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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낮, 환한 밤 - 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78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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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읽는 옌렌커. 이이가 글 하나는 참 재미나게 잘 쓰는 건 알겠는데, 나 하고는 조금 맞지 않는다. 옌렌커는 저 중국 하남 땅, 즉 허난성 뤄양시 인근 출신으로 기름진 평야와 서쪽과 남쪽에 바러우 산맥이 있어 작품이 모두 이 동네를 무대로 하거나, 등장인물이 이 근동 출신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고속전철이 뚫려 베이징에서 두어 시간이면 도착하지만 옌렌커가 젊은 시절에만 해도 수도 베이징 구경은 현에서 한 두 명 정도 할까 말까 한 저 멀고 먼 두메산골이었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옌렌커의 작품 속에서, 거 참 희한도 하지, 내 눈을 잡아 끈 건 강간, 성폭력을 포함한 폭력의 과다한 사용과 상상력의 엽기적 발산이 주로 안 좋은 방면으로만 눈에 띄었다.
처음 읽은 옌렌커였던 <풍아송>도 구도적이고 아름다운 제목과 달리(고백하건대 이때까지 옌렌커가 어떤 작가인지 몰랐다. 오직 하나, 제목이 너무 아름다워 골랐던 책이다) 주인공이 부교수로 재직 중인 대학의 늙어서 쉬어 꼬부라진 부총장이 자기 집 침상 위에서 젊고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와 포개진 모습을 보는 것으로 작품을 시작한다. 그리고 읽어갈수록 수위가 높아져 결국은 바러우 산 근방에 유토피아, 율도국을 건설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걸, 제목 풍아송 보다, 아니, 제목만큼 아름답게 읽어줄 수 없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도 마찬가지였다가, <레닌의 키스>에 와서야 <풍아송>과 같은 무대인 바러우 산 기슭의 집단 촌에서 시작하는 ‘거대한’ 은유의 범람을 즐길 수 있었다. 이어서 <사서>도 괜찮게 읽은 바 있으나 옌렌커 특유의 마초적 과장은 내내 눈에 거슬렸던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이번에 읽은 <캄캄한 낮, 환한 밤―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도 거북하게 시작한다. 작가가 자신의 실명을 숨기지 않는 건 뭐 그럴 수 있지만 그의 소설 속 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의 출발선을 보자.
“한 가지 일이 발생했다. 리李씨 집안의 둘째 리좡이 먀오苗씨 집안의 넷째 먀오쥐안을 강간했다.”
이것은 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 속에 나오는 소설 <캄캄한 낮, 환한 밤>의 시작부분이다. 여태까지 가장 재미있게 읽은 옌렌커 작품 <레닌의 키스>에서도 작품에 동력을 제공하는 향鄕의 하급 공무원 류잉췌가 서우훠 마을에서 유일하게 장애가 없는 동네 처녀 쥐메이를 강간하여 딸 네 쌍둥이를 낳게 만든다. 나는 이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옌렌커는 마치 작가 또는 지난 시절 남성의 특권인 양 별스럽지 않게 강간행위를 저지르게 구도를 짜는 거 같다. 성폭행이나 어울리지 않는 커플들의 동침 등이, 물론 어떨 때는 매력 있는 글루탐산 나트륨(인공 조미료)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과하면 금방 느끼해지고 질린다. 또 사람에 따라 유독 빨리 질리는 독자도 있다. 야한 장면 읽는 걸 즐기는 내 경우도 그런 편이다.
이 책에는 작가 옌렌커가 실명 등장한다는 건 위에서 말한 바 있다. 이 외에도 리좐, 리징, 리서, 먀오쥐안, 훙원신 등이 소설 속의 소설/시나리오(<캄캄한 낮, 환한 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고, 영화제작에 종사하는 감독, 배우, 작가인 구창웨이, 장팡저우, 양웨이웨이, 궈팡팡 등은 옌렌커가 명리名利(명성과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쓴 소설(<캄캄한 낮, 환한 밤―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에 동원된 주요 인물로, 이들 모두가 책 속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살며, 먹고, 사랑하고, 배설하는 생활인이라고 주장한다. 등장인물이 실제 인물이기 때문에 소설과, 소설 속의 소설/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은 서로 직접 만날 수도 있고, 실제로 저장성에서 대학 교수를 하는 아버지를 둔 베이징대 대학원생 리징과 작가를 제외하고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 리좐의 아들 리서는 영화계 사람들과 직접 만나 5성급 샹그릴라 호텔의 일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는 일도 벌어진다. 물론 정말일 수도 있겠지. 그러나 나는 믿지 않는다. 이 작품이 소설, 허구의 외향을 갖추고 있는 한, 설혹 이게 사실일지언정 나는 몽땅 구라라고 단정한다.
작가는 50세 생일 전날 밤에 잠들지 못하고 깊은 사색을 하기에 이른다. 지금은 비록 베이징의 인민대학에 교수로 근무하고 있지만, 교수이자 소설가일 뿐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름이 알려진 만큼 돈도 많지 않다는 생각에 이른다. 옌의 사색은 더욱 깊어진다. 결국 세상의 모든 예술은 명리를 위한 양복이자 중산복이라고. 예술의 고향은 명예와 이익, 명리이고, 명리의 고향 역시 예술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자신이 명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예술 뿐이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지, 손흥민이었다면 축구의 고향은 명리이고, 명리의 고향 역시 축구라 할 것이고, 추신수는 야구와 명리가 서로의 고향이라 할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그것 밖에 없는 천재들이니까?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게 하나라도 있는 사람이 인구 만 명당 몇이나 있나? 이들은 행복한 자들이다. 지들이 몰라서 그렇지.
하여튼 옌 선생은 이제 황혼, 까지는 아니고 석양을 지나는 자신의 예술을 보면서, 명리를 위한 마지막 귀여운 사기를 한 건 도모하기에 이른다. 바로 영화. 자신의 작품을 소설로 쓰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데, 시나리오, 감독, 주연을 모두 자기가 하겠다는 거다. 작품을 구상하고 이게 어느 정도 구체화 되면, 빵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우유부터 꿀꺽꿀꺽 마시는 건 동서가 마찬가지라서, 소설로의 쩨쩨한 성공보다 이걸 영화로 만들어 수억, 수십억 위안의 박스 오피스를 기록하게 될 순간을 꿈꾸게 된다. 그리하여 시나리오 <캄캄한 낮, 환한 밤>을 쓰고, 그것을 쓰기 위한 실화 소설도 쓰는데, 이 둘을 합친 것이 바로 <캄캄한 낮, 환한 밤―나와 생활의 비허구 한 단락>이다.
시나리오와 실화소설의 주인공 리좐은 위에서 얘기했듯, 열일곱 살의 나이에 열네 살 먹은 먀오쥐안을 강간하고, 당시 순박한 하난성 사람들은 이런 흉한 일은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하는 짓이어서 당연히 먀오 씨가 강간범인 리좐을 때려 죽일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먀오 씨와 리좐의 아버지 리린 씨는 인품이 훌륭하고 생각도 깊은 사람들이라 더 흉한 일로 끝나지 않게 만들기 위해 궁리를 하다가, 동네에서 반평생 동안 민간학교 교사를 지낸 훙원신 선생의 중재로 이 둘을 약혼시키는 해법을 제시한다. 이에 리좐은 자기 왼손 식지를 잘라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하고, 먀오쥐안이 몸이 약해 결혼을 하면 좋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겨 일찍 혼인을 시키고 둘 사이에 아들 리서가 태어난다.
여기에 옌은 중국의 문제점 하나를 보탠다. 대학 입학. 요즘은 한참 덜 하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는 여간 공부를 잘 해야 대학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대학이 마찬가지로. 워낙 인구는 많고 대학은 적은데, 중국인들도 교육열이 대단하니 어쩔 수 없다. 말했듯 요즘에 덜 하단다. 리좐의 아들 리서가 베이징 대학 아니면 안 간다고 앙탈을 부리다가 1점 차이로 낙방을 한다. 그리고 평소 몸이 약했던 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리서를 대학에 보내기 바라며 숨을 거둔다. 근데 촌에 돈이 있어야 재수를 시키지. 아버지 리좐은 아내이자 리서의 엄마 유해를 암에 걸린 노총각한테 팔아버린다. 노총각 죽을 때 관에 넣어 죽어서나마 혼자 살지 말라는 용도란다. 아들 리서는 이 때문에 아버지를 극혐하게 되고, 두번째 입시에서는 2점 차이로, 세번째는 3점 차이로 미역국을 먹는 것. 계속되는 재수, 삼수, 장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리좐은 베이징에서 농촌공으로 일하고, 이때 베이징대 컴퓨터 공학 대학원에 재학중인 리징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느냐고? 쉰한 살이지만 육십대처럼 보이는 리좐과 리징. 동성동본이기도 한데 그렇지만 엄연히 여성과 남성이다. 그럼 둘 중 하나다. 서로 연애를 하거나, 그냥 알고 지내거나. 아참, 하나 더 있다. 리좐한테는 리서라는 아들이 있으니 리징이 연하의 남친을 사육할 수도 있겠네. 하여간 내 입에선 결론이 나오지 않을 테니 천생 읽어보셔야 답을 알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옌이 이제 몇 작품이나 더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도 이제 조금씩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내 코드에는 맞지 않지만 글 하나는 정말 재미있게 쓰는데, 이이가 정말로 글쓰기를 멈춘다면 나마저도 조금 서운하겠다 싶다. 이것도 정이다,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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