미국식 규범에 따른 창작이어서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오직 아들 로빈. 아이를 위한 인생. 실제와 달리 선거에 불복한 대통령이 3개월 후에 다시 시행한 대선을 통해 재선에 성공한 후, 자신을 비롯한 모든 천문학자, 외계생물학자들의 꿈이었던 프로젝트 예산이 거부당하는 불행이 닥치는 와중에도, 자신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란 행성이 아니라 아내 얼리사, 아들 로빈이라는 각기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었음을 확인해야 하는 외로움의 발견. 그렇게 살지 말아라, 말아라. 너를 위해 살기도 해라.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시오에게 속삭였지만 그는 이미 죽은 얼리사, 그리고 로빈을 끝내 놓지 못한다. 홀아범 시오가 불쌍했다. 미국식 가족주의의 끝장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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