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브 공작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9
라파예트 부인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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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파예트 백작부인은 1634년에 프랑스의 하위 작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1650년에 어머니가 재혼을 해서 열여섯의 나이로 궁정에 들어가 왕비의 시종이 되었다, 등등의 바이로그래피는 지금으로부터 너무 오래, 무려 370년 전의 이야기라서 그냥 넘어가겠다. 하여튼 프랑스에서는 대단히 유명한 작가인 것으로 안다. 어느 책이던가, 아니면 누구한테 들었던 바에 의하면, 프랑스 소설을 읽으려면 라파예트 부인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해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시리즈 89번이 세상에 나오고 11년이 지난 지금에야 허겁지겁 읽어봤다. 이 정도의 호언장담이면 19세기도 아니고, (발음 조심!) 18세기도 아니고, 17세기 작품을 오늘에 되살리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오늘은 결론부터 써보자.

  지금 시각으로 보면 그리 특별하지는 않지만, 이런 작품이 모여서 후배 작가들은 영향을 받고, 그리하여 19세기 소설의 시대가 도래했을 적에 프랑스 소설문학의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딱 한 마디로 하자면, 심리소설의 조상님이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심리묘사는 완전히 연애할 때 여자와 남자 당사자들이 품을 수 있는 갈증, 질투(아, 소설에서 질투야말로 얼마나 매혹적인 소재인지!), 오해, 계략, 허튼 짓 등 사람 마음 속 심리의 기승전결을 실감나게 써 놓았다는 의미다. 물론 쇼데를로 드 라클로가 1782년에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를 통해 다시 한 번 연애와 타락에 관한 아슬아슬한 심리의 극단을 보여주었지만, 드 라클로는 여사님보다 120년이나 지난 다음이었다. 모르긴 해도 클레브 백작부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후대의 작가들 가운데 적어도 19세기에, 무조건 서사적 재미를 향해 질주했던 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이를 뺀 나머지 소설가들, 장황한 필설과 주인공들의 뇌 돌아가는 소리가 처음부터 끝까지 찰찰 흐르는 것 같은 소설을 쓴 작가들 모두 라파예트 부인에게 빚지지 않은 이들은 거의 없을 듯하다는 것.


  장소는 프랑스 궁정과 공작 계급이 거주하는 별장, 저택, 성 등등. 시대는 앙리 2세. 부르봉 왕가를 연 나바르 왕 앙리 4세는 지금 말한 앙리 2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남편과 먼 친척이긴 하지만 카틀린 드 메디시스의 아들들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에 죽음 같은 갈등을 한 번 거쳐야 한다. 이때가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신성로마제국이 얼키고설킨 시기로 ①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맏따님인 메리 1세, 피의 메리, 블러디 메리가 죽어 엘리자베스 공주가 여왕에 등극하고, ② 프랑스에선 앙리2세가 공주 엘리자베트를 에스파냐의 늙은 왕 필리페 2세에게 시집 보내는 걸 축하하는 스포츠 시합을 열어 스스로 기마 창싸움에 출전했다가 창이 부러지면서 튀어나온 나뭇조각이 눈에 박혀 11일 동안 고생만 하다 죽는 바람에 왕세자비이자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가 왕비에 오르면서 왕비의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기 시작, 조만간 새로 등극한 샤를 9세도 젊은 나이에 죽자마자 메리 스튜어트 역시 메디시스 대비한테 스코틀랜드로 쫓겨나 험한 인생을 마감할 예정이며 ③ 에스파냐는 프랑스와의 종전 조건으로 처음엔 왕자 돈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를 정략결혼 시키려고 했다가 신랑을 아버지 필리페 2세로 바꾸자고 아우성을 치는 우여곡절을 거쳐 급기야 앙리 2세가 숨이 넘어가고난 다음에 에스파냐에서 이미 호호 할아버지인 필리페 2세와 첫날밤을 치루게 된 반면, 합스부르크 왕가라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샤를 캥(카를 5세)을 겸하며 에스파냐 최대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던 필리페 2세의 갓끈이 달랑달랑 끊어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햐, ① ② ③이 한꺼번에 일어났다는 게, 거 참, 신기하지? 좀 기다리면 스코틀랜드로 쫓겨난 메리 스튜어트까지 엘리자베스 여왕한테 목이 댕거덩, 잘려 죽는 일까지 벌어지고, 프랑스에선 신교냐 구교냐 하는 문제 때문에 수 만명이 몰살당하는 일도 벌어지는 유럽 중근세 역사의 가장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시기이다. 물론 버지니아 울프 팬이라면 조만간 올랜도 역시 태어날 시기라고 주장할 수도 있고, 뭐 그렇다.


  등장인물을 출연 순서대로 한 번 보자. 정말 빵빵한 집안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야코죽지 말자. 다만 인물들은 정사에 나오는 대로가 아니라 라파예트 여사님께서 자기 마음대로 각색한 것이니 이들의 묘사가 진실이라 오해하지는 말자.


  앙리 2세. 프랑스 왕. 우아하고 친절하고 다정한 품성. 만능 스포츠맨. 아빠의 정부favorita였던 발랑티누아 공작부인의 정부paramour이자 애완견.

  발랑티누아 공작부인. 부왕의 애인이었다가 아들 애인도 겸했음. 식성도 좋다. 역사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인물.

  엘리자베트 드 프랑스 공주. 에스파냐 왕비 예정자. 총기있고 치명적인 아름다움 장착.

  메리 스튜어트. 프랑스 왕세자와 혼인. 외모, 지성으로 완벽.

  나바르 왕. 앙리 4세의 아버지. 기품있고 전쟁에 탁월.

  기즈 공작. 뛰어난 재능. 혁혁한 전공. 깊은 지성과 고상하고 품격있는 영혼? 그래서 저 훗날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에서 눈썹을 휘날리며 신교도 학살하라 명령. 몽모랑시와 권력 분할.

  로렌 추기경. 기주 공작의 동생. 야심만만, 총명한 두뇌. 놀라운 언변. 그 나물에 그 밥.

  콩데 공. 나바르 왕의 동생. 1대 콩데 공작. 고귀하고 위대한 정신.

  느베르 공작. 인생이 영광 그 자체. 세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클레브 공작, 주인공의 남편.

  클레브 공작. 가문의 대표. 너그러우면서도 신중. (다른 말로 우유부단)

  샤르트르 대공. 방돔 가문의 후손. 안색좋은 미남. 늙은 바람둥이. 용감, 대담, 자유의 대명사

  느무르 공. 불어라서 “느무르”로 쓰지 우리 말로 하면 “느물느물”의 “느물” 대공. 남주. 자연의 걸작이라 불릴 만큼의 미남. 지성, 용모, 행동, 기타 등등 한 번 보면 눈길을 거둘 수 없는 남자. 그래서 문제아. 돈 많고, 쌈 잘하고, 잘 생기고, 게다가 공작. 재수없다. 남 주인공.

  몽모랑시 원수. 제롬 K 제롬의 빼어난 소설 <보트 위의 세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 수캐의 이름과 같지만 여기선 왕실업무 대부분을 관장하는 대신.

  생탕드레 대장. 왕의 왼팔. 총신 대우. 몽모랑시와 더불어 발랑티누아한테 잘 보이려 난리.

  당빌 공. 몽모랑시 원수의 둘째 아들. 메리 왕세자비를 향한 가망없는 사랑.

  샤르트르 양. 16세. 갖 사교계 대뷔한 샤르트르 대공의 조카. 클레브 공작과 애정 없는 결혼. 여 주인공. 역사상 가상의 인물


  기타 무지하게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거의 전부가 귀족이다. 저 루브루 왕궁 지붕에 올라가서 조약돌 던지면 귀족이 맞는다. 이들을 먹여살리느라 백성들 등골 빠진다는 이야기는 이때부터 300년 가까이 더 흘러야 말이 나오겠지만 하여간 귀족 나부랑이들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른 건 하나도 없고 권력과 돈과 연애를 위해 아드레날린 분비에 여념이 없다. 다른 거? 일체 없다.

  책은 오직 하나, 연애와 연애를 하는 인간들의 대뇌 피질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그래서 샤르트르 양이 클레브와 별로 애정 없이 결혼해 클레브 공작부인이 되고, 자연 최고의 조화라고 일컫는 느무르 공의 대책 없이 “느물느물한” 아니 "느무르느무르한" 대시와 이에 대한 클레브 공작부인의 대처를 그리고 있다. 작품의 스코프는 당시 격변하는 유럽의 역사와 비교하면 정말 사소한 연애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느무르 공과 남편 클레브 공작, 그리고 공작부인의 심리에서 요동을 치는 광경을 묘사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냥 이게 다다. 사랑 없이 결혼한 유부녀의 외갓남자를 향한 사랑과, 한 독신 바람둥이 남자의 유부녀에 대한 사랑, 혼자만 아내를 열라 사랑하는 남편의 숙명적 트라이앵글.

  자, 이제쯤 책이 주장하는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좋겠다. 책의 결론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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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3-15 06: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럽의 왕가들이 서로 정략결혼한 때문에 사건이 연결된듯요.^^
올랜도! ㅎㅎ
느무르 공!
라파예트 작품 궁금했는데 감사합니다 ^^

Falstaff 2022-03-15 09:07   좋아요 3 | URL
ㅎㅎㅎ 역사적 이야기도 제법 나오기는 하지만 이 책은 전적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이라고 해야겠습니다. 백자평 포함해서 아래 잠자냥 님이 쓰신 대로 아이고, 징글징글하게 사랑 타령 나옵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2-03-15 0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느무르공 진짜 너무 느묾느물하지 않아요? 으윽… 클레브 공작부인은 또 얼마나 예쁘다는 것인지 ㅋㅋㅋ 전 이 작품 보면서 <겐지 이야기> 생각 많이 나더라고요. 어떤 면에서는 많이 닮았어요. 두 작품 모두 각자 나라의 후대 문학에 큰 영향을 준 거 같은데….. 아이고 저는 그놈의 사랑 징글징글합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2-03-15 09:12   좋아요 3 | URL
초반 지나자마자 느무르 공이 느물공으로 팍 떠오르더라고요. 이후엔 이름도 안 잊히던 걸요. ㅋㅋㅋㅋ
<겐지 이야기>는 그렇게 긴 작품 속에 일본 왕궁의 진짜 별 거 없고 여자들 숨도 못 쉬게 하는 법도에 관해서 상세하게 적혀 있잖아요.
앗, 맞습니다. <겐지 이야기>가 없었더라면 일본 특유의 사소설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근데요, <클레브 공작부인>이나 <겐지 이야기>나 작품의 출현 시기를 감안하면 대단한 일일 거 같아요!!

다락방 2022-03-15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 출근길 버스안에서 이 리뷰 올라온 거 보고 넘나 설레었어요. 진짜 오랜만에 제가 읽은 책이라서요. 크- 저는 이런 책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간 사랑에 대해 알지 못했던등장인물이 사랑에 대해 알게 되고나서 막 열정에 휩싸이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깨닫게 되고 그러는거요. 크- 제가 이 책 하도 오래전에 읽어서 뭐라고 써놨나 봤더니 아주 사랑사랑하는 것만 인용을 잔뜩 해뒀더라고요? 사랑에 들끓는 클레브 공작부인 되시는 것입니다! >.<

Falstaff 2022-03-15 11:33   좋아요 1 | URL
ㅎㅎㅎ 근데요, 저는 이런 사랑은 해보고 싶었던 적이 없던 거 같아요. 서로 밀당하고 다른 사람한테 마음 가고. 우.... 별로예요.
걍 담백하게 둘이 사랑하고, 싫증나면, 이제 싫어졌어. 우리 찢어지자, 해서 이별하고, 다른 애인 생겨 또 연애하다가 길가에서 우연히 전 애인 만나면, 오랫만이야, 가끔 생각났어. 잘 지내지? 하면서 악수하고나서 가던 길 가고, 이게 좋잖아요.
ㅋㅋㅋ 이렇게 쓰고보니 꼭 선수같네요. 근데 아닙니다. 연애경력 별로 없어요.

잠자냥 2022-03-15 1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한 부부가 다들 서로에게 애인 있는 걸 인정하는 분위기에서 놀랐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쏘쿨~ ㅎㅎㅎ 역시 프랑스인가~

Falstaff 2022-03-15 19:19   좋아요 2 | URL
유럽이 다 비슷하지만 이 가운데서도 제일 난장판이 프랑스 궁전인 건 더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만요. 프랑스 사람들 하여간 못 말립니다.
아 그래서 예술이 그리 창궐, 창궐? 창궐! 하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3-15 15: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19세기 위대한 프랑스 소설이 이 소설에 빚을 졌군요! 저는 19세기 전 소설은 너무 옛날이라 읽기 싫었는데 프랑스 문학에서 이 책은 필수라니 급 땡깁니다.
프랑스 소설은 유난히 불륜, 술수, 질투 이런게 많은거 같아요.😅

Falstaff 2022-03-15 19:21   좋아요 4 | URL
넵. 프랑스 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작품이든지 17세기, 18세기 작품은 읽기가 쉽지 않더군요. 저는 그런 책들을 일종의 의무감 혹은 이후 세대 작품을 읽기 위한 훈련이다, 싶은 마음으로 읽고는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