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망다랭 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세기의 프랑스. 온 유럽을 말발굽으로 짓밟고 다니던 키 작은 코르시카 사나이가 1815년 6월 벨기에의 워털루 평야에서 영국과 프로이센 연합군한테 거의 다 이겼다가 마지막 카운터 펀치 한 방을 맞고 쌍코피를 흘린 이후에, 일설에 의하면 코르시카 사내가 자기보다 키가 큰 프랑스 남자들의 씨를 말려서 이후 순종 프랑스인 가운데 씨알 굵은 종자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확인한 바는 없지만 그래서 그런지, 55년 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914년 1차 세계대전, 마지노 선을 우회해 아르덴 고원을 돌파한 1940년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하고 붙었다 하면 얻어터지느라 해 지는 줄 몰랐다. 사실 기원전에 쓴 <갈리아 전기>를 보더라도 라인 강 동쪽에 터를 잡고 사는 야만인들을 정복하는 일이 카이사르의 가장 큰 골칫거리였을 만큼 그쪽 인종들에게, 모르기는 몰라도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많았던 거 같다. 갈리아 인이라고 같은 갈리아 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황제 근위병은 전부 이 라인 동쪽 골 족의 용병으로 채웠으며, 후계 없이 죽은 황제의 다음 황위는 거의 이 용병 게르만 족이 결정을 했거나 적어도 승인을 받아야 했을 정도였으니까.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명저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를 참조하셔도 좋다.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땅에 첫 발을 디딘 독일군은 5주 만인 6월 13일, 드디어 파리에 입성한다. 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와 나치 일당을 나는 솔직히 이해하기 어렵다. 왜 전쟁을 벌였을까? 애초에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여기다가 미국까지 합한 연합군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 시뮬레이션을 해보았을까? 만일 그렇다면 그토록 훌륭한 시뮬레이션은 누가 어떤 목적으로 진행했을까. 이 책 <레 망다랭>을 읽기 전에 페터 바이스의 역작 <저항의 미학>을 미리 읽으면 좀 더 편할 지도 모른다. 나도 <저항의 미학>을 읽기 전까지는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어찌하여 독일의 군비증강과 히틀러와 나치에 의한 전체주의화를 용인, 적어도 묵인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② 1차 대전으로 그렇게 곤혹을 겪고도 또 독일로 하여금 군대를 키우고 무기를 생산하게 내버려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②부터 말하자면, 1917년, 소비에트의 탄생이 주된 이유였다. 보라. 프랑스, 영국 등 전통의 연합국은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자본주의, 라기보다는 부르주아 권력에 의한 국가였다. 예전에 러시아라고 부르던 영토에 자리잡은 소비에트 연방, 소련은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세계 적화를 목표로 공산주의의 확산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레닌에 의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 인터내셔널, 이라고도 하는 코민테른은 세계 각국에 지부를 두고, 심지어 당시 조선 공산당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미국을 포함한 부르주아 국가들은 서유럽 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보더border 지역으로 여겨, 독일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이 소련의 서진을 막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실제로 키 작은 오스트리아 아마추어 화가와 나치들은 한편으로 전체주의를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집시를 말살하기 시작했다. 이것, 즉 (집시는 모르겠고)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수용소 처분과 학살을 서유럽과 미국이 반대했다고? 누가 그래? 알베르 코헨의 명작 <주군의 여인>에서는 프랑스 부르주아의 입에서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글쎄 히틀러한테도 배워야 할 게 있다는 말이야.” 물론 소설 속의 주요 증오 대상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유대인이지만, 바이스는 작품을 통해 유대인보다 공산주의를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워했던 서방 국가들이 독일의 무장을 못 본 척했다고 주장한다.
  ①의 문제, 히틀러로 하여금 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것 역시 연합군의 잘못이라는 관점이 대세다. 애초에 히틀러는 큰 규모의 전쟁을 계획하지 않았다고 한다. 체코를 억눌러 독일인들이 주로 살고 있는 지역을 통째로 삼킬 수 있어서, 이것 봐라, 하는 마음이 들게 했던 것이 첫 번째 잘못이고, 폴란드를 침공해도 다른 국가들에서 여전히 큰 문제로 삼지 않아 마음을 놓게 했던 것이 두 번째 잘못이라고 한다. 그래 처음에는 대규모 전쟁을 일으킨다면 도무지 승산이 없다고 봤다가, 점점 간이 커져 프랑스하고만 싸우면 확실하게 이길 수 있고 (사실 그랬다.), 영국이 프랑스를 지원해도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봤단다. 이 시뮬레이션도 조금 무리라는 걸 우리는 안다. 영국이 참전했다 하면 다만 시간이 문제지 전통적으로 영국과 한 편이 되어 끝까지 가는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뉴질랜드. 소련과 이 나라들을 무시한 것이 히틀러에게는 불능의 방정식이었는데, 일을 여기까지 끌고 오게 만든 건 전적으로 서방 부르주아 국가들에게 있다고.

 

  1940년 6월 13일 독일군의 지배에 들어간 파리는 1944년 8월 25일, 미군에 의하여 해방된다. 왜 구구절절 말이 많았나 하면, 이 책 <레 망다랭>의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이 좌파 진보세력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1944년 12월 24일, 동거 상태인 앙리와 전직 가수였던 폴(女)의 원룸에서의 조촐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시작한다. 파티에 참석한 인물은 유명한 작가이자 정치에 참여하려는 뜻을 갖고 있는 뒤브뢰유 씨와 이이보다 스무 살 젊은 아내 안, 열여덟 살 먹은 딸 나딘, ‘희망’이란 뜻의 신문 “레스푸아”의 운영자 앙리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뱅상, 랑베르, 세즈나크, 샹셀, 그리고 앙리와 함께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한 무장 레지스탕스의 영웅이자 이름 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사마젤 등이다. 레스푸아의 뱅상, 세즈나크, 샹셀 역시 레지스탕스 출신이며, 랑베르는 자기 아버지가 유대인 애인을 나치 친위대에 밀고해 죽게 만들었다고 믿어 부자간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청년이다.
  프랑스 문화계의 거물 사회주의자 작가 뒤브뢰유 씨는 새롭게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S.R.L을 창설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이를 위하여 앙리의 신문사 레스푸아를 S.R.L의 기관지로 만들려고 자신의 제자이기도 한 앙리를 설득한다. 그런데, 20세기 공산주의를 보면, 공산당은 하다못해 스페인 내전 시기에도 끝없이 권력투쟁을 벌이고, 투쟁마다 승리를 거둬 공산당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당파를 말살한다. “건전한 정신에는 우둔의 악취가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라고 농담 한 마디 했다가 청춘 시절 거덜난 밀란 쿤데라의 이야기는 익히 아실 듯. 공산주의와 공산당은 인정하되 결코 호락호락 활동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음을 21세기의 독자들은 알고 있지만, 좌파 무장 레지스탕스 경력으로 뭉친 1944년 말의 사회주의자들은 결코 공산당과 공산주의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뒤브뢰유 씨가 새로운 사회주의 당파를 만들려고 했던 것.
  앙리도 S.R.L이 기관지가 없으면 자기들의 주장을 펼 공간을 확보하지 못해 곤란한 처지에 처해질 것임을 이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기관지로 흡수된다면 모든 중도와 좌파 독자들 가운데 공산당이나 S.R.L과 뜻을 달리하는 독자들의 이탈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은 기관지가 되기는 하지만. 이때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스크리아신이라는 러시아 출신 망명자가 있다. <붉은 낙원>의 저자이기도 한데, 이이가 소련 내의 거대 수용소에 관한 기사거리를 가져온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이 떠오르는데, 스탈린 정권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생산에 종사하는 수 많은 프롤레타리아를 먹이고 입히기 위하여 특별한 생산 조직을 운영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하여 스탈린은 전국에 1천5백만에서 2천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수용소라는 이름의 집단 노동형에 처해 하루에 열네 시간씩 무보수로 일을 하는 새로운 노예계급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저 극동지방 간도 지역의 조선 이민들 역시 1920~30년대에 집단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켜 카레이스키라는 새로운 종족으로 만든 것도 이 때다. 즉 소련 내 유대인 뿐 만 아니라 독일군 포로, 소수민족 등등, 가리는 것 없이 노동할 수 있는 비 러시아인이면 이 노예계급에 합당한 신분을 가졌다는 것.
  사람들에게 “높은 덕성을 지니고, 이해에 좌우되지 않고, 정직하고, 공정하고, 용기 있고, 한결같고, 결점이 없으며 스스로에 대해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성격의 앙리는 이런 내용일수록 좌파신문에서 고발기사가 나가야 하지 피가로 같은 우파 신문에서 특종을 내게 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S.R.L의 대표 뒤브뢰유와 담판을 벌인다. 뒤브뢰유는 이를 거절한다. 만일 레스푸아에 이 기사가 뜬다면 공산당으로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들어와 결국은 S.R.L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라서. 그래 앙리는 뒤브뢰유와 크게 다툰 후 그와 결별하고 다시 독자의 신문매체로 돌아와 1면에 소련의 노동 수용소 실체를 밝히게 된다. 결과는, 뒤브뢰유가 옳았다. 누구나, 심지어 프랑스 공산당 당원들도 알고 있었지만 유럽을 식민지로 만들려 하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을 견제하고 있는 스탈린 소련에 반대하는 자체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다. 끝없이 권력투쟁을 벌여 빠짐없이 승리를 해온 공산당 집단의 당파성. 비록 자신들의 의견이 진실과 다름을 충분히,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속한 집단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거나, 잘못한 행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좌파적 집단 의식에 앙리가 제대로 걸려버렸다. 그리하여 앙리는 그토록 믿었던 젊은이 라숌으로부터 신문지상으로 협잡꾼, 모리배, 사기꾼 등, 활자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가장 독한 욕설을 원없이 듣게 된다.
  굳이 독후감을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은, 여기까지 진도가 나가야 <레 망다랭>이 별점 다섯 개의 계관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앞부분, 1권을 읽다가 생각보다 재미없다고 쳐도, 하여간 여기까지는 진도를 빼시라. 위에 쓴 것 말고도 참 다양한 군상이 등장한다.

 

  여기에 <레 망다랭>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등장인물에 부여하는 성격이다. 완전하게 선한 인간은 한 명도 없다. 위 문단에서 마치 극단의 높은 인격을 갖고 있는 것처럼 인용한 앙리 페롱은 두어 살 많은 여인 폴과 동거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심각한 정신병에 걸릴 정도의 집착을 갖게 만들 정도로 자유연애를 구가하고 있다. 극 중에서도 포르투갈에 초청받아 몇 달에 걸쳐 여행을 할 예정이면서도 처음부터 폴과 함께 갈 생각은 하지도 않았고, 계획에 없이 뒤브뢰유의 열여덟 먹은 천방지축 딸 나딘과 동행한다. 이건 사생활이라 치더라도, 공정하기 이를 데 없다는 랑베르의 찬사가 어느 순간에 배신과 위선으로 바뀌는 파렴치한 짓, 범죄수준의 허용되지 않는 행위를 공적으로 하기도 한다.
  나딘 뒤브뢰유는 스페인 국적의 유대인 청년 디에고와 연애를 하다가 디에고가 부헨발트에서 사망하자 프랑스 남자와 미국 군인들의 침대를 오가며 지내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엉뚱한 억측과 삐딱한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나딘의 엄마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안은 학회 참석차 뉴욕에 갔다가 시카고에서 인생의 연인 루이스를 만난다. 이후 일 년에 몇 달씩 루이스를 만나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시카고의 루이스 방에서 몸의 즐거움을 확인하고, 삶의 이유를 되찾아 다시 로베르 뒤브뢰유 곁으로 온다. 물론 이건 작가 시문 드 보부아르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연인이었던 넬슨 올그린을 모델로 써서 그런지 읽으면서 잘못됐다거나 나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용감한 레지스탕스로 이름이 높았던 세즈나크는 알고 보니 마약 중독자로 원래 부자였지만 모르핀을 사기 위해 모든 재산을 날리고, 그것도 모자라 비밀리에 독일군과 접선해 수백 명의 유대인을 그들의 손에 넘기는 대가로 돈을 받은 것이 발각난다.
  기타 전쟁이 끝나 극도로 어수선한 상태에서 파리의 레 맹다랭, 지식인들은 곧이어 3차 세계대전이 터질 것임을 공포스럽게 기다리며 미국과 소련이란 두 진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불안이 시민들을 압도할 당시의 인간 모습, 이 가운데 전 프랑스, 아니, 전 파리 사람들에 비하면 비록 소수이겠으나 (프티)부르주아 인텔리겐치아들의 생활과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그리고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2-01-21 1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점이 높아졌네요^^
말은 끝까지 들어보고, 책도 끝까지 읽어봐야 한다!
저는 리뷰쓰면서 별점을 더주게 되죠 ^^
레망다랭은 출간되었을때 도서관 희망도서로 받았다가 들춰보지도 못하고 반납했었습니다.^^;;

Falstaff 2022-01-21 12:02   좋아요 5 | URL
옙. 높아졌습니다.
근데도요, 보부아르의 수다가, 이거 참, 했던 얘기 또 하고, 또 한 얘기 비슷하게 한 번 더 하고. 이 끝없는 론도 모데라토가 참 ㅋㅋㅋㅋ
다시 읽으라면 제가 이렇게 되물을 겁니다.
을마 줄랴?
ㅋ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2-01-22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놓고 아직 시작할 엄두를 못내고 있는 책이데 지난번 골드문트님 별점 보고 절망했다가 지금 이 리뷰보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ㅎㅎ 올해 가기전에 읽겠죠 뭐.... ^^

Falstaff 2022-01-22 18:56   좋아요 2 | URL
아이, 사셨으면 걍 읽어버리세요!
술술 읽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전혀 어렵지도 않습니다. 으쌰, 으쌰!!!

stella.K 2022-01-22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왠지 골드문트님 리뷰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ㅠ
문트님 리뷰는 정말 공익적인 느낌까지 들어 경의를 표하고 싶을 때가 많은데
이것도 그렇습니다. 고맙슴다.^^

Falstaff 2022-01-22 20:21   좋아요 1 | URL
책 안 사셨으면 선택은 당연히 독자 맘이지요.
이 책은 스타일에 맞고 안 맞고도 중요한 거 같더라고요.
저도 그래서 굳이 권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