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딕 이야기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4
엘리자베스 개스켈 지음, 박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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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개스켈을 읽기 시작한 건 얼마 안 된다. 2015년 여름이었으니 딱 8년 전이다. <남과 북>을 읽었는데, 빅토리아 시대에도 이런 ‘여류’ 작가가 있었어? 놀랐던 적이 있다. 과학과 산업과 무엇보다 자본의 세기, 19세기에 부르주아 계급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속에서 가난한 공장 직공들의 저항을 바라보는 시선이 놀랍도록 따뜻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에게 직원들의 복지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아내.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읽었다. 잉글랜드의 농업중심인 남부와 공업지역인 북부, 자본과 노동, 인권, 노동자 복지 등등, <남과 북> 하나만 가지고 이야기하면 조지 엘리엇 보다 더 재미있었다. 요새는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북과 남>이란 제목으로 새로 나왔다. 이후 <크랜포드>도 읽었고 그게 재미 있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읽기는 했지만 지금 기억하는 건 별로 없다. 어쨌든 엘리자베스 클레그헌 개스켈의 책은 눈에 보이면 읽으려고 한다. 《고딕 이야기》는 동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 한 달 만에 받아 뚝뚝 읽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시리즈에서 낸 개스켈의 《회색 여인》하고 겹치는 작품(“늙은 보모 이야기”)이 있고, 마녀와 유령이 등장하는 플롯(“빈자 클라라 수녀회”)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 은행나무 에세의 개스켈과 휴머니스트 캐스켈, 두 권을 다 읽으면 좋겠지만 그건 돈과 시간이 많으면 그렇게 하셔도, 아니면 두 권을 각기 좌우 양편에 놓고 왼 손바닥에다 침을 탁 뱉은 다음에 오른 손가락으로 냅다 쳐서 침이 튀는 방향에 놓인 책을 고르시는 것도 현명하겠…….지?


​  다음은 역자 박찬원에 관하여. 박찬원은 좋은 교육과정을 밟은 후 지금은 전문 역자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나라 중견 역자다. 나도 이 양반의 번역서 꽤나 읽었다. 재미있게 읽은 순서로 치면 두 번째 자리에 가져다 놔도 고맙지 않을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부터 시작해 <지킬 박사와 하이드>, <벤자민의 시계…>, <펠리시아의 여정>, <아가씨와 철학자> 등등. 이렇게 꼽아보니 번역에 관해 내가 까탈을 잡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근데 《고딕 이야기》는 아니다. 왜 한자어를 쓸까? 자신이 한자어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쓰니 문장 속에 인용하기엔 엉뚱한 단어를 고를 수밖에. 난공불락하고 또 뭐가 있었더라, 하나가 더 있었다. 또, 사실 역자에게 이런 말을 하면 너무 가혹할 수 있지만, 여태 불만 없이 읽은 역자라서 애정을 갖고 얘기한다고 믿어주시면 좋겠는 바, 비문이 많다. 이이의 우리말 수준도 상당하다. 그럼에도 발생하는 비문은, 독자가 읽으면서 뭔가 이상한데 하여튼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다, 라고 느끼게 되기 때문에 더 해롭다. 개스켈의 문장은 복문이 많다. 그리하여 크게 주어와 술어를 찾을 수 있지만, 문장 안에 든 절節이 비문일 경우엔 대책이 없다. 예를 들기 위하여 책을 다시 읽지는 않겠다. 같은 문장을 몇 번 확인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정도에서 끝내겠다. 역자를 포함해 글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비문을 발생시킨다. 이건 숙명이다. 그러면 문제는? 퇴고와 출판사의 칼 같은 교정작업. 나는 역자의 실력이 아닌, 이 “퇴고와 교정”에 시비를 걸고 있는 중이다.


​  모두 일곱 편의 단편과 중편을 담고 있는 책. 전부 다 고딕 이야기. 고딕. “중세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공포와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는 유럽 낭만주의 소설 양식의 하나.”라고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나와 있다. 계속 설명을 하기를, “고딕소설들은 잔인하고 기괴한 이야기를 통해 신비한 느낌과 소름끼치는 공포감을 유발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지금 시대도 고딕 소설은 쓰이고 있다. 나는 고딕, 하면 저절로 앤젤러 카터를 떠올리는데, 이이 외에도 카슨 매컬러스, 구스타프 마이링크(이 양반은 여기 끼기에 너무 올드한가?), 그리고 최제훈 같은 이도 고딕하고 관련이 있겠다. 나는 작년 봄에 휴머니스트와 은행나무에서 한 방에 두 권의 엘리자베스 개스켈의 책을 내놓았고, 그것들이 또 모두 고딕 중단편이란 걸 알고, 어떻게 개스켈 같은 이가 고딕 소설을 썼는지 한 편으로는 의아해 하고, 한 편으론 흥미로웠으며, 또 한 편으론 조금 실망도 했다. 지금은? 아니다. 개스켈의 고딕도 보통 고딕이 아닌 것을 확인했다.

  고딕 소설의 구분법. 책을 읽다가 오소소해지는 느낌. 가족들 다 잠든 한밤이 아니더라도, 가을바람 스산한 그믐밤이 아니더라도, 한 여름 대낮에 고딕 소설을 읽으면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끼치면 그건 일류 고딕이다. 한밤이라면 갑자기 뒤통수가 뻣뻣해져서 혹시 뒷벽 창문에서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는 거 아닌가 싶어, 비록 7층 아파트일지라도, 고개를 돌려 컴컴한 창문을 힐끗 쳐다보게 만들면 특급이다. 거기다 적절한 수준의 에로티즘까지 소스로 뿌려주시면, 환상이지 뭐. 그러나 일단 침을 닦으시라. 개스켈의 작품에서 에로티즘을 바라는 건 벼락맞아 죽은 살구나무에 꽃 피길 기다리는 것하고 비슷할 터이니.


​  엘리자베스 크래그헌 개스켈은 19세기 사람이다. 그리하여 이 책에 나오는 여러가지 상황이 예상 외로 어디선가 본 듯한 구성일 확률이 높다. 예컨데, 네댓 살 정도에 갑자기 조실부모한 로저먼드 아기씨가 보모와 함께 후견인인 아기씨의 삼촌인 퍼니벌 경의 대저택으로 가서 살게 됐다고 치자. 저택엔 입구에 잡초 하나 없고 건물을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도, 나무도 없이 황량한 저택인데, 저택의 주인인 퍼니벌 경은 거의 언제나 여행을 떠난 상태로 여든이 멀지 않은, 마르고 키가 크고 청각을 거의 상실해 나팔형 보청기를 사용하는 퍼니벌 부인이, 원래 하녀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늙은 부인의 오래된 친구로 늘 옆에 있는 냉정하고 무감정한 스파크 부인이 저택을 지배하고 있다. 저택은 동관, 서관, 북관이 긴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어서 어린 로저먼드 아가씨는 자유롭게 뛰놀 수 있다. 다만 동관 만 빼고.

  왜 동관을 빼? 고딕 소설에선 당연한 거다.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런 곳이니까. 곧이어, 아니면 뜸을 잔뜩 들인 다음에 결정적으로 파국이나 반전이 그곳에서 시작할 터이니. 많이 본 것 같다. 어려서부터 질리게 본 디즈니 만화에서. 또 숱한 영화를 통해.

  그런데 재미있다. 이 내용이 <늙은 보모 이야기>이고, 이것 말고 <빈자 클라라 수녀회>, <그리피스 가문의 저주>도 그렇다. 일곱 작품이 실렸다. 일곱 개 다 좋기를, 설마, 바라시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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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7-22 0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이렇게 갑자기 끝내신다구요? 좀 더 써주시지...열라 읽다 휙 뺏긴 느낌..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다는 아녀도 아무튼 재밌단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편안한 주말 되세요.

Falstaff 2023-07-22 13:2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렇게 중간에 뚝 끊어야지 읽는 분들이 궁금하셔서라도 책을 읽어보시지 않을까 싶거든요.

잠자냥 2023-07-22 0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지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7-22 13:29   좋아요 1 | URL
귀신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3-07-23 2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고딕소설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장르여서...!

Falstaff 2023-07-23 21:01   좋아요 1 | URL
넵. 고딕은 여차하면 눈에 차지 않아서 오히려 쓰기가 더 힘들 거 같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