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코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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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서보 머그더를 소개한 것은 1992년에 출판사 “미래문학”이 출간한 <사슴>과 <어느 여배우의 고백>이 최초였다(고 알고 있다). 불행하게도 미래문학이 서보의 책 두 권과 이문열의 <미로의 날들> 이렇게 딱 세 권을 펴내고 곧바로 93년에 문을 닫는다. 이후 세월이 흘러 세번째 밀레니엄을 거치고 난 다음, 독자들이 서보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1987년에 발표했지만 우리나라엔 2019년 말에 번역 소개된 <도어>가 아닌가 싶다. 매혹적인 문장으로 여태 보도 듣도 못한 강렬한 캐릭터의 여주인공 세레다시 에메렌츠, 비록 이이의 이름은 잊었을지언정 에메렌츠가 던진 가볍지 않은 충격을 기억할 듯하다. 사실 <도어>가 책방에 깔리기 6년 전에 이미 출판사 지식을만드는지식(이하 “지만지”)에서 서보의 소설 데뷔작인 <프레스코>를 번역 출판해 판매하고 있었다. 다만 2013년 기준으로 2만 8천원이라는 엽기적인 가격이 아직 읽어보지 못한 작가의 책을 섣불리 선택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지. 2020년 봄에 <도어>를 읽고 쓴 독후감에서 일찍이 “은퇴한 후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로 작정을” 했다고 말한 바와 같이, 드디어 때가 되어, 작정한 바와 같이 도서관에 희망구입도서로 신청을 해 새로 사준 책을 소위 “첫 빠따”로 읽었다. 개정판이 2022년에 새롭게 나와 신간인 것처럼 보여 가능했다. 그리고 오늘 <프레스코>를 마저 읽고, 출판사 프시케의 숲에서 올해 나온 서보의 다른 책 <아비가일>을 또다시 희망구입도서로 서슴없이 신청했다.


  터르버 교구의 은퇴한 목사인 마테 이슈트반의 부인 데치 에디트 여사가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40여년 전이던 19세 시절에 치르크베티카의 벌러톤 호숫가 마을에서 과부 어머니와 함께 사는 말없는 아가씨였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전형적인 칼뱅주의 목사 마테 이슈트반 박사가 자신의 학업에 방해하지 않는 과묵한 성격을 지닌 에디트 양에게 청혼해 결혼을 했다. 결혼식 날 사랑하지도 않는 열한 살이 더 많은 남편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눈물바람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 데치 부인한테 귀싸대기를 맞은 기억이 있는, 좀 유별난 성격이기도 했다. 화가 나면 얼굴이 눈 같이 창백해지면서 졸도를 하고, 강아지가 장난 삼아 치마를 물어뜯으면 칼로 강아지를 찌르기를 서슴지 않기도 했다. 에디트는 결혼을 해 첫딸 연커를 낳고 연커가 열한 살이 되던 해 무려 삼일 동안 진통을 한 끝에 둘째이자 막내 딸 어누슈커를 낳았다. 이때 남편 마테 이슈트반 박사에게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는 바, 첫째가 주교가 되는 일이었고, 둘째가 아들을 하나 얻는 일이라서 벌써 이슈트반 2세라고 이름까지 지어 놓았었다. 혹시 몰라서 딸을 낳으면 이름을 ‘주전너(영어 표현 ‘수산나’)’로 지으라 지시하고 취리히로 출장을 갔어도. 이런 상태에서 지독한 진통 사흘만에 딸을 낳으니, 엄마 에디트는, 의사가 딸이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지 한 번 안아 보라고 건네자마자 열 손톱을 사용해 아기 얼굴을 할퀴려 들었다. 그러면서 주전너? 놀고 있네. ‘코린나’로 해. 부목사 갈 언털에게 이렇게 지시해서 아이는 코린나로 출생신고를 마친다.

  마테 목사가 출장길에서 돌아왔다. 자신이 시킨대로 하지 않고 코린나라고 이름을 지은 것에 꼭지까지 열을 받은 목사는 한 순간에 집구석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데, 이때 현명한 하인 요오 미하이가 집안으로 들어오더니 갓난 코린나를 아버지에게 건네 주면서 “여기에 작은 어누슈커가 있습니다.” 라고 했고, 이 대목에서 역자의 각주가 필요했지만 각주는 달리지 않았으며, 그래서 독자는 영문을 모르는 채, 식구 모두가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목사의 진노가 멈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코린나는 집안 식구들 사이에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어누슈커’라고 불리게 된다. 왜 엄마는 코린나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작품의 뒤쪽에 나온다. 혹시 당신이 정말로 이 책을 읽을 지 모르니 그건 비밀로 해두자.

  어머니 에디트는 어누슈커를 낳자마자 그동안 발현하지 않은 정신질환이 도져 거의 곧바로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래 어누슈커는 열한 살 먹은 언니 연커가 이웃에게 얻어온 젖을 젖병에 따듯한 물에 섞어 직접 먹이면서 키운다. 어누슈커는 자라면서 뭐든 자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악착같이 투쟁하다가 엄격한 칼뱅주의 원리주의자인 아버지에게 숱하게 모진 매를 얻어 터진다. 그래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기어이 해내는데 가장 중요한 건, 유대인 이웃 주케르 씨의 집에 무람없이 놀러가 그로부터 그림을 배은 일이다. 그림에 상당한 재능을 가진 어누슈커.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리라. 어누슈커는 성인이 되어 거의 정상급 화가로 인정을 받지만 공산주의 헝가리 정부가 원하는 작품이 아니라서 작품을 완성하기만 하고 판매를 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공산주의 정부로부터 창작 활동 금지 명령을 받은 서보 머그더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어머니는 병원과 집을 몇 번 왕복하더니 쉰 살이 되었을 때, 저녁 식탁에 발가벗고 나타나 부엌을 활보한 이후 마지막으로 병원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나머지 평생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 마테 목사는 자신 대신에 입양한 조카이자 아들이며 현직 교사인 마테 아르파드가 두 주에 한 번씩 어머니에게 들러 돌보는 줄 알고 있지만, 병원의 의사는 마테 집안만큼 환자를 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가족은 본 적이 없다고 혀를 차곤 했다. 이런 데치 에디트 여사가 죽은 것.

  그리하여 가을의 어느 날, 어누슈커는 아침 6시 45분에 터르버 시에서 열차를 내린다.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다페스트에서 온 것. 이 시점부터 오후 8시 20분, 20분을 연착한 부다페스트 행 여덟 시 열차에 어누슈커가 탑승할 때까지의 13시간 35분 동안이 이 작품의 시간적 공간이다. 9년 전 자신을 키운 언니 연커의 남편, 현 터르버 교구의 목사이자 시의회 의원인 쿤 라슬로가 잠자리에 든 한밤중에 2미터 거구의 하인 언주, 자신에게 어누슈커라는 애칭을 붙여준 미하이를 ‘언주’라고 부르기 시작해 모든 사람들도 언주라고 호칭했던 언주가, 자기가 가진 돈 전부를 담아 건넨 지갑을 들고 감행한 가출 이후 처음으로 터르버에 발을 딛는 순간이다. 13시간 35분을 465 페이지에 담았다고 해서 지긋지긋한 세밀 묘사가 가득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작품은 어누슈커를 비롯해 아버지 마테 이슈트반, 형부 쿤 라슬로, 언니 마테 연커, 의붓 동생 마테 아르파드, 조카 쿤 주전너, 일흔세 살 먹은 늙은 언주, 전에 하녀였지만 신분해방으로 가족 비슷한 위치로 신분 상승한 늙은 커티, 외할머니(에디트의 어머니) 데치 부인, 고모 프런치스코 부인 등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같은 현상과 사실을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구나, 라는 걸 알 수 있으며, 그게 또 재미있다.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목사 아버지 마테 이슈트반. 이이는 자신의 집을 엄숙한 기독교의 전당으로 만드는데 조금의 양보도 없다. 음악과 미술은 삿된 행위라고 보고 금지하며, 신학과 철학을 제외한 모든 문학 서적은 집 문턱을 넘어 들어올 수 없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하는 자식이나 자매끼리의 애칭 사용도 엄격하게 금지한다. 가족 가운데 애칭은 주인공 어누슈커 한 명만 허용하는데 이건 아버지 이슈트반 자신이 아내가 지은 이름 코린나를 따르기 싫어서 였을 확률이 높다. 신학적으로도 십자가만 숭상하며, 고난 받는 예수의 형상이 들어 있는 십자고상은 부정한다. 매사 엄숙주의인 집안의 독재자. 혹시 서보 머그더는 마테 이슈트반이 이끄는 터르버 시의 이 가정을 작은 공산주의 치하의 헝가리로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미술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상상력이 보장받을 때 꽃을 피울 수 있어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어누슈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엄숙해도 너무 엄숙한 집을 박차야 했던 거였다.

  이후 9년 동안 어누슈커는 부다페스트에서 이제 가장이 된 형부 쿤 라슬로의 편지를 받고는 개봉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인연을 끊었으나 단 한 명과 교신은 이어간다. 절대 자신에게 S.O.S.를 타전하지 않는 언주. 터르버 시에게 거의 유일하게 완벽한 자유인의 삶을 누리는 대신 가난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스스로도 구태여 가난을 집어던질 생각도 안 하며, 편한 여생을 위해 부다페스트로의 이주를 거부하는, 일종의 현인이랄 수 있는 노인. 반면에 같은 노인인 마테 이슈트반은? 그는 어누슈커가 일방적으로 자신으로부터 일탈한 것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어누슈커 스스로 돌아와 가출에 대하여 참회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아버지이자 목사의 자격으로 다시 딸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절대 자신의 발로 집 문턱을 넘게 할 의향은 없다. 이런 이슈트반의 고집은 가족 모두가 알고 있으며, 친척들도, 심지어 많은 주민들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도착한 어누슈커.

  어누슈커는 오후 세 시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아버지로부터 어떠한 눈길도 받지 못했지만, 부다페스트 행 여덟 시 열차가 출발하기 얼마 전, 기어이 옛집에 발을 들여, 당돌한 어린 어누슈커가 가끔 그렇게 했듯이 아버지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다, “안녕, 아버지.” 어누슈커에게 아버지란 무엇일까? 십대 시절의 어누슈커는 혹시, 자주는 아니었을지언정 가끔, 아주 가끔, 어머니 말고 아버지가 좀 빨리 죽어줬으면, 하고 바라지는 않았을까?

  그래도 이집 식구들, 아니, 모두들 자기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뭐 인생이 다 그렇지.


  서보 머그더의 문장으로 만드는 한 인생 이야기. 또는 여러 인생이 보는 한 세상 이야기. 매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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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11-15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 나빠욧! 무려 2013년도에 2만 8천원이라니.
그때도 책값 만오육 천원만해도 비싸다고 하던 시절이었는데.
출판사가 재정이 좋은 걸까요?
우리나라가 비싼 거 좋아해 0이 하나 더 붙느냐 마느냐에 떠라 명운이 갈린다고는 하지만
책은 안 그럴텐데. 돈 있고, 교양있는 사람만 읽어라 뭐 이런 뜻일까요?
저는 문트 님 이리말씀 하시니 아비가일과 도어는 기웃거려 보겠습니다만 나머지 책은
어림없습니다. ㅋㅋ

Falstaff 2022-11-15 15:56   좋아요 2 | URL
지만지가 확실히 비쌉니다. 근데 이게 참. 이 사람들이 만든 책 중에 숨어있는 좋은 책들이 무척 많다는 겁니다. 광고를 안 해서 그게 나와 있는지도 모르는 작품, 우리나라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좋은 작가들, 그래서 더 얄밉기도 하고, 그나마 고맙기도 하고, 참 거.... 맞습니다, 나쁜 출판삽니다.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11-15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만지는 책값은 비싸지만 이런 작가들을 뚝심있게 소개하는거 쉽지 않은 선택인데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훌륭한 출판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이런 책을 이렇게 소개해주는 골드문트님도 훌륭한 독서가이고요. ^^

Falstaff 2022-11-16 08:33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지만지, 훌륭한 회사입니다. 근데 책값을 좀만 더 내리면 매출도 올라가고 인지도도 높아지고 그럴 텐데 아쉽습니다.
아닙니다. 전 훌륭한 독자 아닙니다. 걍 잘난 척하기 좋아하고 소설책 읽는 거 좋아하는 일반....보다 약간 많이 읽는 독자입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2-11-17 2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비싼 값에 비해 책 상태가 너무 빈약한 거 같아요. 근데 훌륭한 작품들 찾아내서 국내 번역 출간은 참 좋네요.
도어의 에메렌츠는 저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근데 그 전에 이미 이 책이 번역되어 나왔었다니 놀랍네요. 가격과 함께요~
이 책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2-11-18 05:30   좋아요 0 | URL
참 안타까운 출판사지요. 저도 지만지 책은 몇 권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서관을 통해 파고 있는 중입니다. ㅎㅎㅎ 가격은 언제나 중요한 요소입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