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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태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빅토리야 토카레바 지음, 김서연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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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어린 시절부터 두 가지 방면에 뛰어났으니 하나는 공부요, 다른 하나는 피아노 연주였다. 근데 왕년에, 초등학교 시절에 반에서 일등 한 번 못해본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시라. 토카레바가 공부를 잘 하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의 희망인 의사가 될 수준은 아니었다. 두 번째 재주인 피아노 연주로 림스키-코르사코프 페테르부르크 음악학교에서 4년 동안 공부를 했지만 피아노 연주자로 성공할 재목까지도 아니었단다. 그래도 배운 것이 피아노, 밥벌이를 위해 모스크바 근교의 음악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일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의 경험 일부를 <눈사태>에서 써먹었으니 이 책의 주인공 이고리 니콜라예비치 메샤체프의 아내, 이리나 메샤체브나의 직업이 피아노 교습 선생이다.
이리나 메샤체브나는 남편 이고리와 함께 모스크바 음악원 피아노 동기생이다. 피아노 연주를 비롯한 예술 행위는 점진적으로 우상향하는 완만한 곡선이 아니라, 곡선을 따라 올라가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높은 계단이 하나 나타나 이 계단을 오르느냐 마느냐가 문제인데, 오른 사람은 유명 연주자/예술가, 또 고액 연봉의 프로 운동선수, 못 오르면 그저 보통의 예술가가 되든지, 조기 축구단에서 눈썹을 휘날리는 스타가 되든지, 가리봉동 기원의 동네 챔피언 바둑 기사가 되든지 하는 거다. 이리나가 보기에 자신은 아무리 용을 써도 마지막 높은 계단을 오르기는 텄고, 대신 남편(이 될) 이고리는 그걸 어렵지 않게 성큼 올라가버린 단계였다. 하지만 당시는 소비에트 시절. 스탈린이 죽고 뒤를 이어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등등이 철권을 휘두를 때라 세계적인 실력을 갖춘 이고리라 할지라도 소비에트 연방, 소련 각지를 떠돌며 시끌벅적한 군중을 대상으로 거의 무료의 공연료를 받고 연주를 해야 했다. 이리나는 남편을 향한 사랑과, 언젠가는 이고리의 성공을 확신하면서, 이 어려운 시기 동안에 적어도 딸, 아들, 장모를 먹여 살리기 위한 노심초사에서 벗어나 레퍼토리를 늘이고 음악적 성취에만 신경 쓰라는 뜻에서 자신이 열심히 피아노 학원을 하며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어느덧 세상이 바뀌어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에 올라 대한민국 제주도를 방문해 노태우 대통령한테 30억 달러의 차관을 얻어 오기도 하는 새 시대, 소위 페레스트로이카 시대가 열려, 철의 장막을 친 소련 영토 안에서 철저하게 실력이 가려지긴 했으나 연주 녹음은 아니더라도 이름이 서방에까지 알려진 이고리 메샤체프가 서유럽 연주단체로부터 초청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 그래 비행기 타고 한 번 가서 연주를 해주었더니 아메리카를 포함한 서구세계가 이고리한테 환장을 하기 시작했고, 이고리는 유럽으로 연주여행을 하든지 아니면 모스크바의 집에서 새 레퍼토리를 연구하든지 하는, 어찌 보면 단조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됐는데, 이게 피아니스트 자신의 성격에도 딱 맞아 떨어져, 별로 불만 없는 세상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알고 보면 이고리 메샤체프의 내력도 조금 그렇다. <황산벌>의 계백장군 말투로 말하자면 초년 신세가 거시기했다는 말씀. 아버지는 아코디언 연주실력이 뛰어나고 그것만큼 손으로 하는 일, 뭘 고치고, 수리하고, 보수하고, 이게 다 비슷한 말 같지만 규모에서 차이가 나는 것들인데, 작은 시계 같은 것은 고치고, 좀 큰 기계는 수리하고, 집이나 하수 시설 같이 덩치가 큰 것들을 보수하는 모든 일에도 동네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을 만큼 재주도 좋았으나, 불행하게도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당연히 미주알이 째지게 가난한 가정의 명목상 가장이었다. 이런 아빠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거나 고치고, 수리하고, 보수하는 일로 번 돈으로 유일하게 하는 일은 혈중 알코올 농도를 올리는 것뿐이었다. 새끼들 입에 거미줄만 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던 엄마가 아빠를 대신해 청소부 일을 해 그나마 쑥을 뜯어 미음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었다. 이때 어린 이고리가 아빠한테 얻어 터져가며 배운 것이 아코디언 연주. 이를 유심히 지켜본 흰 수염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산신령처럼 생긴 노 신사가 이고리를 거두어 음악학교에 보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건 뭐 믿거나 말거나.
하여튼 음악학교에 진학한 이고리는 열세 살에 같은 반에 있던 아가씨 이리나를 만나, 열네 살에 처음 키스를 하고, 야매로는 언제 했는지 몰라도 법적 결혼은 열여덟 살 때 해서, 딸 아냐, 아들 알리크를 낳았다. 이제 아냐는 학교를 다 마치고 애인 유라와 약혼한 상태지만 유라의 재정 건전성 확보기간 동안 결혼을 미루고 있고, 아들은 병역 기피를 목적으로 옛 병명으로는 정신분열, 요즘 말로 조현병을 위장해 신경정신과 병원에 입원한 상태다. 아들 알리크는 부모에게 대단히 아픈 존재다. 서로 지독하게 사랑하면서도 지독하게 괴롭히며 살아온. 도무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며, 군인으로 2년을 지내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심지어 살아서 제대할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어 불법인지 알고 있음에도 이런 조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다 부모 마음이지. 걱정도 팔자인 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이고리는 세상 도처로 연주여행을 다니며 상당한 액수의 달러를 수집하기에 이르렀고,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경제 몰락을 맞은 모스크바에서 역설적으로 부자들을 위한 피아노 강습료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바람에 떼돈을 벌기 시작한 이 가족은, 아니, 부부는 서로가 서로를 굳게 신뢰하는 사이로 아무 걱정도, 별 관심도 없이 마흔여덟 살이 됐다. 이제 부부는 살을 맞대기엔 어딘지 너무 친한 사이라고 느끼기 시작했으며, 같은 핏줄이라서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것이 마치 천벌을 받을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 단계에 왔는데, 실제로 그런 상태였다고 빅토리아 토카레바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자기 입으로 말했거니와, 이런 현상이 서로 너무도 덤덤한 사이, 소 닭 보는 듯 무심한 상태가 되어 그랬던 것이 아니고, 굳은 신뢰와 당연히 변하지 않는 관계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공고한 부부관계. 이들의 삶엔 딱 하나의 문제만 공유했다. 아들 알리크의 반 사회적 성향.
솔직히 말하자면 여태까지 이야기는 다 헛소리다. 서론이 길고 길었다.
이제 이 공고한 가족에 눈사태가 나고 만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기 그지없는 설산. 지표를 두텁게 덮고 있는 눈덩이의 한 면에 마찰이 생겨 거대한 눈 뭉치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고, 드디어 만유인력의 법칙에 의하여 한 번 슬라이딩을 시작하면, 아무도 멈추지 못하고, 눈덩이조차 어느 방향으로 미끄러질 지 모르는 속수무책의 단계에 접어들어, 자신의 힘이 닿는 한,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킨 연후에 저절로, 할 수 없이 멈출 시간이 와야지만 운동을 그만두는, 눈사태.
이 가정의 눈사태는 이고리 메샤체프에서 시작한다. 연주여행을 다녀와 피곤한 심신을 모스크바 근교의 요양원에서 회복할 생각으로 한 주를 묵었다가, 그곳에서 서른네 살의 아름답고,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데다가 요염하고, 탐스럽지만 너무도 세속적인 여성, 일명 률랴, 성姓도 모르는 옐레나 겐나디예브나를 만나 불륜이라는 눈덩이의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제 남은 것은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도 모른 채 오직 하나,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는 일뿐.
이리하여 이 작품 <눈사태>는 연애소설. 박완서의 말대로 읽거나 구경하기에 가장 재미나다는 연애 소설 가운데 ‘불륜’을 다루고 있다. 하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연애소설에는 두 당사자의 연애를 가로막는 장벽이 적어도 하나 이상은 존재해야 한다. 그게 카풀렛 가와 몬테규 가의 대를 잇는 복수심일 수도 있고, 두 당사자한테 교수형과 화형의 축복을 골고루 하사하는 종교 갈등일 수도 있지만, 근현대로 넘어오면서 작가들은 가문의 복수심이나 원한관계, 종교갈등의 소재를, 벌써 하도 많이 써먹었기 때문에 함부로 사용할 수도 없었고 이젠 더 이상 가문이나 종교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상대방 중의 한 명 또는 둘 다 혼인관계를 유지한 연인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내 말과 다른 현대 연애소설 있으면 두 작품만 예를 들어 보시라. 그러다 보니까 또한 연애소설은 날이 갈수록 분량을 늘이기가 쉽지 않게 된다. 물론 최인호의 두 권짜리 연애소설 <겨울 나그네>는 예외로 하고. 세월이 갈수록 연애소설 쓰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토카레바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는데, 그건 절대로 아쉬운 바가 아니다. 어차피 연애소설은 스토리 전개가 뻔한 거니까 굳이 길게 쓸 필요도 없다.
그러면 연애소설의 성패는 무엇이 가르는가?
문장이다. 토카레바의 무심한 듯 툭, 툭 던지는 절묘한 산뜻함과 감각적 단어, 구절의 사용. 내가 읽은 최초의 토카레바였던 작품집 《티끌 같은 나》에서도 그랬듯이 정말 쿨하다. 쿨하고 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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