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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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인숙. 1958년 개띠.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1988년 첫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출간. 기가 막히게 내 시선에서 비켜간 시인이다. 등단 당시 난 포천 이동 이리 노니는 골짜기에서 마빡에 작대기 세 개 달고 있었고, 첫 시집을 낼 때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밤마다 전력을 다해 교육세를 내고 있었다. 물론 황인숙이라는 이름은 들어봤다. 언제 한 번 읽어야지, 마음만 굳게 먹었을 뿐, 여간해 그렇게 되지 않던데, 그건 만 스무 살 되는 날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하는 소설가 김인숙과 이름이 같아 혼동한 것도 아주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일 듯하다. 한 번도 읽지 않았으면서도 마치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드는 거.
  그리하여 오래 마음먹은 거에 비해, 그저 황인숙, 이름 하나 보고 시집이 눈에 띄어 서슴지 않고 사 읽었으니, 23회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자명한 산책》. 그저 예사롭게 첫 번째 나오는 시를 읽기 시작했고, 시행이 더해가면서 허허허, 웃음이 나왔다. 시가 웃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시를 쓰는 시인을 어떻게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세월이 심술궂어서. 바로 이 시다.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치 말자.


  * 이인성의 소설 제목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서 차용.  (전문)

 


  시가 재미있다. 너 힘든 건 네가 알아서 처리하란 얘기. 시에서 말하는 이인칭 ‘당신’이 시인 자신이 될 수도 있으며, 시를 읽는 독자일 수도 있다는 역설적 함의도 상쾌하다. 그러나 역시 마지막 연이 기가 막힌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는, 강한 청유형 어미. 저 ‘말자’라는 말이 어떻게 ‘강한 청유형’이냐고?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 나한테 말고 강에 가서 강한테 직접 말하라고 앞에서 명령을 한 바로 뒤에 나왔으니, 적어도 명령형이거나 강한 청유형이지. 또는, “이겠지.”
  <강>을 재미있게 읽어서 다른 시도 이것과 비슷하겠거니, 하는 마음이 있었다. 꼭 그럴 거야.
  그런데 그건 아니었다. 이후 게재한 시에 <강>처럼 조금은 거칠면서 속 시원하게 한 번 뒤집어주는 작품은 거의 없다. 바로 뒤에 나오는 <골목길>이후 상당한 분량이 시인이 길고양이 엄마로 사는 남산 언덕바지 해방촌의 풍경이다. 읽어보자.

 


  골목길

 


  울퉁불퉁
  동네 집 사이로 난
  좁은 계단 길에
  부러진 목발 기대앉아 있네요


  작은 목발이에요
  손잡이에 감긴 하얀 헝겊에
  뽀얗게 손때가 묻어 있어요
  참 작은 목발이에요
  부러졌네요

 

  지나가는 사람 드문
  울퉁불퉁 좁은 계단 길
  햇빛 한 줌, 잡풀 한 줌
  강아지 오줌 자국 한 줌. (전문)

 


  읽는 순간, 81번 시내버스 종점 해방촌의 저 까마득한 계단이 그려진다. 산동네 또는 달동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세월이 지나 요즘에 그래도 조금 어색해진 곳. 시인은 제목을 <골목길>이라 해놓고, 골목이 계단으로 되어 있어서 이후는 “계단 길”이라 부르는 곳. 그곳엔 누군가 쓰다 버린 목발, 그에겐 매우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을 목발이 부러진 채 버려져 있기도 하고, 햇빛이 한 주먹 들어온 것처럼 잡풀도 나 있으며, 강아지 오줌 자국도 그려진 곳이다. 이런 장소를 함민복이 보았다면, 마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에 든 <금호동의 봄>에서처럼 계단이 시작하는 곳에 굵은 고무 파이프를 댄 똥차 이야기를 했음직하다.
  황인숙이 시집을 앞에서 인용한 <강>으로 시작해서 그렇지, 알고 보면 길고양이 돌보는 마음 약한 시인이다. 이이는 다른 사람들이 해대는 모진 소리를 견디기 힘들어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신 역시 그런 언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마음 아파한다.

 


  모진 소리

 


  모진 소리를 들으면
  내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더라도
  내 귀를 겨냥한 소리가 아니더라도
  모진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쩌엉한다.
  온몸이 쿡쿡 아파온다
  누군가의 온몸을
  가슴속부터 쩡 금가게 했을
  모진 소리

 

  나와 헤어져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고개를 수그리고
  내 모진 소리를 자꾸 생각했을
  내 모진 소리에 무수히 정 맞았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진 소리,
  늑골에 정을 친다
  쩌어엉 세상에 금이 간다. (전문)

 


  이렇게 자잘한 삶이 시인의 주변에 널려 있다. 해방촌에 가려면 남대문에서 독일문화원 길, 소월로를 따라 올라가다가 3호 터널 경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후암동 남동쪽 동네다. 즉 남산 아래. 그러니 조금만 올라가면 공원도 있겠지. 시절은 4월 중순이나 됐을까? 공원의 벚나무에서는 오소소,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한 소절 비가 내리고
  바람 불고
  벚꽃나무 심장이
  구석구석 뛰고

  두근거림이 흩날리는
  공원 소롯길
  환하게 열린 배경을
  한 여인네가 틀어막고 있다
  엉덩이 옆에 놓인 배낭만 한
  온몸을 컴컴하게 웅크리고
  고단하고 옅은 잠에 들어 있다

 

  벚꽃 반쯤 떨어지고
  반쯤 나뭇가지에 멈추고. (전문)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청와대를 방문한 2019년 오전 열 시 반, 시청 네거리엔 모든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소공동 조선호텔 옆 지하도 계단실에서는 머리를 산발한 누더기의 투실투실한 여자가 때가 꼬질꼬질하게 덮인 얼굴을 드러낸 채 사지를 활짝 벌리고 잠에 빠져 있었다. 계단의 갈림길을 모두 차지한 여자를 피해 지나가야만 정문을 통과할 수 있는 조선호텔에서는 오랜 연애 끝에 초등학교 동창생 간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열렸는데, 만일 황인숙이 이 결혼식의 초대장을 받았다면, 지하도 갈림길에서 적어도 10초 동안은 이 노숙인을 바라보며 잠깐 머물지는 않았을까. 비록 공원 소롯길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던 작은 몸집의 여인네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작은, 바닥에 함부로 놓인 배낭 만큼 작은 몸집의 여자가 잠에 빠져 있을 때, 분홍 벚꽃은 반은 피고, 반은 지고.

그래, 사는 게 들어 있는 시가 좋다. 시의 잔 속에 작디작은 벚꽃이라도 한 송이 떠 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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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2-02-24 0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9년 그 일을 기억하시는 분은 10초보다 더 오래 가지고 계시군요^^
벚꽃이 반쯤 피고 반쯤은 떨어진다는 구절이 굳이 마음속으로 스며들고 마네요.

Falstaff 2022-02-24 09:01   좋아요 0 | URL
ㅎㅎㅎ 날짜도 기억한답니다. 6월 30일.
마음에 든 시집입니다. 기억했다가 또 읽어봐야겠어요. ^^

수이 2022-02-24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숙이 언니 좋아요 ❤️

Falstaff 2022-02-24 13:45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하기로 했어요. ^^

프레이야 2022-02-24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의 시집 리뷰엔 뭔가가 있어요
뭐지뭐지 하다 좋아요 꾹.
이 언니, 고양이 줄 간식과 물을 늘 휴대하고 다니는 시인으로 유명하죠.
강, 자명한 산책, 오랜만에 호명되네요.
반쯤,이라는 말이 오늘따라 듣기 좋습니다.

Falstaff 2022-02-24 13:47   좋아요 0 | URL
에이, 있기는 뭐가 있습니까. 그저 아마추어의 감상만 있는 독후감입니다.
이제 봄이어야 하는데 오늘 아침에 영하 10도를 찍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이기는 동장군이 없는 법. 두고 보세요. 며칠만 있으면 산수유가 쪼그만 노랑대가리를 들이밀 겁니다.

stella.K 2022-02-2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그런 일이 있었나요?
그 사진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나요?
사진 제목이 있을텐데. 보고 싶네요.

Falstaff 2022-02-24 15:27   좋아요 0 | URL
^^;; 긁적긁적.....

stella.K 2022-02-24 15:36   좋아요 0 | URL
헉, 뭐예요? 안 갈쳐주실 거예요?
쳇! 몰라욧!...엉엉~

Falstaff 2022-02-24 15:47   좋아요 0 | URL
제가 형광등이라서, 지금 어떤 장면을 보시고 사진이라 하실꼬.... 아이고, 머리 속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막 들리는 거 같습니다. ㅠㅠㅠㅠㅠㅠ

stella.K 2022-02-24 15:5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자책까지...
전 당연히 아시는 줄 알고.
저 트럼프 방한 때 때 꼬질꼬질한 여자가
대자로 자는 모습요.
저 h님 댓글에 쓰신 6월 30일이면 무슨 신문에 난 기산가요?
저야말로 덩달아 자갈이 굴러가는데요?ㅋㅋㅋㅋ

Falstaff 2022-02-24 16:07   좋아요 1 | URL
그거, 사진 아니고요, 제가 육안으로 직접 본 장면입니다.
퉁퉁 부은 얼굴이 그냥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은 정도를 넘어 손으로 긁으면 손톱 밑에 콜타르 같은 것이 까맣게 낄 거 같은 여자가 허리를 약 7cm 정도 내놓고 널브러져 지하도 중간 갈림길에서 자고 있었어요.
그날 결혼한 커플의 신부가 제 친구 문영이의 큰딸이었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22-02-24 16:22   좋아요 1 | URL
아하! 그렇군요.
제가 오독했군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