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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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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생>은 작년에 출간한 이래 대단한 성가를 누린 바 있다. 간혹 책 읽는 사람들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작품을 읽은 감상을 과장하기도 한다. 나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 카렐 차페크의 팬이라고 자임하는 입장에서 이번에는 출간과 동시에 읽기보다는 한숨 가라앉은 후에 읽기로 결정을 해, 책은 연초에 구입을 했을지언정 책꽂이에 열 달 이상을 묵힌 다음, 이제야 한 장, 한 장 읽어나갔다. <평범한 인생>은 <호르두발>, <별똥별>과 함께 차페크의 철학 삼부작이라고 불리는데 <별똥별>은 아직 못 읽어봤지만 철학 까지는 모르겠고, 그냥 사람 사는 이야기 정도 아니겠는가 싶다. 사람 사는 거, 이게 보통이 아니라서, 언젠가 얘기한 적 있지만, 지구 인구가 70억 명이라면 지구 표면적의 1/3에 해당하는 육지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들 모두 한 편의 장편소설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즉 지금 무려 70억 권의 살뜰하고 애틋하고 징글징글한 소설책이 걸어 다닌다는 말씀.
이 책에서 죽음이 임박해 자서전을 쓰기로 작정을 한 사람은, 홀아비이자 오랜 세월 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남자로 위인, 영웅들의 전기작품을 읽다가 평범한 사람의 전기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자서전을 썼다. 주로 철도를 위해 장기 근속을 했고, 젊은 시절엔 국제열차가 지나가긴 하지만 정차하지 않는 작은 역을 매우 아름다운 정원으로 단장한 것을 자랑으로 삼던 독일 역장의 역무원으로 있을 당시 배운 정원 일로 친분을 쌓은 의사에게 죽음의 침상에서 그간 써온 자신의 자서전을 넘겨주고 눈을 감는다. 의사는 그저 친분이 있는 늙은 신사이자 고인이 된 자서전의 주인과도 알고 지내던 신사 포펠 씨에게 자서전 초고 묶음을 보여주어, 철끈으로 묶은 자필 전기가 펼쳐지면서 한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인생이 독자 앞에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책을 읽어가며 들었던 생각 하나. 이 정도라면 나도,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는 지나간 내 인생에 대하여 전기 형식으로 한 번 쓰지 못할 이유가 없다, 라는 것. 내 대뇌에 심어져 있는 가장 먼 기억, 정여사 부임지였던 경기도 모처(아마 지금의 고양시일 것 같다)의 겨울, 두터운 외투를 입고 머리엔 기름을 발라 오른쪽 가르마를 타고 외조부모 댁 대문을 나서던 장면. 아, 그것보다 더 먼 그림도 있다. 외가에서 자라 부모의 얼굴마저 낯이 설어 정말 잘생긴 아버지가 나를 안아들자 그만 울음을 터뜨렸던 유년의 시절. 밤과 낮이 없이 외손자 양말이면 양말, 내복이면 내복을 짜던 외조모의 털실뭉치 같은 것들을 약간의 조미료와 함께 백지에 옮기면 나름대로 그럴듯한 전기가 되지 않을까.
좋다. 유년 시절이야 왜 못 쓰겠는가. 소년시절로 넘어와 아버지의 커다랗고 튼튼한 돼지저금통을 흔들어 바늘로 동전을 꺼내 만화를 빌어보고, 군것질을 하다가 그게 너무 잦아져서 동전 투입구에 바늘 흔적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커졌던 일. 조만간 구타로 인한 두 형제의 사망사고가 신문을 장식하리라는 믿음이 얼마나 컸던지 저녁마다 혼백이 날아갈 만큼 술을 자시고 귀가하는 아버지의 커다란 체구가 차라리 아름다웠다. 그러다 어느 일요일 아침, 일찍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정작 들통나 버렸을 때, 마루 한 가운데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 신문지 위에 올려놓고, 그는 아무 말도 없었고, 마루엔 여전히 배가 갈린 돼지가 신문지 위에 놓여 있었는데, 오후가 되자 두 아들과 대중 목욕탕에 갔으며, 돌아오는 길에 중화요리집에 들러 당시엔 졸업식을 해야 한 번 먹는다던 자장면을 탕수육과 함께 배 터지게 먹고 들어온 일. 이것도 좋다.
문제는 소년기를 넘어서자마자 득달같이 찾아온 염병할 사춘기부터다. 내가 경험하고 저지르고 여태 땅을 치며 후회하는 숱한 치기어린 행위들. 청년기 이후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을 온전히 “나의 전기”, “나의 자서전”에 담을 수 있느냐 하는 것. 농밀한 개인적 스토리를 허구라는 화학 조미료의 첨가나 수사법의 분식粉飾 없이 전기 형식으로, 이젠 전 세계적으로 별로 사용하지도 않는 백열전구를 환하게 밝혀 놓고 숱한 사람들의 맨눈에 전시할 수는, 없다. 없고 말고. 내가 비겁해서 그렇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시면, 당신부터 한 번 써봐라. 있었던 그대로. 세상에 ‘아니 에르노’가 왜 딱 한 명인지 생각해보시라.
자서전의 주인공 ‘나’는 소목장이(나무로 가구나 문방구를 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이)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강하고 단순하고, 어린 ‘나’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다. 항상 싸구려 담배와 맥주, 땀 냄새를 풍기고 일요일마다 그동안의 땀과 일이 모여 있는 예금통장을 감상하는 것을 취미로 삼는 이로 돈을 교환가치 말고 근면과 절제를 미덕으로 하는 노동의 결과를 상징/대표하기 위한 장치로 이해한다. 평생 공무원, 그것도 될 수 있으면 고위 공무원에 대한 동경과 복종심을 갖고 있어서 ‘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동네 학교를 마치고 도시의 상급학교를 거쳐 프라하의 대학에 진학한 것을 가문의 영광을 알고 동네방네 자랑을 했지만, ‘나’가 1학년 시절에 시에 미쳐 2학년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한 걸음에 상경, 경제적 지원 등을 끊어버리고 만다.
‘나’는 원래 두번째 아들이지만 얼굴도 모르는 형이 어려서 죽어, 이게 한이 된 엄마가 사랑을 듬뿍, 그것도 너무 듬뿍 주는 바람에 응석쟁이라는 소년 시절의 사회적 평가를 받게 된다. 엄마는 상당히 예민한 성격과 ‘나’에 대한 사랑으로 넘쳐흐르던 분이었지만 소년시절부터는 어머니의 사랑이 외려 ‘나’에게 성가신 부담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동네 동무들로부터 ‘당연하게도’ 따돌림을 받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했으며, 뛰어난 학업 성적으로 위에서 쓴 것처럼 프라하에서 대학물까지 먹게 된다. 대학을 중퇴하고 철도청에 근무하다 폐결핵에 걸려 저 멀고 먼 산골의 외딴 역에 요양 목적으로 근무하다가, 독일인이 역장으로 있는 역으로 전보하고, 거기서 역장의 딸과 연애를 해 결혼에 성공한다. 성실한 일처리와 장인의 입김으로 좋은 역을 거쳐 젊은 나이에 자그마하지만 깨끗한 역의 역장으로 발령이 나고 이제 살 만해서 아이를 낳으려 했으나 아이는 생기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체코를 위해 병력과 무기의 이동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 반 독일 세력에게 전달하는 등의 애국활동에도 참여하다가 종전을 맞는다. 이후 프라하의 정부청사에 들어가 고위 공직자로 있다가 깨끗한 생활을 하지만 그게 오히려 약점이 되어 부정한 공무원들의 적의를 사 퇴직을 하고 만다. 아내는 죽고 성실한 하녀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지병인 심장 동맥경화로 삶을 마감한다.
여기까지면 차페크 특유의 감상적인 산문으로 참 잘 읽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감히, 나도 나의 전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을 할 여지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딱 읽어보면 이상한 점이 하나 둘이 아니다.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선하고 삶에 적극적일 수 있을지.
화자 ‘나’는 여기까지 쓰고 심장 발작을 한 번 일으킨다. 침대에 누워 꼼짝하지 말라는 진단을 받고, 정말로 3주 후 다시 원고를 쓰기 시작했을 때, ‘나’ 속의 또다른 ‘나’가 등장해 진술의 하나, 하나에 관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술에 관한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나’가 숭배하던 아버지는 사실 마음이 약하고 착하지만 엄마한테 크게 잘못한 뭔가가 있고, 엄마 역시 사랑이 넘치기는 한데, 마음이 악惡한 곳이 있었다. ‘나’는 비록 청렴했을지언정 “궁극적으로 인생의 올바르고 유일한 목표란 가능한 한 출세하여 자신의 명예와 지위에 기뻐하는 것”이며 “그것이 온전한 진실”이라 자백하고 만다.(129쪽) 물론 자신의 자백에 곧바로 의문을 품기는 했다. 그래서 작품의 뒷부분으로 가면 이런 자기고백은 ‘나’를 이루고 있는 세 명의 ‘나’들, 즉 ①평범하고 행복한 사람, ②출세를 위해 몸부림치는 억척이, ③ 우울증 환자로 이루어진 ‘나’들 가운데 한 명 또는 각자의 고백일 뿐이기는 하다.
이 세 가지 유형은 후에 다른 유형이 더 보태지는데, 놀랍게도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일요일 성당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다. 이것까지 다 알려드릴 수는 없다. 하여간 이리하여 평론가들은 <평범한 인생>을 차페크의 “철학 삼부작”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는 말씀만 드리겠다.
인생? 그건 살아 봐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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