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국가에서
V. S. 나이폴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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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겔 스트리트>, <도착의 수수께끼>,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세계 속의 길>에 이어 다섯 번째 나이폴로 고른 책. 아메리카 본토는 물론이고 도서지역까지 모조리 점령한 유럽인들은 트리나다드 섬에 상륙하여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거의 멸종시켜버렸다. 이후 섬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 유지하고자 했으나 노예해방 이후 노동력이 필요해진 백인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인도, 중국 등지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이때 인도에서는 그래도 영어 깨나 하는 최상위 브라만 계급을 중심으로 많이 몰려와 정착했고, 이 속에 뭄바이에서 출발한 나이폴 가족이 들어 있었다. 이리하여 1932년에 V.S. 즉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이 태어난다. 이후 V.S의 성장과정은 웬만한 건 그의 작품에 모두 들어 있다. 후에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되는 섬의 미겔 스트리트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학교를 다녔고, 학교에서 단연 발군의 학업 성취로 열여섯 살에 트리니다드 정부에서 장학금을 받아 가족, 친척의 열광적인 배웅을 받으며 섬을 떠나 열여덟 살에 옥스퍼드에 입학한다. 3년 후인 1953년에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별세했을 때, 나이폴은 생애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하고 다시는 트리니다드 섬에 발을 딛지 않는다. 즉 갈색 피부의 영국인으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나이폴의 원형질에는 인도의 뭄바이, 트리니다드의 포트오브스페인, 런던의 얼스코트, 옥스퍼드, 그리고 만년의 삶을 살게 될 스톤헨지가 바라다보이는 월트셔의 농촌 마을로 이어진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나이폴의 영혼은 뭄바이, 포트오브스페인, 영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를 끊임없이 떠도는 새로운 유형의 디아스포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때때로 작품을 읽기 시작해 진도를 나가다 보면 분명히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감성의 포착, 삶과 전원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명상들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런 묘사가 하도 장황하여 오히려 나가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경우가 있다. 나이폴도 이런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는 <자유 국가에서>는 잘 읽히고 심지어 재미도 있다. 430쪽 분량으로 부담도 별로 없다. 그의 장기이기는 하지만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는 장황한 사색 없이 그리스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인도 뭄바이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트리니다드토바고일 수 있는) 제3 세계에서 영국 런던으로, 정치상황이 매우 복잡한 아프리카 한 나라의 수도에서 남부 관할구역으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다시 이집트의 룩소르로 가는 로드 무비 식 옴니버스 형식이다. 결국 처음과 끝, <피레우스의 방랑자>와 <룩소르의 서커스단>를 내놓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라고 주장하여, 모두 네 편의 단편과 중편 하나의 관계가 서로 이어져 있다고 읽을 수 있는데, 이게 작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출판사가 규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독자가 읽기에 그런 것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순서에 따라 각기 독립된 이야기로 즐기면 되지 않겠나 싶다.


  독후감의 첫 문단에서 나는 V.S. 나이폴을 새로운 유형의 디아스포라 족race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슬쩍 제안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방랑을 보면 오랜 세월 이방의 참견을 받거나 식민지였던 그리스에서 영국에 의하여 주권의 상당부분을 빼앗겼던 이집트로의 여행인 <피레우스의 방랑자>, 식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도인이 세계의 심장인 미국의 워싱턴에서 정착하는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 (영국 식민지였던 트리니다드토바고로 보이는) 제3국에서 런던으로 온 남자의 방황을 그린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 과거 식민 모국 출신 백인이 대통령이 권력을 쥔 아프리카 나라의 수도에서 왕 시해가 진행중인 왕의 남부 관할지역으로의 여행을 다룬 <자유 국가에서>,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모두 과거에 식민지였거나, 식민지에 버금갈 정도로 주권을 빼앗겼던 나라였거나 식민 국가 출신 해당지역의 백인 공무원이다. 즉, 주인공이 흑백을 불문하고 해당 지역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하여 역자 정희성은 책 뒤편의 작품해석 제목을 “포스트 식민 시대 유랑자들의 쓸쓸한 초상”이라고 적절하게 달았고, 내용 역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도 과거 일제에 의한 강점, 즉 식민 시절을 겪었다. 하지만 식민 모국인 일본이 전쟁 마지막에 인류 역사상 유일한 한 방, 리틀보이와 팻맨에 얻어터져 나이폴, 그리고 역자 정희성이 말하는 포스트 식민 시대를 겪지 않았고, 겪을 수도 없었다. 포스트 식민 시대라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식민주의에 의하여 수탈을 당하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피식민국가의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이 부유한 식민 모국,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승전국의 “필수적이지만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작업을 위한” 하층 노동자로 유입하고, 이질적인 문화에서 생활하다가 차츰 적응하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 ‘적응’이라고 하는 건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상당한 시간 동안 죽도 밥도 아닌 상태를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난점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식민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던 미국으로의 유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경우가 다를 뿐이지 결국 필요한 인력의 유입과, 유입한 인력들의 오랜 적응기간과 혼란이란 입장에서는 거기서 거기다. 우리도 한 시절에 아메리칸 드림 하나만 가지고 미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경험이 있으니.

  뭄바이에서 고관집의 요리사 하인 출신이었던 ‘나’ 산토시는 계단 밑의 작은 공간, 이모네 집에서 일만 생겼다 하면 징벌로 처박혀야 했던 해리 포터의 계단 밑 창고 같은 곳에서 먹고 자야 했는데, 그것보다는 동네의 비슷한 또래 하인들과 함께 밤 늦게까지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가 가끔 술이라도 생기면 한 잔 씩 하면서, 그냥 길거리에서 자던 습관이 있었다. 주인이 정부 일로 워싱턴으로 발령이 나서 어렵사리 함께 워싱턴 비행기를 탔는데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피곤한 주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잠에 빠져버렸고, 산토시는 아무리 뒤져봐도 자기가 잘 공간은 보이지 않는지라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 문 앞에 몸을 구부리고 엎어져 잔다. 물론 아침에 눈을 떠보니 현관문은 자동으로 닫혀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갈 방법도 알지 못하고. 이런 상황이니 인도 출신의 디아스포라는 지역적 분리 이외에도 상상도 하지 못한 문화충돌까지 겪어야 한다.

  나도 한 번 폼을 내보기 위해 요즘 유독 유행하는 단어를 굳이 써보자면, 나이폴은 이런 현상을 핍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흠. “핍진”이라고 쓰니 발음은 뭔가 쿨 한 느낌이지만, 이 단어를 쓰려면 반드시 괄호 치고 한자어를 명기, 분명하게 밝혀야겠다. 逼眞과 乏盡이 발음은 같지만 내용은 거의 반대라고도 할 수 있구나. 웬만하면 이 단어는 쓰지 않는 게 좋겠다.


  하여간 결론은, 재미있는 책이라는 것. V.S. 나이폴을 처음부터 쉽게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깊은 사색을 동반해야 할 것 같은 치밀한 서술에 지쳤거나,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한 이야기 다시 한 번 더 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나이폴을 읽기 머뭇거린다면 이 책을 권하겠다. 가장 문턱이 낮아 쉽고 편한 나이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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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1-25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항상 사두고 닐지 않은
책들이 피드에 올라올 때마다
이렇게 맴에 가책을 느끼게
되는지요 ㅠㅠ

나이폴 선생의 책을 잔뜩 사
두고 선뜻 못 집어 들고 있
습니다.

문턱이 낮다고 하시니 해가 가
기 전에 도전을...

Falstaff 2022-11-25 10:56   좋아요 2 | URL
ㅋㅋㅋ 그게 뭐 한 두 권이겠습니까. 책 좀 읽는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붉은돼지 2022-11-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생은 뭐 워낙에 견문이 일천하고 당췌 근본이 천학이기는 허나, 나름 똥폼잡고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지라 뜻도 모르는 한자를 대충 통박으로 많이 쓰는 편인데, 핍진이 결핍의 그 핍진 말고 또 다른 뜻이 있는 줄은 오늘 아침에사 처음 알았습니다. 조문도면 석사가의라. 금일 큰 공부를 하였으니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지는....당연지사 않을 것이고.........................쓸데없는 소리는 각설하고, 가만 보니 골드문트님의 프사가 소생 프사의 거의 실사판이라 반가운 마음에 횡설수설 송구합니다.

Falstaff 2022-11-25 13:53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터줏대감 님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리 댓글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 사진은 좀 된 거긴 합니다만 그래도 비슷하네요.

coolcat329 2022-11-28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작가가 인도인이었군요. <미겔 스트리트> 소설은 들어봤는데 작가가 인도인이라고는 전혀 생각못했습니다. 골드문트님의 작가 설명은 역시 재미납니다. ‘이방인‘을 주제로 하는 소설집~

Falstaff 2022-11-28 18:42   좋아요 0 | URL
나이폴은 충분히 집중 탐구해볼 만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정말로 ˝집중˝하려면 꽤나 지루한 게 문제이긴 합니다만.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11-28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폴도 모아놓기만 하고 아직 못읽었습니다.
한권 읽었는데 책제목이 생각이 안나네요
제 기억으로는 세계속의 길이었던 것 같네요
마구 읽던 때라 기억이 전혀 안납니다 ㅠ

Falstaff 2022-11-28 19:10   좋아요 1 | URL
세계속의 길이 만만하지 않은데.... ㅎㅎㅎ 뭐 어떻습니까. 다 그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