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무, 그 밖의 다양한 사건사고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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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는 아프리카 대륙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 동쪽, 인도양의 서쪽에 솟은 작은 섬인 모리셔스 국적도 가지고 있는 이중국적자이다. 혈통적으로는 틀림없는 프랑스인이지만 아버지는 영국과 모리셔스 국적을, 어머니는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다. 조금 복잡한 내력을 지닌 작가인데, 이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주의 다툼과 모리셔스의 독립으로 인한 일종의 부작용이었다. 르 클레지오가 자신의 삶에 관하여 자전적인 소설을 써서 이걸 상세하게 밝힌 책도 있다. <아프리카인>. 그를 이해하고 싶으면 읽어보시는 것이 좋다. 프랑스인이라기보다 세계인, 이중에서도 비 유럽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누가 알까? 실제로 내가 읽은 여덟 권의 르 클레지오의 작품 모두가 아프리카나 아프리카와 매우 비슷한 환경이 무대이기도 하다.


  2년 만에, 그리고 처음 읽는 르 클레지오의 단편집이다. 《원무, 그 밖의 다양한 사건사고》 그러니까 원무, 독일말로 <라이겐>, 프랑스말로 <La ronde>를 뜻하는 원형을 이루면서 추는 춤의 제목이 사건사고와 연결이 된다. 그럼 르 클레지오가 말하는 “원무”가 무엇일까? 설마 르 클레지오의 책을 읽으면서 소규모 관현악 편성에 맞추어 연미복과 드레스를 차려 입은 귀족들의 무도회를 연상하시는 건 아니겠지? 책에 나오는 원무는 아직 소녀 티를 못 벗은 빨강머리 티티와 한 달 만 더 있으면 열일곱 살이 되는 아가씨 마르틴이 만드는 일종의 질주다. 티티는 자신의 모터 사이클을 가지고, 마르틴은 티티의 오빠가 빌려준 이탈리아제 모터 사이클 육중한 모토구찌를 타고 질주한다. 작가의 대표작인 <황금 물고기>의 주인공 라일라 또는 라이라가 어두운 지하 생활하는 장면이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마르틴은 천둥 같은 폭발음을 내며 도시를 누비면서 푸른 정장을 입은 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여성을 오늘의 먹이로 꼽는다. 티티와 마르틴, 두 명의 소녀가 운전하는 모터 사이클의 원무는 리베르테로 거리에서 끝을 맺고 이제는 직진. 첫 번째 오토바이가 속력을 늦추지 않은 채 인도 위로 올라가 파란 옷의 여인에게 다가가고, 여인의 눈은 배수로 위를 폭주해 달려오는 마르틴의 시선과 약 백분의 일 초가량 머무르며, 이어서 텅 빈 거리에는 고통과 경악의 비명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는데, 검은 핸드백을 움켜쥔 마르틴의 손은 땀으로 흥건해 있었다. 이게 르 클레지오가 말하는 원무다. 원무, 하고 원무 다음에 오는 쉼표에 씌어질 “그 밖의 다양한 사건사고”가 이제는 이어지시지? 이렇게 원무는 벌어진다. 그러나 한 번 시작한 원무는 반드시 멈춰야 하는 법. 마르틴의 원무가 어떻게 멈추어지는 지는 직접 확인하시라.


  두 번째 작품 <몰록>은 읽으면서 계속 긴장하게 되는 작품이다. 위키피디아에는 ‘몰록’을 “고대 근동의 신으로 소의 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어린아이를 불태워 바치는 인신공양 제의가 행해”졌으며 신명기와 레위기에 언급되었단다. 주목할 것은 몰록이라는 신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베풀 선행의 대가로 어린아이의 생명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무대는 트레일러 주택이다. 리아나와 시몽이 살고 있었다. 전에 시몽이 나가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와 이름을 그냥 무심하게 ‘닉’이라고 지어주었다. 강아지일 때는 그저 귀엽기만 하더니 점점 크고 용맹하게 자라 이젠 늑대개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동안 리아나는 시몽의 아이를 임신해 어느덧 막달이 다 찼고, 시몽은 트레일러를 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모기가 들어올까봐 방충망을 설치하지 않은 창문조차 열어놓지 못하는 리아나와 늑대개 닉은 트레일러의 철제 벽을 사정없이 내리 쬐는 태양볕 때문에 마치 그대로 증발할 것 같다. 그럼에도 리아나는 금테안경을 쓴 사회복지사가 제안하는 구제 사항을 완곡하게 거절한다. 왜 거절할까? 무정한 시몽이 적어도 출산 전에는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르 클레지오는 리아나가 버티는 이유를 설명해줄 정도의 친절하지는 않다. 밤이 되면 리아나는 트레일러의 문을 열고 닉을 내보내주고, 닉은 주변의 농장을 돌아다니며 닭이니, 토끼, 거위 등을 사냥해 포식한 채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에 다시 돌아온다. 그러다 드디어 리아나는 오직 혼자, 아니 닉과 둘이 있는 트레일러에서 아이를 출산한다. 태반을 꺼내고 탯줄을 끊고, 젖을 먹인다. 점점 햇빛이 강해지는 날 속에서.

  노란 눈의 늑대개는 리아나와 아기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출산과 출산 후의 탈진으로 리아나는 닉의 밤사냥을 위해 밤에 트레일러의 문을 열어주는 것을 며칠 동안 생각하지도 못했다. 트레일러의 모든 것은 스파크에 얻어맞아 마비된 것 같고, 늑대개는 동공이 오그라든 노란 눈으로 미동도 않고 앞만 똑바로 노려보고 있다. 닉이 맡는 갓난아기의 냄새는 아주 감미롭다. 트레일러 내부를 냄새가 가득 채운다. 늑대개는 그 냄새를 더 잘 맡기 위해 힘줄 하나하나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러다가 허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허기는 아기 엄마 리아나에게도 찾아와서 리아나는 트레일러를 열고, 닉과 아기를 남겨놓은 채 절룩이면서 고속도로 옆의 편의점으로 걸어간다.

  으시시하시지? 너무 긴장하지는 마시라. 작가 르 클레지오가 설마 엽기 잔혹극을 쓰기야 했겠는가?


  르 클레지오가 늘 관심을 두는 것은 사회의 비주류, 이 가운데서도 청(소)년들, 젊은 계층의 불행과 방황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들의 불행과 방황이 필연적으로 동반할 수밖에 없는 비행을 대단히 건조하고, 담백하고, 그래서 삭막하고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묘사한다. 위에 예를 든 것 말고도, 감옥 혹은 군대에서 탈주하여 프랑스 국경을 넘어 도망했으나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탈주자>, 거리를 배회하다가 여러 명의 불량배에게 윤간을 당하는 소녀 크리스틴 이야기인 <아리안>, 한 시절 너무도 아름다웠던 집을 개발이란 폭군 앞에서 지켜나가려 안타까운 안간힘을 쓰는 <오로르 빌라>의 늙은 여주인 등을 르 클레지오 특유의 건조하고 담백한 문장으로 조근조근 이야기한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에 내가 매혹당하는 것은, 그의 시선이 거의 약자에게 가 있다는 것과, 약자들이 언제나 선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 그러나 그들이 힘도 없고 돈도 없고, 배운 것도 없으며, 착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주 악을 행할지언정 작가는 기본적으로 그들 편에 서 있고자 한다는 것 때문이다. 심지어 그저 한 번 그래 보는 것 같지도 않다. 데뷔작 <조서>부터 시작해 내가 읽은 작품 모두,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소외와 이탈 중인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래도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의 독특한 글, 문법이 있었기에 꾸준하게 그를 찾는 독자가 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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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9-08 05: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화요일, 아리엘 도르프만 <죽음과 소녀>
목요일, 루이지 피란델로 <산의 거인족>
금요일, 오에 겐자부로 <홍수는 내 영혼에 이르고>

hnine 2023-09-08 08: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난해하네요 ㅠㅠ
처음에 모리셔스라는 나라 이름을 들었을때 제가 말레이시아를 잘못 들었나 했었어요. 그런 나라가 있는지도 몰랐을때.
르 클레지오가 이곳 국적도 가지고 있었군요.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하지만 한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며 머물렀던 작가라서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데, 정작 작품은 한권도 읽은게 없네요.

Falstaff 2023-09-08 09:5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조서>나 <열병> 같이 난해하지 않습니다. 잘 읽힙니다. ^^
모리셔스가 영국령이었거든요. 그래서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 영국, 모리셔스 세 나라 국적으로 다 가지고 있었다가, 아마 영국 국적은 포기했다나 그렇지요? 영어도 프랑스어 만큼 쓰는데, 영국의 식민지정책에 불만을 갖게 되어 프랑스어로 작품활동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한 건 아닙니다.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9-08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르클레지오도 풀네임에 귀스티브가 있군요 ㅋㅋㅋ저두 한 권도 안 본 작가인데 역시나 저희 엄마가 떠도는 별이랑 우연 읽고 갖춰두신 기억은 있구요 ㅋㅋㅋ몰록은 얼마 전에 다시 본 반지의 제왕에도 나오더라구요 간달프랑 싸워서 간달프가 이김! 골백작님 수염 간달프보다는 짧죠?!?!

Falstaff 2023-09-08 09:58   좋아요 1 | URL
옙. 몰록 쓰면서 반지제왕 얘기도 할까 했습죠.
제 수염은.... 지금 하나 뽑아 보니까, 앗 따거워, 약 1.8cm 정도입니다. ㅎ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9-08 10:29   좋아요 1 | URL
20mm아니고 18mm라 하심은... 잘 알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yamoo 2023-09-08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르 클레이오...예전 직장 다닐 때 이 양반 전공한 친구가 있어서 몇 권을 추천 받았습니다. 첫 권이 아마 <홍수>였나 그랬을 겁니다. 대표작인 <황금물고기>를 읽으라고 했는데, 그냥 홍수가 재밌을 거 같아서 읽었습니다. 결과는 50페이지를 못 넘기고 덮었습니다. 재미가 없더라구요. <조서>도 읽다 말았고...책은 7권인가 있는데, 못 읽겠더라구요. 이동진이 소설은 재밌어야 하는데 지루하면 왜 읽느냐고 말하더군요. 음..맞는 말 같아요. 재미가 없더라도 읽는 동인이 있어야 하는데 홍수와 조서는 그렇지 않았나봅니다. 그래서 르 클레니조는 제게서 멀어져만 갔어요..ㅎㅎ

Falstaff 2023-09-08 16:09   좋아요 0 | URL
<조서>는 저도 읽느라 아주 혼을 뺐습니다. ㅎㅎㅎ
<홍수> 읽은 거 같은데 읽었다는 자국이 없네요. 안 읽고 읽은 줄 아는 걸까 저도 궁금합니다. <황금 물고기>는 괜찮아요. 시도해보셔요! 제가 다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