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 암실문고
브라이언 무어 지음, 고유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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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이언 무어가 누군데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건가 싶었다. 1921년에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의 ‘유복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라고 한다. 한 평생 글을 쓰면서도 아쉽지 않은 살림을 살다가 갔다. 부커 상에 세 번 후보로 올라 미역국만 시원하게 자셨다. 벨파스트 태생. 어쩔 수 없이 북아일랜드 독립과 관련한 엘리자베스 2세 군대의 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지역인데,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이 1950년대라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택시 드라이버 한 명만 빼고) 가톨릭 교도들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독자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바, 한숨 지난 다음에 읽으려 했건만 난데없이 도서관 신규 구입도서 테이블에 놓여 있는 바람에 넙죽 읽게 됐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책의 스토리에 관해서는 일부러라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작가가 벨파스트 사람이고 무대도 벨파스트라 해서, 최근에 이 지역을 무대로 한 괜찮은 작품인 애나 번스의 <밀크 맨>을 떠올렸는데, 완전히 핀트를 잘 못 찾았다.


​  읽기 괴로웠다. 사실 독후감을 쓰기도 쉽지 않다.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주인공 주디스 헌만큼은 아니더라도 약한 의존증 증상이 있는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끙끙거렸다.

  제목이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이지만 이렇게 바꿔도 괜찮을 거 같다. <주디스 헌의 드러운 팔자>. 기질적으로 우울증을 타고난 사람도 있지만 많은 환자들은 살면서 고립된 삶을 거치는 동안 우울증에 빠지는 경우도 많다. 작품을 읽기 시작하면서, 주디스가 거울을 보며 거울에 비친 자신과 대화를 하고, 대화 속에 특정 상황을 현실에서는 비록 완벽하게 불가능할지라도 자기 뜻대로 전개하는 것을 읽으며, 안타깝게도 주디스가 우울증 증상이 있다고 넘겨짚을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이 아니라면 약한 멘탈 디스오더 같은 것이라도.

  태어난 지 몇 년 되지 않아 갑자기 부모가 다 세상을 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룰 꿈을 포기하지 않은 이모네 집에 들어가 유소년 시대를 보내고,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를 졸업한 후,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독립을 하기 위해, 이 때가 1930년대였을 텐데, 당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봤자 타자수나 속기사밖에 없어서 열심히 타자와 속기를 배워 일자리를 얻기에 이른다. 이때 인연을 맺은 것이, 아, 인연이라 했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 마시라, 두 남자와 한 여자로, 두 남자 다 다른 여자와 결혼했는데, 한 명은 타지로 갔고, 남은 하나가 바로 이때의 의리를 지켜 나머지 세월을 매주 일요일이면 헌 양을 집에 초대해 티 타임을 갖는 오닐 교수다.

  이제 사회인으로 생활을 시작할 찰나, 여태까지 자신을 키워준 다르시 이모가 뇌졸중을 맞고 만다. 뇌졸중이라는 것이 당시만 해도 3일, 석 달, 삼 년, 구 년이란 공식이 있어서, 3일 안에 죽지 않으면 석 달, 석 달 만에 죽지 않으면 3년 가고, 석 달부터 벌써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법인데 삼 년 동안에도 죽지 않으면 9년을 간다는 고질병이었다. 9년을 가면? 그냥 곱게 가나? 집안의 재산이란 재산은 몽땅, 싹, 싹도 싹 나름이지 완벽하게 싸~악 말아먹고 가버리는 거였다. 여기에 현대의학의 도움을 아주 조금 받으면 20년도 넘게 간다니까. 집안 다 말아먹고도 식구들까지 뿔뿔이 흩어버린다는 게 뇌졸중이었다. 그런데 주디스 평생의 은인일 수도 있는 다르시 이모는 여기에다 치매까지 겹쳐 버려 어떤 간병인도 환자를 볼 생각을 하지 않는 바람에 주디스는 나이가 꽉 차도록 집 밖 외출도 못하고 벨파스트 시, 리스번 가의 이모네 집에서 좋은 시절을 싹, 싸~악 말아먹었다. 이때 타자와 속기를 배울 당시 에디 마리넌, ‘에디’라고 헷갈리지 마시라, 여자다 여자, 에디와 어울려 젊은 여성들의 호기심으로 와인부터 시작해 위스키까지 제법 술 맛도 보고 그랬었다.

  하여간 세월이 흘렀더니 오래 오래 욕창 앓아가며 누워 있던 이모가 드디어 모진 숨을 거두었고, 변호사가 다르시 이모의 재산 상태를 점검해보니 위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싹, 싸~악 말아먹어버려, 거의 전 재산이 증발을 해버렸다. 완전히 말라버린 건 아니었던지, 이 와중에도 주디스도 조금의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연 100 파운드. 근데 물가가 만만찮은 벨파스트에서 1년에 100 파운드로 살아지나? 죽으라는 법이 없어, 자기 자신도 알다시피 재능 없이 피아노는 좀 치는 주디스는, 피아노 개인 교습을 하던 양반이 갑자기 숨이 넘어가는 바람에 그의 제자들 다섯 명을 인계 받아 제법 쏠쏠한 호구처가 되었던 거다. 물론 이야기가 시작하기 불과 얼마 전에 꼬맹이 한 명만 남기고 전부 교습을 끊었고, 꼬맹이마저 얼마 안 있어 다른 교습소를 찾아 가겠지만.

  세상에 아무도 없는 주디스 헌. 친구라고 오해하는 오닐 교수도 포함해, 하늘 아래 친구 한 명 없고, 친척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 의지가지가 없는 주디스가 새 하숙집으로 옮긴 다음 날 아침, 헌 양 앞에 하숙인들이 나타난다. 공립초등학교 교사를 하는 까다로운 성격의 프리엘 양. 점원 일을 하는 것 같은 나이 들고 교활한 레너한 씨. 그리고 하숙집 주인인 과부 라이스 부인의 오빠이자 북아일랜드 바로 아래 지역인 도니골 출신으로 일찌감치 미국으로 이민을 가 30여 년 동안 뉴욕에서 별의 별 짓을 다 하며 살다가 마지막으로 밀크 맨이 아니라 타임스퀘어에 있는 대형 호텔의 도어 맨을 하다가 신호위반을 한 버스에 들이받쳐 두둑한 보상금 1만 달러를 갖고 귀국한 제임스 패트릭 매든 씨.

  어느덧 40대에 이른, 예의 바르고 독실하게 가톨릭을 믿는 신자이며 잘 교육받은, 그래서 콧대 하나는 겁나게 높아진 주디스 헌 양. 자기 앞에 등장한 거구의 미국인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미국인 매든 씨는, 벨파스트에서도 혼자 살다가 나이먹은 남자한테는 이가 서 말이나 끓지만, 혼자 살다가 나이먹은 여자는 금과 은이 서 말이라서, 당장 헌 양의 팔뚝에 두른 (심각하게 고장난)금시계만 보더라도 알겠다시피, 헌 양이 못 생기긴 했어도 만만치 않은 현금 보유자일 것이라고, 김치국물을 벌컥벌컥 자시기 시작한다.

  결론은? 제임스 패트릭 매든이 개자식이라는 거. 헌 양이 빈털터리란 걸 알고 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다른 행실, 비슷하게 힌트를 드리면 허리하학적으로도 개판이고, 헌 양의 사랑을 접수하지 않겠다는 통보도 악랄한 단어만 골라, 골라 폭격을 해버리고 만다. 가뜩이나 아픈 헌 양에게.


​  근데, 잘 읽히고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2백쪽이 넘어가면서 시작하는 주디스 헌의 고통이 너무 비통해 무지하게 불편했다. 무엇보다, 실감나서! 나한테는 너무 절절하기 때문에. 문학이니까, 소설이니까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고, 허구가 진실보다 더욱 진짜 같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읽는 나는 진짜 미칠 뻔했지 뭐야. 이런 소설은 정말 안 읽고 싶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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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6-27 07: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 잘 읽었어요! 저도 얼마전에 읽었는데, 내용을 너무 잘 정리해 주셨네요 ㅎㅎ 주디스 헌의 고통이 너무 비통해… 그렇죠 ㅠㅠ 별로 호감가는 인물이 아닌데도요.

Falstaff 2023-06-27 15:22   좋아요 1 | URL
에휴. 주디스의 제일 큰 문제가 드러나지 않게 독후감을 쓰느라고, 하고 싶은 말은 별로 하지 못했는데, 좋은 마음으로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려서 아휴....

다락방 2023-06-27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진짜 기다리고 있던 리뷰입니다.
오늘 피씨 로긴하고 27일에 올려준다 하셨어! 하고 헐레벌떡 달려왔더니 이렇게 똭-

흑흑 우리 주디스 헌 ㅠㅠ

Falstaff 2023-06-27 15:31   좋아요 0 | URL
공감이 가는 장면이 많아서 읽는 일 자체가 저한테는 아주 힘들었습니다. 독후감 쓰기도 마찬가지였고요. 이 책 읽고 며칠 다른 책을 읽지도 않았답니다. 에휴....
진짜로 별 거 없는 독후감인데 기다리셨다니.... 괜히 미안해집니다. 여차하면 궁상의 골짜기로 빠질 거 같았거든요.

coolcat329 2023-06-30 16: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잠자냥님 리뷰로 읽기 괴로운 책인 거 알고는 있는데 골드문트님이 미칠 뻔하셨다니...되게 궁금하네요.

Falstaff 2023-06-30 16:53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전 권하지 않겠습니다. 며칠 후에 꿈에서까지 나온 소설 장면도 소개할 예정입니다만... 7월 15일? ㅋㅋㅋㅋ
아, 그것도 잠자냥님이 백자평과 리뷰 올리셨던 겁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