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긴 꽃잎
이사벨 아옌데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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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에 출간한 아옌데의 스무 번째 장편소설. 이사벨 아옌데는 이 책을 자료조사와 꼼꼼한 교정을 해준 친동생 후안 아옌데와 작품의 주인공 빅토르 달마우의 모델이 된 빅토르 페이 카사도에게 헌정했다. 장편소설의 주인공이 될 만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했을까? 그것도 20세기, 한 번의 세계대전과 내전, 제3세계의 쿠데타와 독재의 격랑 속을 그대로 관통한 삶이. 빅토르 페이 또는 빅토르 달마우는 하여간 그리 살았다. 이사벨 아옌데는 워낙 유명한 작가이니 더 이상 소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작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작품의 시작은 1938년. 스페인 내전 중이다. 내전에 관해 좀 더 알아보면 좋을 듯하지만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호르헤 셈프룬의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앙드레 말로의 <희망>, 하비에르 세르카스의 <살라미나의 병사들> 등 무수한 저작을 통해 때론 점잖게 때론 격정적인 열전의 형태로 간접경험 할 수 있으니 지금은 건너뛰기로 하자. (스페인 작가들 가운데 내전을 다룬 건 예상 외로 많지 않다. 프랑코 정권의 검열 때문일까?) 다만 바로 전에 읽은 에인 랜드가 <파운틴헤드>에서 말하기를 전쟁 중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이 같은 종교의 다른 분파끼리 벌이는 전쟁과, 같은 민족끼리 싸우는 내전이라고 했음을 기억하는 편이 좋겠다. 남북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칠십 여 년 전에 내전을 경험해서 알고 있기는 하지만.

  1938년이면 이미 대세는 기울어 있을 때였다. 스페인 좌파 공화국을 지원했던 코민테른은 서서히 전쟁에서 발을 빼기 시작한 반면 노골적으로 팔랑헤 당을 지지한 독일 나치 권력은 전투기를 필두로 우수한 성능의 무기와 인력을 지원하고 있었다. 마드리드와 고립된 카탈루냐를 확보하기 위해 맞붙은 1938년 후반기 4개월 간에 걸친 에브로 강 전투에서 인민전선 측은 3만 명의 전사자를 내며 결정적으로 패전을 확정하고 이때부터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프랑스로 기약없는 망명의 길을 떠난다. 이후 소위 ‘잔당 색출’을 끝낸 1939년 4월 1일, 프랑코는 전국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종전을 선언한다.

  당시 마드리드 북역인 노르테 역에는 빅토르 달마우라는 이름의 의과대학생이 내전이 벌어진 1936년 이후 거의 3년 동안 인턴으로 일하고 있었다. 역자의 주석에 의하면, 전세가 불리한 인민전선에는 부족한 병사를 보충하기 위하여 공화국 대통령의 명으로 소년들까지 징집해 소총을 쥐어주고 전선으로 내몰기도 했는데,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시인이었던 페데리카 몬트세니는 이들 소년병들을 “비베론 부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비베론’은 젖병을 의미해 아직 젖병을 물고 있어야 할 나이라는 뜻이다. 공화국이며 인민전선이라고 해서 항상 선한 건 아니었다. 이들도 국민전선과 다름없이 죄 없는 인민들을 학살하기도 하고 국민전선 포로들을 재판 없이 총살하거나 고문 후 때려죽이기도 했다. 전쟁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인간에게 극한의 악마로 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서.

  이때 부상을 입고 노르테 역에 실려온 소년병 하나가 빅토르의 눈에 띄었다. 상처부위를 덮은 담요를 젖혀보니 개방된 가슴을 통해 심장이 드러나 있었다. 이미 죽었다고 판단해 그냥 버려질 예정인 소년병의 심장이 자기 눈 앞에서 멈춘 것을 발견한 빅토르는 자신의 소독하지 않은 손을 갈비뼈 사이에 집어넣고 심장을 직접 마사지해 기어이 소년병에게 삶을 돌려주었다. 이 특별한 경험으로 빅토르는 이름도 모르는 소년에게 ‘라사로’라는 자기만의 이름을 부여하고 특별한 기념으로 삼았다. 천운으로 살아난 소년병은 기어이 빅토르 달마우라는 이름을 알아내 2년 후 마르세유에서 가슴의 상처 바로 아래에 그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고이 간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의 남은 생애에 결코 만나지도 않고 서로의 소식을 알지도 못한다. 다만 이 기념할 만한 치료로 의과대학 졸업도 하지 않은 빅토르의 외과의사로의 자질은 스페인 전 지역에 소문이 나고, 이후에 심장외과의 권위자가 되는데 조금은 이바지한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패전했다. 빅토르 달마우에게는 전쟁 중에 만난 두 명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한 명은 스위스 출신의 전시아동구호단체 소속 자원봉사자이며 비혼주의자인 엘리자베트 아이덴벤츠. 다른 한 명은 불멸의 바스크인으로 불리는 운전병 아이토르 이바라.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다. 빅토르 역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야 하지만 집에 머물고 있는 어머니 카르메 달마우 여사와 전사한 동생 기옘의 아이를 임신한 만삭의 로세르 브루겔라를 먼저 보내야 할 처지였다. 자신은 너무도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해야 했으므로. 그리하여 바스크인 아이토르에게 어머니와 제수를 부탁하고, 프랑스에 도착하면 적십자에서 일하는 엘리자베트를 찾으라고, 그러면 언젠가는 자신과 연락이 닿을 수 있을 것이라 전한다. 때는 1939년 1월. 기록적인 추위가 덮친 피레네 산맥을 넘는 과정과 프랑스 수용소에서 겪는 모진 고통은 생략한다.

  다만 모든 것을 일찍 눈치챈 바스크인 아이토르는 혼돈의 와중에 가업이자 바스크인들의 전통적 생업 가운데 하나였던 밀수를 통해 제법 돈을 마련해 베네수엘라 이민을 준비한다. 나중에 프랑스로 탈출해 아르헬레스수르메르 수용소에서 빅토르를 발견한 아이토르는 엘리자베트의 도움을 받고 있던 로세르에 관한 소식을 전해 이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면서, 당시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베네수엘라로 이민 갈 수 있도록 자신이 초청하겠다고 약속한다. 이것으로 이 두 명의 선한 인물은 작품에서 사실상 사라진다. 나중에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만 배경으로 등장할 뿐.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파블로 네루다. 빅토르와 로세르는 고향인 바르셀로나를 떠나 프랑스에 가서, 대단히 폭력적이고 거친 수용소 생활을 거쳐, 스위스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방의 나라에 머물다가, 베네수엘라로의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칠레 좌파 정부는 외교관이기도 했던 시인 네루다를 파리에 보내 스페인 난민들을 칠레에서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칠레 정부는 보수 가톨릭 부르주아 세력들의 반대 때문에 충분한 비용을 지원해줄 수 없었다. 네루다는 1939년 8월 상선 위니펙 호를 빌려 보르도 항을 출발해 칠레, 네루다의 표현에 의하면 “하얗고 새까만 거품의 허리띠를 두르고, 바다와 포도주와 눈으로 이뤄진 기다란 꽃잎”의 땅으로 향한다. 이 피란민 속에 전사한 동생 기옘의 아들 마르셀과 마르셀의 엄마 로세르와 결혼한 빅토르도 끼어 있었다. 이민을 위한 서류 결혼이었다. 육체적 결합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곁들인. 이때는 몰랐지, 한 번 결혼을 하면 칠레에서 이혼할 수 없다는 것을.

  9월 3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바로 그날에 칠레 땅을 밟은 이들은 탈카 주州에 거류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칠레는 민주주의의 나라라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어서 수도 산티아고에 머문다. 음악 교육과 작곡에 능했던 빅토르의 아버지가 가르친 가장 훌륭(하지만 가장 가난하기도)했던 제자 로세르는 산티아고에서 피아노 연주와 레슨으로 돈을 벌고, 빅토르는 낮엔 의과대학을 다니면서 밤엔 술집 주방에서 일을 한다. 이때 칠레에 의사 출신 가운데 가장 유명하며 보건부 장관에 올랐고 30년 후엔 칠레의 대통령이 될 살바도르 아옌데와 인연을 맺게 된다. 그건 30년 후이니까, 30년 동안 서류상 부부인 유능한 외과의사 빅토르와 역시 유능한 피아니스트이자 후에 고음악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단장으로 활약하게 될 로세르는 서로가 서로의 생활을 향유하며 세월을 보낸다. 이들의 아들 마르셀 역시 훌륭한 시민사회의 일원이 되고 미국으로 유학해 콜로라도 대학에서 광물학 박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1973년, 군부에 의한 쿠데타. 한 국가 내에서 벌어지는 살육은 스페인에서 경험한 참혹한 광경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간혹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과 체스 시합을 벌였던 빅토르 달마우 역시 이웃 여자의 악의적인 고발로 군부에 의하여 체포당해 칠레 북쪽, 세상에서 가장 건조하지만 전 칠레 시민을 먹여 살릴 만큼의 지하자원을 보유한 사막의 수용소로 배치된다. 쿠데타로 인해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의 극악한 수용소 시절을 보낸 빅토르는, 대서양을 건너 태평양 연안의 나라 칠레에서도 쿠데타를 겪고 잔인한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는 수용소를 경험해야 했던 것.

  그래도 작품은 끝나지 않았다. 주인공의 모델이 된 빅토르 페이 카사도는 103세까지 살았다. 그러니 앞으로도 40년이 넘는 세월이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다.


  스토리를 자세하게 썼다고 여기지 마시라. 극히 일부분의 내용에만 살을 붙였을 뿐이다. 이제 결론을 내야겠다. 책 자체로는 재미있다. 그러나 이사벨 아옌데의 전작을 읽어서, 이이에게 일정 수준의 기대치가 생긴 독자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가 된 이사벨 아옌데가 새로운 걸작으로 돌아왔다!”

  느낌표를 동반한 화려한 헌사를 애초부터 믿은 건 아니다. 나는 오직 하나, “이사벨 아옌데”라는 이름만 보고 책을 샀고 읽었고, 실망했다. 다시 말하지만 실망할 책이 아니다. 만일 아옌데가 아닌 작가가 썼다면. 아옌데 치고 결말도 지극하게 상투적이다.





*  남북조 시대. 복거일의 미래소설 <파란 달 아래>에서 달 기지에 정착한 통일국가가 20세기의 한반도 시대를 ‘남북조 시대’로 규정한 것을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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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8-02 09: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사람의 책을 읽는다면 이 책부터 읽는게 좋겠군요. 저는 가면 갈수록 기대되는 작가가 좋지 실망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

Falstaff 2022-08-02 09:57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실실 웃은 적이 있습니다.
아옌데 삼부작으로 충분할 거 같아요. 물론 이이의 작품을 더 읽어봐야겠지만 77세에 발표한 작품이라 그런지 젊은 시절 작품보다 글이 팽팽하지 않아서, 출간 연도를 주의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

그레이스 2022-08-02 1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담겨있는 책, 라자로, 문신 ...구매하고 싶게하는 이야기들, 그런데 덧붙인 얘기들이 있으시다니^^ 멈칫합니다. 에덤 호크실드의 <스페인 내전> 읽은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 합니다. 리뷰로 스페인 내전 리마인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Falstaff 2022-08-02 15:39   좋아요 2 | URL
아옌데를 정말 좋아하는 독자라면 사서 읽을 듯합니다. 보통의 독자라면 권하지 않을 거 같고요. 이젠 차라리 다른 얘기를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좀 그만 우려먹으란 것입죠. ^^;;;

다락방 2023-04-1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아옌데 소설 더 읽고 싶어서 검색해 이 책을 알게 되었는데 이 리뷰가 이렇게 똭! 그렇다면 저는 일단 영혼의 집을 다음 순서로 읽고 아옌데는 잠시 멈춤 하겠어요. <파울라> 읽고 싶은데 품절이더라고요. ㅠㅠ

Falstaff 2023-04-13 18:18   좋아요 0 | URL
아휴.... 이 책에 관해서는 제 별점에 신경쓰지 마세요.
만일 아옌데가 쓴 작품이 아니었다면, 이란 가정이 중요하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