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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몽스트르 Le Monstre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박철호 옮김 / 제철소 / 2023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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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개의 희곡을 담은 희곡집. 당연히 소설책인 줄 알고 아내 이름으로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첫빠따’로 읽은 책. 크리스토프라면 당연히 이 시대의 명작에 올라야 할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대표로 꼽아야 하고, 이 책으로 크리스토프의 팬이 된 독자들은 소품인 <문맹>과 <어제>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이제 나한테, “작가 이름 하나만으로 책을 선택하는” 몇 안 되는 그룹의 한 명이다. 이이가 헝가리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 지역으로 망명을 하고, 프랑스 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상태로 지내다가 결국에 이방의 언어인 불어로 작품 활동을 한 시인이었다는 건 알았는데, 희곡을, 그것도 여러 편을 쓰고, 이 가운데 많은 작품을 실제로 공연까지 한 극작가이기도 하다는 건 처음 알았다. 그래서 오히려 더 놀랍고, 반갑고, 독특한 세계관과 그로테스크한 표현방식을 지닌 그가 어떤 극작품을 썼는지 서둘러 페이지를 넘겼다.
제목 “르 몽스트르 Le Monstre”는 네 번째로 실린 작품 <괴물>이다. 실제로 공연을 한 작품들의 경우엔 초연 무대와 장소, 이후 공연의 이력 같은 정보를 제일 먼저 소개한 걸로 봐서 <괴물>은 아직 초연을 하지 않은 듯하다. 극작가 크리스토프 대표작을 꼽으라면 거의 <배회하는 쥐>를 거론한다는데, 이 책 《르 몽스트르》를 보면 대부분 작가의 이름값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비유, 풍자, 함의, 그리고 부조리 적 시각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자신이 초년 팔자에 헝가리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다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시대에 새까만 밤의 장막을 뚫고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스위스까지, “자유를 찾아” 나선 ‘헝가리언 디아스포라’의 일원으로 다양한 체제, 그리고 서구에서까지 계속된 젠더 차별을 경험한 것이 이렇게 여러 모습의 비유와 풍자를 그려내게 했을 터이다.
첫 작품 <존과 조>는 그러나 새롭지 않았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내용. 1975년에 스위스에서 초연을 하고, 1993년에 독일어로 번역 출판했다고 하니까 내 기억 속의 장면과 <존과 조>의 유사한 내용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도저히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존과 조는 이 정도면 사이가 괜찮은 친구다. 둘 다 가난한 건 마찬가지. 그래도 조가 훨씬 궁상맞다. 둘이 식당에 들어가 음료와 술 등을 주문하다가 약간의 오해가 생겨 주머니에 있는 돈을 싹 긁어서 계산을 마치고, 이때 돈이 훨씬 적었던 조가 가지고 있던 복권을 현금으로 계산해서 존에게 넘겨준다. 여기까지만 봐도 다음에 어떤 내용인지 확 짐작이 가시지? 하필이면 이제 존의 소유가 된 복권이 당첨이 되고 만 것. 조의 머리는 복권이 존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존의 행운을 축하해주어야 하지만, 가슴에서는 웃기지 마라, 그건 애초 내 것이었지만 존이 만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냐, 하는 갈등에 빠진다. 그래서 칼부림이 나느냐고? 아무리 크리스토프가 좀 엽기적인 면이 있어도 설마, 설마가 사람 잡을 지는 모르지만.
두 번째 작품 <엘리베이터 열쇠>는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나 페미니즘 드라마로 보는 것이 일단 제일 편하다. 주요 등장인물은 여인과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한 친구이기도 한 의사다. 이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 위해서 엘리베이터를 열고 닫는 열쇠가 있어야 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여자도 당연히 엘리베이터 열쇠 하나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부부가 사는 아파트는 통로가 오직 엘리베이터 하나밖에 없는데, 처음 입주할 당시엔 시내에서 떨어진 외곽지역, 아파트만 나서면 울창한 숲이 있고 새들과 벌레들이 밀집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도시화가 진행되어 낮이고 밤이고 훤한 불빛과 자동차의 엔진 소음이 그치지 않는다. 하루는 다리가 조금 간지럽다고 남편한테 이야기를 했고, 남편 자크는 그렇느냐고, 도시 현대화를 위해 일하는 건축가이기도 한 남편이 알겠다고 하더니 친구인 의사를 불러왔다. 의사는 아주 간단한 시술 한 번으로 다리 신경을 깔끔하게 마비시켜 이후부터 휠체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움직일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풀과 나무와 새와 곤충을 볼 수 없으니 그래도 행복했다는 아내. 이제 다시 자동차 소음이 시끄럽다고 하니 남편 자크는 또 의사를 데려와 큰 고통 없는 간단한 시술로 귀머거리를 만들었고, 불빛이 피곤하다고 하자 시신경을 끊어버렸다. 이젠 슬픔에 잠겨 울부짖는 아내를 위해 마지막으로 혀를 절단하는 간단한 시술을 하는 찰라, 차라리 목숨을 가지고 갈지언정 목소리만큼은 그냥 두라는 아내의 간절한 외침을 묵살하는 남편에게 그녀는 어떻게 했을까? 이미 간단한 시술을 위해 침상에 누워 있음에도?
세 번째 실린 작품은 명실공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최고의 극작품이라 굳이 이 자리에서 소개를 하느니 직접 읽어보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네 번째 작품이자 표제작인 <괴물>, 이게 아주 의미심장하게 정치적이다.
거의 알몸 상태로 살고 있는 원시 종족 사회. 이들은 맹수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어귀에 깊은 함정을 파고 함정 속에 뾰족한 부비트랩을 설치해 빠지면 죽게 만드는 장치를 해두었다. 북아메리카 북부 지역에서도 회색곰이 집안에 침입해 위해를 가하는 걸 막기 위해 비슷한 장치를 하는 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선 곰 대신에 사람, 알렉 볼드윈이 빠져 허벅지에 말뚝이 박히기는 하지만. 하루는 이 함정에 엄청나게 크고 괴상한 모습을 지닌 괴물이 빠졌고, 촘촘하게 박힌 부비트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포효를 하고 있어서 마을에 큰 사달이 난다. 여태까지 본 어떤 짐승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끔찍하고 악취가 풍기고 사나워서 두려움을 일으키는 괴물. 남자들이 창을 꼬나잡고 몰려가 마구 찔러대도 괴물은 끄떡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덩치가 더 커져가기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괴물의 등짝 위에 핀 꽃에서 퍼지는 중독성 방향에 사람들이 몰리고, 이 사람들을 하나씩 잡아먹을 때마다 엄청난 속도로 커져, 결국 옆 마을까지 완전히 잠식을 해서, 사람들은 주거지를 더 변방으로 옮겨야 했던 것. 주거지만? 당연히 아니지. 주거지를 포함한 모든 생활의 터전까지다.
그리하여 이들이 내린 결론은 괴물의 꽃과 방향을 흠향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자는 것. 이를 위하여 단호한 마음으로 한 번도 괴물의 꽃과 향기를 보고 냄새 맡지 않은 젊은 용사이자 최초의 괴물 발견자인 놉을 대장으로 해서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자 하지만, 이미 괴물의 꽃냄새에 취한 사람들은 괴물에게 다가오기를 멈추지 않아, 결국 놉과 마을의 장로만 남고 모든 사람이 놉의 칼 아래 죽어버린다. 괴물 또한 사람을 잡아먹지 못해 소멸해버리고.
이 괴물은 무엇을 대신했을까? 나는 읽으면서 저절로 자본주의를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확장함에 따라 도시 빈민의 주거지는 점점 더 외곽으로 밀려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본의 단맛에 취해 기꺼이 자신의 노동을 싼 가격에 팔아 넘기기를 계속한다. 또는 계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뒤로 가면 갈수록,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박철호의 해설을 보니, 역자도 자본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근본적인 것은 공포심 아니었겠는가, 주장한다. 반면에 나는 또 자연스럽게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정체성을 떠올려, 자신이 젊은 시절에 조국을 떠나게 했던 소비에트 정권을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됐건, 소비에트가 됐건, 공포심이 됐건 간에 문제는 권력이다. 그것도 한 집단을 단체로 마취시킬 수 있는 권력.
이 괴물을, 대중의 희생 없이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 알고 있을 듯. 알고는 있을 듯. 혹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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