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정확했다
하인리히 뵐 지음, 사지원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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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뵐의 작품을 많이 읽은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세어보니 꼴랑 네 편을 읽고 많이 읽었다고 여겨온 거다. 조금 창피하네.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와 <천사는 침묵했다>. 이게 전부다. 이러니 도서관 개가실을 뒤지다가 뵐의 <열차는 정확했다>를 발견한 순간 깜짝 놀라 집어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

  뵐은 1917년 쾰른에서 목공예 마이스터 가문에서 태어나 1939년에 쾰른 대학 독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39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해. 그는 입학하자마자 곧바로 징집당해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초기부터 참전했으니 온갖 참상은 다 경험했을 뵐은 1944년에는 수 차례 탈영을 감행해 드디어 미군의 포로로 붙잡히는데 성공한다. 그리하여 1945년에 나치가 벌였던 최후의 대항전에 참전하지 않고 전쟁을 마친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천사는 침묵했다>에서 하필이면 나치가 항복선언을 한 1945년 5월 8일에 탈영을 했다가 붙잡혀, 베를린에서는 히틀러가 자살하고 항복문서에 나치 잔당이 인감도장을 찍었지만 이 사실이 말단 전투중대까지는 하달되지 않았던 5월 9일에 총살당할 예정이었던 한스 슈니츨러 이야기를 쓴 바 있다. 이 작품도 재미있어서 더 이상의 스토리는 언급하지 않겠다. 하여간 젊은 시절의 전쟁 경험은 하인리히 뵐을 극도의 반전주의자로 만들었으며, 물론 기본적인 양식과 양심 등이 뒷받침 했겠지만 이를 테면 그렇다는 것이며, 독일민족이 유대인에게 가했던 학살과 핍박과 약탈에 관해서 대단한 죄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뵐 역시 원래는 아시아 유색인이긴 하지만 하도 오랜 세월 유럽 등지에 섞여 살아 거의 백인처럼 보이는 유대 족에게는 틈만 나면 사과와 유감을 표시한 반면, 독일인이 아프리카에서 야만적(이라고 지들이 멋대로 생각한) 흑인에게 자행한 살인과 고문과 학대와 착취 등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선언한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아우슈비츠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도 마찬가지다.

  하여튼 그리하여 내가 읽은 뵐의 작품을 거칠게 구분하면 ① <카탈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처럼 거대 현대 조직이 개인에 가하는 폭력의 고발, ②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같이 전쟁 중 또는 전후 폐허가 된 독일과 독일 시민들의 황폐한 삶, 그리고 ③ <천사는 침묵했다>와 <열차는 정확했다> 같이 전쟁 자체에 대한 반대와 전쟁의 비극성에 관한 것으로 나눌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주제가 있는지 더 읽어봐야 할 터이다. 읽은 것이 짧아 이렇게 밖에 나눌 수 없음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내가 하인리히 뵐에게 매료된 것은 전후 폐허가 된 도시와 전쟁 중 군인, 민간인들의 불안감을 묘사하면서도 그게 직접적인 전쟁의 장면을 그려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분히 심리적 동요와 절망을 “대단히 섬세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두번째 읽은 <…어릿광대…>부터 뵐의 모든 번역서를 읽어봐야겠다고 작심할 정도로 좋아하기 시작했는데(물론 곧바로 잊기는 했으나), 지금 <열차는 정확했다>를 읽고 나서 이 작품이야말로, 평론가들이 뵐의 대표작이라고는 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나한테 아직까지는 뵐의 소위 “최애”작품으로 등극했다. 전쟁 중 군인들과 군인 있는 곳에 반드시 존재하는 매춘부가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극강의 반전소설이지만 정작 군인들이 총 쏘는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끝까지 지극한 심리소설로 일관한다.

  주인공 안드레아스는 1920년생이다. 자신의 소원은 위대하다는 평을 듣지 못할지언정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였다. 그러나 당시(1930~4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도 대학물을 먹어야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처럼 독일에서도 바칼로레아에 합격을 해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안드레아스는 피아노 연습보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하려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했고, 그래서 입학 자격을 얻었지만 곧바로 세계대전이 터져, 그것도 염병할 나의 조국이 전쟁을 터뜨려 열아홉 살부터 거의 한 번도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보지 못하고 말았다. 시점은 1943년 가을. 벌써 만으로 4년째 전쟁을 하고 있는 주인공은 3년 반 전인 1940년 프랑스 아미앵에서 전투 중에 포탄의 폭발 충격으로 어느 집 담장 밑까지 날아간 적이 있었다. 이때 구멍 뚫린 벽돌로 마무리한 담장 위에서 땅에 누운 자신을 내려다보던 한 여인의 눈을 안드레아스는 결코 잊지 못한다. 어둠 속의 비 맞은 모래 같은 색깔의 슬픈 눈을 가진, 예쁘지도 않고 윤기가 나지도 않았던 좁고 긴 얼굴의 아가씨를 그는 나머지 평생 가슴 속에 새기고 다니고 있었다. 단 한 순간만 경험했던 찰나의 사랑. 이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데 오직 하나, 거의 사시에 가까운, 검은 모래처럼 불행으로 가득한 눈, 그것은 안드레아스,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이후 그는 동부전선으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휴가를 얻어 라인 강변의 고향에서 몇 주를 보낸 후 이제 귀대하기 위해 정확한 시간에 도착한 열차를 탄다. 친구이자 가톨릭 사제인 파울의 전송을 받으며. 그는 이번에 가면 도저히 살아서 돌아올 것 같지 않다. 아무리 고쳐 생각을 해도 불운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안드레아스는 사제 파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저 바퀴 밑으로 뛰어들 수 있을 거야… 그래, 탈영병이 될 수 있어. 뭐라고? 원하는 게 뭐야? … 난 미쳐버릴 지도 몰라. 그게 내 정당한 권리인 것처럼 말이야. 미친다는 건 정당한 권리야. 나는 죽지 않을 거야. 죽고 싶지 않다는 사실은 끔찍한 일이지.”

  파리에서 출발해 저 남부 폴란드 프레미슬로 가는 전선휴가병열차에 탑승하고 정거장을 바라보면서 “이제 다시는 이 정거장을 보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까지 비난했던 내 친구의 얼굴도 다신 보지 못할 거야.”라고 회한에 찬다. 열차가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 도르트문트 정거장과 주전자에 커피를 담아 귀대병에게 봉사하는 피곤하고 지저분한 차림의 잿빛의 소녀, 길가에 있는 녹색 집 앞의 붉은 빛이 나는 갈색 나무, 검은 머리에 노란 옷을 입고 손으로 자전거를 잡고 있는 소녀, 부드러운 잿빛 푸른 구름이 가득 찬 이 지역의 하늘, 열차의 창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라테보일의 어디론가 날아간 작은 파리 같은 것을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란 어두운 예감, 자신은 렘베르크와 체르노비츠 사이에서 죽을 것이라는 예감에 젖어든다.

  이런 안드레아스에 접근하는 두 병사. 나중에 하사관 빌리라고 밝혀지는 수염쟁이와 지벤탈 병장이 본명/계급인 노랑머리. 이들 역시 전쟁으로 인해 불행해진 다양한 사람들의 일원이다. 빌리는 15개월만에 휴가를 얻어 집에 갔으나 자신의 소파 위에서 자기가 보낸 브랜디와 과일주를 마시고 있던 소련군 포로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고 나머지 휴가일정을 포기한 채 귀대 열차에 올랐으며, 노랑머리는 파견분대의 대장 격인 상사가 분대원들을 계속적으로 성폭행하고 이에 응하지 않은 나이든 유부남 병사를 권총으로 쏴죽여버린 것을 목격했다. 전쟁만 아니라면 한 명은 잘 나가는 정비공장, 다른 한 명은 휘장가게의 사장으로 유복한 삶을 누리고 있을 텐데. 물론 안드레아스는 지금쯤 마음 놓고 피아노를 공부하고 있었겠지.

  전쟁은 군인에게만 불행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민간인에게도,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사나운 폭력과 상처를 주기 머뭇거리지 않는다. 작품의 후반에서는 폴란드 매춘부이자 저항군, 레지스탕이기도 한 올리나와의 이야기가 재미있게 펼쳐지는데 차마 이것까지는 이야기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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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28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발견했다니 행운입니다! 전 이 책 출간됐을 때 희망도서 신청해야지 해놓고 여태 까먹고 있었네요. (다른 책에 밀림 ㅋㅋㅋ) 문트 님 덕에 신청하러 갑니다~

Falstaff 2023-03-28 14:25   좋아요 1 | URL
이 책이 나왔을 때가 책을 안 읽었던 몇 개월 딱 그때더라고요. ㅎㅎㅎ 정말 도서관에서 발견한 게 행운이었습니다.
즐겁게 읽으셔요!!

레삭매냐 2023-03-28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메이저 출판사에서
내주었으면 하는 커다란 바람이...

Falstaff 2023-03-28 14:26   좋아요 3 | URL
메이저는 이 정도는 좀 양보해줘도 좋지 않겠나 싶어요.
지만지 번역도 좋고 교정도 좋고, 제본이 좀 후지다는 분 계시지만 전 양장이 괜히 무겁기만 해서 반양장을 더 좋아합니다.
다만 가격이 좀 쎄서 그게 하나 지랄이지요. ^^

그레이스 2023-04-04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사놓고 아직 못읽고 있네요
골드문트님 요사이 지만지 도장깨기 중이신가요?
피드를 내리는데 계속 지만지 표지가!

Falstaff 2023-04-04 21:43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제 인생에 남의 도장을 깨는 건 없습니다. 저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뭔 힘이 남아돌아서 남의 도장까지... 그렇지요? ㅎㅎㅎ
요즘에 지만지가 마구 책을 출간하기 시작했거든요. 전에 비싸서 사 읽을 엄두도 못 냈던 것이 무려 할인까지, 세월과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 대폭 할인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마구 찍고 있거든요. 그래 새로 나온 책들을 저와, 아내와, 아이 이름으로 희망도서 신청해서 아주 만족하게 즐기고 있답니다.
다 좋은데, 간혹 예전 번역을 판을 바꾼 이야기도 하지 않고 걍 낸 경우도 있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