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대산세계문학총서 169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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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소설 열여덟 편 가운데 열일곱 작품에서 사람이나 의인화한 동물이 죽는다. 중요한 등장인(동)물이 죽지 않는 유일한 작품 <인시엔소 나무 지붕>에서는 주인공 오르가스가 옆집 개를 총 쏴 죽인다. 그러니 모든 작품에서 적어도 죽음이 등장하지 않는 건 한 편도 없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죽음에 대한 집착, 그걸 넘어서 ‘과잉 의존’ 수준이 상당히 궁금했다. 책을 다 읽고 역자 해설을 뒤져본 후에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는 1878년 12월 31일 우루과이에서 아르헨티나 부영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다. 12월 31일생.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따지자면 낳고 하루 만에 두 살이 된, 우루과이 태생 아르헨티나 아기였다. 그러나 유럽 식으로 오라시오가 두 살 때였다니까 1881년의 어느 날 어머니 파스토라는 이제 말문이 조금 트인 오라시오를 안고 사냥 나간 남편 프루덴시오를 기다리고 있었다. 숲 속에서 정글도刀, 마체테를 왼쪽 엉덩이에 매단 채, 오른손으로 엽총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던 남편은 언제나처럼 허리 높이의 철사 울타리 훌쩍 뛰어 넘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에 남편이 몸을 날려 왼발을 디딘 땅 위엔 손바닥 만한 매끄러운 나무껍질이 있었고, 프루덴시오의 왼발 장화가 그걸 수직이 되는 방향으로 밟았다면 혹시 몰랐겠는데, 비끗, 장화의 바깥쪽 혹은 안쪽이 먼저 닿는 바람에 몸 전체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오른팔과 오른손에 힘을 주었다. 예상치 않은 신체운동을 하는 바람에 손가락에 걸려있던, 돼지 잡는 엽탄이 장전되어 있는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무서운 속도로 총구에서 튀어나온 총알은 단번에 남편의 몸을 관통해, 아내와 두 살배기 넷째 아들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피를 콸콸 흘리며 즉사해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아내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의 오발 사고만 진실이고 나머지 장면은 거짓말이다. 그러나 책을 읽어보신 분은 구라를 푼 사연을 짐작하시리라.
  아이를 넷 또는 그 이상을 출산했지만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어머니 파스토라는 남편이 죽고 10년 만인 1891년에 아센시오 바르코스와 재혼한다. 이때 오라시오가 열두 살.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든 시기. 계부 아센시오와 엄마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을 거 같지? 천만의 말씀. 계부와 아센시오는 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아마도 자신은 기억하지 못했겠지만 10년 동안 엄마 또는 주위의 많은 종자들을 통해 아버지가 어떤 비극적 운명의 낫질에 의하여 순식간에 죽어버렸는지 숱하게 들었을 것이어서 사내아이들에게 ‘가끔’ 볼 수 있는 ‘아버지 선망’이 좋은 관계에 보탬이 되는 방향으로 흘렀을 것도 같다. 좋은 시절이 딱 5년 갔다. 드디어 1896년이 오고, 오라시오 키로가는 열일곱 살이 되고, 계부 아센시오는 덜컥, 뇌출혈로 반신불수에 빠져버린다. 계부는 가장인 자신이 가족의 삶에 장애물이 된 것을 비관하여 총알을 장전한 엽총의 총구를 입에 물고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밀어, 창을 울리는 총성과 동시에 뒤통수로 피와 뇌수를 뿜으며 역시 즉사하고 만다. 방에서 총소리가 들리자 청소년 오라시오 키로가가 달려가 방문을 벌컥 열었고, 피범벅으로 난장판이 된 친애하는 계부의 시신을 목격하고 만다. 이 사건은 오라시오에게 오랜 세월 트라우마로 작용했다고.
  1902년 스물세 살이 된 키로가는 아메리카의 부르주아 백인들이 항용 그러하듯 유럽 여행을 하고 돌아와 문예 창작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만날 글만 쓰고 있을 수는 없어서 친구 페데리코 페란도와 총을 손질하다가, 글쎄 총기 오발사고 내는 건 키로가 가문의 내력인지, 오라시오 역시 아빠 프루덴시오의 대를 이어 우연히 장전이 된 총을, 우연히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친구 페데리코를 카론의 배에 태워 스틱스 강을 건너게 한다. 명백한 과실치사지만 키로가는 4일 동안만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를 받고 무죄 방면된다. 역시 부르주아의 돈과 전직 부영사의 아들이란 권력이 좋기는 하다.

 

  무죄를 받기는 했지만 사람 하나가 죽어버린 사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어서 키로가는 ‘도망치듯’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결혼을 한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대도시에서 죽은 듯 살아야 할 터이지만, 키로가는 아르헨티나 미시오네스 주state의 산이그나시오에 관광차 갔다가 옛 원주민의 유적과 대자연에 경도되어 1910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미시오네스로 이사를 해버린다. 이 미시오네스 주의 자연풍광과 무지막지한 우기, 건조한 열대 기후, 원주민들과의 관계, 이곳에 들어온 백인 이방인들, 원시적 자연 속의 동물, 특히 아나콘다, 이런 것들이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열여덟 작품 가운데 열여섯 개를 차지하여, 작가에게 많은 도움을 주긴 했겠지만, 여자, 아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당신 같으면 당대 세계 최고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버리고 저 원시림 한 가운데서 살고 싶었겠느냐고. 나날이 비통해 하던 아내는 5년 동안 차곡차곡 우울증을 보태고 있다가 드디어 농약을 벌컥벌컥 마셔버리고 만다. 당시 약품의 독성이 그리 강하지 못해서인지 아내는 8일 동안 극단의 고통을 동반한 죽음의 경계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죽고 만다.
  아내가 죽은 다음에야 절망에 빠진 키로가는 두 아이와 함께 다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와 재혼을 했지만 후처 역시 일찍 갔다. 키로가가 혼자 되기 전인지 후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1932년에 그는 다시 미시오네스로 돌아가 자연 속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불과 5년 후 암 진단을 받고 병실에서 1937년 58세의 나이로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해버린다. 키로가가 죽은 다음에도 그와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이 차례로 자살로 운명을 가르는 등, 이이의 일생이야말로 말 그대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한 생애였다. 그러면 뭐해. 난 하나도 안 부러운 걸.

 

  책이 앞부분 두 편은 발표시기가 1909년 <목 잘린 닭>과 1907년 <깃털 베개>. 아직 키로가가 미시오네스의 원시림에 정착하기 전이다. 산이그나시오 부근 야베비리 천川에 정착하기 위하여 185헥타르의 땅을 구입하긴 했지만 아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던 시기다. 책을 다 읽으면 오라시오 키로가의 무대는 당연히 미시오네스 일대이며, 죽음과 폭우를 동반한 대자연, 그리고 소외라고 할 수 있지만 앞의 두 작품을 읽을 때까지는 키로가의 독특한 그로테스크, 위대한 포Poe와 후대에 등장할 엽기 공포 소설작가들을 능가하는 오소소한 그로테스크라고 여길 수도 있다.
  <목 잘린 닭>은 마시니, 페라스 부부 사이의 바보 네 형제와 어여쁜 막내 누이동생에 관한 이야기다. 결혼 14개월 만에 자신들의 행복을 완성시켜줄 아들을 낳았지만, 생후 20개월이 되던 날에 끔찍한 경련을 일으키며 지능과 영혼, 심지어 본능까지 몽땅 빠져나가 그저 늘어진 멍청한 바보가 된 첫 아이. 생후 18개월 만에 똑 같은 과정을 밟은 둘째 아이. 형들의 절차를 똑같이 따라간 쌍둥이까지. 이 과정이 절대 순탄할 수 없어서 부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고, 그러면서도 인생이란 게 다 그게 그거라 또다시 임신을 해 이번엔 건강하고 어여쁜 딸 베르티타를 낳아 네 살까지 잘 키웠다. 그러나 이 가정에는 언제나 불운의 손톱이 살갗 깊숙이 박혀 있었으니, 그게 얼마나 섬뜩한지.
  두번째 작품 <깃털 베개>는, 당신이 마음 약한 독자이고 이 책을 읽었다면, 어쩌면, 앞으로 당신은 편안한 밤과 어둠의 숙면은 물 건너 갔든지, 날 샜다고 봐야한다. 이 작품은 키로가의 작품 치고는 도시풍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렇다고 밀림의 야수성이 없는 건 아니다. 야수성이 없기는커녕 무지하게 엄청나고 잔인한 야수가 당신의 바로 옆에도 있을 수 있어서, 서서히 고통 속에서 온 몸의 피를 공양해 한 마리의 징글징글한 야수를 자기도 모르는 새에 키우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도 있다.
  다시 비슷한 말을 하자면, 대자연 속의 한 개체로, 낳고, 죽고, 취하고, 반항하고, 투쟁하다가 쓰러지는 광대한 장면, 그러나 연속되는 작품 속에서 오히려 대자연에 들기 전의 (비교적) 도시풍의 소품이, 키로가의 대표작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지만, 더 맛있게 읽혔다.
  재미있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이야기할 때 절대 뺄 수 없는 부록이 있다. 바로 <완벽한 단편 작가를 위한 십계명>. 십계명을 다 소개하는 야만스러운 짓은 할 수 없으니 첫 번째 계명만 소개하면서 독후감을 끝낸다.

 

  1. 거장 ―포, 모파상, 키플링, 체호프―을 신처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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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공 2022-02-15 08: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키로가는 소설보다 더 공포스러운 삶을 살았네요ㅜ. 뭔가 악귀가 집안에 씌였나봐요. 문학동네판 단편선에도 실렸던 목 잘린 닭과 깃털 베개...다시 읽어도 으스스합니다요. 이 글을 아침에 읽어서 다행^^

Falstaff 2022-02-15 08:11   좋아요 2 | URL
정말 기구한 팔자의 작가입니다. 부르주아 명문가면 뭐해요, 하나도 안 부러운 걸.
^^

공쟝쟝 2022-02-15 09: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분... 이 쯤하면 범인은 키로카 아니여요? ㅋㅋㅋ ㅋㅋㅋㅋㅋ (키로카가 무덤 뚫고 나와서 그거 아니라고 항변할 댓글이다)

Falstaff 2022-02-15 09:55   좋아요 3 | URL
정말 그럴 듯한 추리입니다!!! 우짜면 이런 생각을 하실 수 있을꼬.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2-15 1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거의 매일 리뷰를 하시는 군요.
읽고 있는 책도 바쁜데... 애드거 앨런 포의 우울과 몽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Falstaff 2022-02-15 10:21   좋아요 4 | URL
고흐의 집을 아시나요.... 이거는 아주 오래 전에 쓴 잡글이니 빼야 합니다. ㅎㅎㅎ
일 주일에 네 권 가량 읽으려 하거든요. 시집 같은 얇은 책 한 권을 포함해서요.
포, 이런 장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 사람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coolcat329 2022-02-15 14:3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세상에 죽음과 사고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네요.
무슨 팔자가 이리도 무서운지요...
단편작가 십계명이 궁금해서라도 도서관에서 빌려와야겠어요.
전체적으로 섬뜩하고 무서운게 또 끌립니다. 근데 별4개라 사지는 않으려구요😙

Falstaff 2022-02-15 15:09   좋아요 5 | URL
주변에 이런 사람 있으면 골치 아픕니다. 아휴....
십계명, 읽어볼 만합니다. 도서관 이용? 적극 권장!!!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