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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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사샤 나스피니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바이오그래피를 클릭하면 이이가 1976년 10월 19일에 태어났다는 거 딱 하나만 나오고 나머지는 작품목록과 수상내역 밖에 없다. 책의 앞날개에 쓰인 작가소개 역시 홈페이지에 기술된 것 이상은 구경할 수 없다. 뭐 요즘 작가들은 이런 게 보통이니까 그러려니 하는데, 심지어 나는 ‘사샤’라는 이탈리아 이름이 모음 ‘a’로 끝나는 바람에 여자인지 알았을 정도다. <불만의 집>은 이이의 2018년 작품. 우리나라엔 2021년에 민음사가 번역 출판했다.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마렘마 평원의 끝자락에 솟은 산마르티노산과 두에(due: 두 개) 알리 봉우리, 이렇게 세 개의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 마을 ‘레 카세’에서 벌어진다. 레 카세 마을은 하나의 호텔, 성당 두 개, 두개의 바, 종탑, 상점, 담배가게 하나씩을 포함해 모두 스물네 집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렘마 평원 저 편에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엘레오노라가 살았던 집이 있는데, 책의 첫 머리에 산과 각 집에 누가 사는지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레 카세 마을에서 한참을 걸어 그렇게 높아 보이지는 않는 산마르티노 정상에 올라가면 일찍이 1815년에 키 작은 코르시카 남자가 이 섬을 탈출해 워털루 전투를 벌여 영국과 프러시아 연합군하고 맞짱을 떴다가 심각하게 쌍코피를 얻어터진 엘바 섬이 보인다는 곳이다. 나도 미친 척하고 le case, maramma, toscana로 지도 검색을 해보니, 세상에나, 정말로 있는 지명이다. 실재하는 곳이라면 사샤 나스피니도 강심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산골에다가 철광석 광산의 광부들이 주로 사는 곳이라면 대개의 작가들은 가난할지언정 무뚝뚝한 정이 넘치는 곳으로 설정하려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샤 나스피니는 지중해를 접한 광산지대 레 카세를 악과 범죄가 넘실거리는 작은 소돔의 성으로 만들어버렸다.

  책은 독특한 구성으로 쓰였다. 앞에서 엘로오노라를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이라고 했지만, 사실 <불만의 집>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 모두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마을 주민들은 하나같이 다 자신들만의 아픔과 상실과 불안과 어떨 때는 공격성과 도벽 같은 추악한 면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이들로 하여금 그렇게 행위할 수밖에 없는 멀고 근원적이고 천부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들이 서슴지 않거나 주저하면서도 범하는 비도덕 혹은 범죄, 눈속임 같은 것들은 자주 독자의 마음을 아리게 한다. 이게 잘 쓴 문장이라서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범죄 혹은 나쁜 행위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은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행위 인물의 불행이나 상실 역시 함께 묘사한다. 물론 거꾸로도 마찬가지다. 선량한 사람은 등장하지 않느냐고? 그럼 하나 질문. 세상에 선량한 사람이 있을까? 무턱대고 선량한 사람을 말하는 거다. 반면에 특별하게 범죄적, 폭력적인 사람이 있나? 있다. 마찬가지의 확률로 특별하게 선량한 사람도 있다. <불만의 집>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는 특별하게 범죄적인 인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특별하게 선량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위에서 내가 레 카세가 작은 소돔의 성이라고 말은 했을지언정,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 작은 소돔의 성에서 살고 있는 거다. 이 책의 등장인물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만큼, 당신도 만일 쓸 수만 있으면 소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게 꼭 좋은 건 아니지만.


​  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 한 명을 소개한다.

  레 카세 마을의 유일한 의사 에밀리오 살기니 선생의 의견에 따르면 자신이 큰 소리로 숱하게 말을 했음에도 델 카시노 가문은 핏줄끼리 쉴 새 없이 관계를 맺더니 결국 선천적 농아-난쟁이 쌍둥이 남매가 태어나고 말았다. 사촌끼리 혼인이면 유럽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왕왕 있었던 일이지만 살기니 선생이 보기에 핏줄끼리의 혼인의 결과로 태어난 두 명의 괴물이 일찍 죽을 것으로 봤으나 이들은 오히려 다른 혈육들이 흙에 덮이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쌍둥이 농아-난쟁이 남매는, 시간적 공간이 20세기 중반이었으니 통상적으로 동네의 또래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아, 자기들만의 “침묵의 시절”을 지내게 된다. 이들은 의사소통 방식으로 둘만의 수화를 만들어 놀고는 했는데 다른 보통의 사람들보다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연의 움직임을 간파하는 능력. 이탈리아는 화산과 지진활동이 활발한 곳이라 크고 작은 지진이 늘상 일어난다. 젊은 시절에 마리엘라를 비롯해 많은 동네 여자들과 사통한 적이 있고 성당의 돈을 빼내 포도주를 사는 데 자주 써버린 적이 있으나 그동안 하도 많이 참회를 해서 아직도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를 씻어주지 않았다면 그건 외람된 말씀이지만 하느님이 너무 꽁해 있는 증거라고 발뺌을 하던 돈 라우로 신부도 신부 관사에서 자다가 지진을 만나 천장이 꽝, 무너졌는데 신부가 자던 침대 천장만 떨어지지 않아 목숨을 구해서 종탑으로 거처를 옮긴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종탑에서 레 카세 마을을 굽어보는 뷰는 좋았지만 쉴 새없이 째깍째깍 거리는 시계 톱니 돌아가는 소리에 죽기 바로 전까지 미쳐버리기 일보직전이긴 했어도. 그런데 이 농아 난쟁이 남매는 아무리 작은 지진이라도 지진에 예민한 다른 동물보다 더 정확하게 이를 감지하고는 했다.

  그런데 아랫마을 아이들은 남매에게 친절했다. 주로 깍두기였기는 했지만 전쟁놀이에도 자신들을 ‘배려하지 않고’ 동등한 자격으로 끼워주는 것이 더욱 고마웠다. 전쟁놀이가 끝난 후엔 돈 라우로 신부가 살고 있는 시계탑까지 행진을 했다. 시계탑이 언덕 꼭대기에 있어서 난쟁이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올랐다. 아이들은 탑의 현관 앞에 남매를 세운 다음 현관문을 두드리고 한 박자 쉬었다가 뒤로 내빼 버렸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지나 기다리다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자 남매와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몇 번 있었던 1952년 여름. 그날도 역시 시계탑 앞에 남매가 서있었으며, 하필이면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고, 이게 폭풍을 동반해 뇌성벽력을 치기 시작해서, 유난히 자연 현상에 민감한 남매는 혼절해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 후 이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세상에나, 귀가 트여 온갖 소리가 다 들리더라는 말씀.

  여기까지는 꼭 동화같다. 이 다음부터 흥미진진하다. 오빠 줄리아노는 동생 피에라에게 동의를 구한다. 오래, 그리고 어렵게 사람들의 말을 공부해 이제 언어를 거의 습득한 이후의 일이다. 자신이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자는 것. 그리하여 레 카세 주민들은 줄리아노와 피에라 델 카시노가 여전히 농아상태인 것으로 짐작하고, 자신의 이야기, 아무한테도 하지 못했지만 비밀을 누구한테 말하고 싶어하는 본능을 풀어버릴 대상으로 이들 남매를 선택한다. 나는 말하지만 저 사람은 알아듣지 못하니까. 다만 입술 모양을 보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안다고 하니 남매 앞에서 이야기를 할 때는 눈을 마주치는 일 없이 반쯤 옆으로 몸을 비틀어서 온갖 비밀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디보 발렌티의 아내 마리엘라는 남자만 보면 몸이 근질거려 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거치지 않은 남자는 레 카세에 한 명도 없을 것이고, 벤초니네 막내아들 게으름뱅이 필리포는 사실과 달리 정신나간 아이로 찍혔지만 그런 단정 때문에 오히려 일도 안 하고 먹을 것도 많이 차지하고 독후감에선 차마 쓸 수 없는 놀라운 경험도 할 수 있으며, 마리오 실베스트리는 병이 들어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형편없이 여윈 아내 아델라이데를 정성을 다해 병구완을 하지만 새로운 젊은 점원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며, 처음엔 동네 체스 챔피언이었다가 점점 이름이 나 세계 체스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이제 몰락해 귀향한 니코데모 템페스티는 사실 미군이 몰려오자 연애했던 이탈리아 여자와 마지막 사랑의 행위를 해보려다 술에 취해 다음날 귀대시간을 놓쳐 후퇴하지 못한 오스트리아 출신 독일군 병사 아미코 프리츠이며, 아델레 첸티니는 아사스티아 대령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쉰일곱 살 먹은 대령의 눈에 들어 그의 아내가 되려는데 여집사 에테드라가 걸림돌이 되자 계단에 트랩을 설치해 엉덩이 뼈를 부서지게 만들었다는 등의 비밀 중의 비밀을 다 토설해버리고 말았다.

  사람의 대화를 “알아듣기”에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은 역시 책을 읽는 것이다. 피에라 델 카시노는 원래 총명한데다 ‘델 카시노’ 이름 앞에 관사를 붙이는 집안 답게 수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노래를 많이 들으면 따라 부르듯이, 책을 많이 읽으니 어느 순간부터 글이 쓰고 싶어졌으니, 무엇을 쓸까, 고민없이 그냥 그대로, 자기가 살고 있는 레 카세의 주민들이 갖고 있는 비밀을, 실제 인명과 실제 지명을 사용해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그걸 자기 이름으로 했다가는 난리가 날 테니까 필명으로 했다.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다. 원래 산마르티노 산과 두 개의 봉우리에 겨울마다 스키 관광객이 조금씩 오는 곳이지만 이젠 시도 때도 없이 이탈리아 각지에서 “레 카세”라는 동네 이름 하나만 보고 관광객이 몰려들어 진짜 골목과 바, 호텔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등 난리가 난다. 피에라는 심지어 자신의 메니저도 한 번 만나지 않고 철처한 비밀에 붙이면서, 이 책 <불만의 집>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되리라고 단언한다.


​  문장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이의 다른 작품도 찾아봐야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잘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들은 참 특색 있다. 문장도 그렇고 쓰는 것도 그렇고, 특히 스토리도 묘한 매력이 있다. 이탈리아 소설, 확실히 블루 오션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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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12-24 05: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재미난데 파묻힌 거 같아서 안타까웠던 중…. 문트님 리뷰로 한번 흥해보길 바라봅니다. ㅎㅎ

Falstaff 2022-12-24 05:58   좋아요 1 | URL
넵. 이 책은 많이 팔려야 합니다. 그래야 나스피니의 다른 책도 번역해 나옵니다. ㅎㅎ

coolcat329 2022-12-24 0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많이 팔려야 하는 책이라니 바로 접수하겠습니다.
이탈리아 소설이라니 더 신선한 느낌입니다.
즐거운 주말되세요~

근데 이미 ‘읽고싶어요‘ 한 책인걸 보니 예전에 잠자냥님 리뷰 읽고 했나봅니다.😅

Falstaff 2022-12-24 07:31   좋아요 2 | URL
ㅎㅎㅎ 편안한 메리 크리스마스 만드셔요!
이 책 명작이라고 하기엔 좀 모자라지만 재미있습니다. 즐겁게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coolcat329 2022-12-24 07:46   좋아요 1 | URL
앗! 그러고보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군요! 골드문트님 즐거운 클리스마스 되세요!

그레이스 2022-12-24 08: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소개하시는 글, 너무 재밌네요^^

Falstaff 2022-12-24 16:14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ㅋㅋ 으쓱으쓱!

그레이스 2022-12-27 09:58   좋아요 1 | URL
ㅋㅋㅋ
제가 갖고 있을지 몰라서 책장 휙 둘러보는데 안보여요. 그래서 알라딘에서 구매하기 해봤는데, 전에 구매한 책이라고,,,, 뜨네요.
ㅋㅋ
놀랍지도 않습니다.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2-12-27 11:5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알라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병증입니다. 저도 가끔 겪어서 압니다. ㅋㅋㅋㅋㅋ

yamoo 2022-12-27 0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라뉘!!
뽈스타프 님, 이거 이거 리스트 추가해야 겠네요~

그나저나 표지그림이 정말 멋집니다!

Falstaff 2022-12-27 11:53   좋아요 1 | URL
이 책 재미나요! 명작 수준까지는 미치지 않으니까 크게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하여간 특색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