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아구스트 스트린베리 지음 / 명지출판사 / 1999년 8월
평점 :
절판


 

 

  아구스트 스트린베리는 우리에게 희곡과 연극 <줄리 아씨>로 이름을 알렸지만 사실 그리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작가는 아니다. 나도 <지옥>이 처음 읽은 스트린베리다.
  이이는 1849년에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왕국의 스톡홀름에서 선박 중개업자 카를 오스카 스트린베리와 그 집의 하녀 엘레오노라 울리카 노를링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다. 그의 자전적 소설 <하녀의 아들>을 통해 스트린베리는 친엄마 없이 자란 유년시절이 정서불안정, 가난, 종교적 환상주의, 방치 같은 성격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했단다. 그랬을 수 있겠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자신을 낳고 쫓겨난(확실하지 않음) 친엄마와 냉정하게 키웠을 계모 등의 영향 때문인지 스트린베리는 유독 페미니즘과 여성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다고 하며, 이 책 <지옥>에서도 여성은 남성을 망치게 한다고 노골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스트린베리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1875년에 여배우이자 브란겔 남작의 스물네 살 먹은 아내 시리 폰 에센을 자빠뜨려, 2년 후 기어코 이혼을 하게 만든다. 이것이 첫 번째 결혼.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이틀 만에 죽어버리고 경제적으로도 파산에 이르는 등 불행한 가정의 특징인 갖가지, 온갖 방법으로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면서 12년을 보낸 1889년에, 아내 시리 폰 에센은 그 와중에 만든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네 나라 핀란드로 떠나버린다.
  이후 베를린에 정착해 활동을 하다가 마흔네 살 때 스물한 살짜리 오스트리아 출신 언론인 프리다 울과 두 번째 결혼을 해서 케르슈틴(책에선 크리스티나)을 낳고 3년 만에 이혼한다. 쉰이 넘은 1901년에 마지막 세 번째 결혼을 하지만 이것도 3년 만에 파투가 나니,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이 근본적으로 성격에 악영향을 준 것 같다. 그런데, 세상에 이보다 더 불행한 유년시절을 보내고도 건전하게 한 평생 살다 간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니 스트린베리를 위하여 과한 동정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1897년, 바야흐로 벨에포크 시대. 세계문화의 수도 파리가 무대다. 2년 반 전 오스트리아에 있는 딸이 아파 아내가 귀국을 했을 때, ‘나’는 현재인 1897년까지 앞으로 만나지 못할 것임을 아내를 배웅하면서 감을 잡았다. 여기서 ‘나’는 작가 아구스트 스트린베리 본인이며, 작품은 끝까지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나’가 스웨덴에서 파리로 온 이유는, 파리로 몰려온 모든 고국의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작품을 세계 문화의 수도 파리에서 발표하거나, 전시하거나, 공연해 좋은 평가를 받아보고 싶어서였다. ‘나’ 스트린베리는 희곡 한 편을 들고 파리에 도착해, 극장 무대에 올렸고,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데 성공한 거의 유일한 스웨덴 예술가다. 그러나 그동안 아름다운 아내는 내 영혼 속 감옥의 간수로 밤낮 내 영혼을 염탐질했으며, 비밀스런 생각을 마음대로 상상하고, 사상의 발전을 감시하고, 미지를 향한 나의 영적 투쟁을 질투심에 불타 지켜보아왔다, 라고 ‘나’는 단정한다. 그리하여 딸 문제로 귀국했던 파리 북역에서 얼마나 큰 해방감을 느꼈을까. 물론 사랑하기는 하지만.
  여기까지는 한 비뚤어진 남성을 바라보는 일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바로 ‘나’는 본업인 극작의 흥미를 놓고 엉뚱하게 자연과학에 강한 흥미를 느낀다. 바로 이 자연과학의 지적 성취를 위해 ‘나’의 사랑, 아름다운 여자 간수이자 무고한 희생자인 아내를 포기해버렸다. 까르띠에 라땡 거리의 하숙집에서 ‘나’는 유황 속에 탄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화학실험에 몰두하고, 드디어 실험을 통해 그걸 밝혀낸다. 대가는 혹독했다. 손등에 균열이 생기고 갈라진 피부의 틈은 코크스로 채워져 피가 철철 흐르는 고질병으로 도져버렸다. 그러나 자연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이제는 유황 속에 수소와 산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단계로 넘어가려 한다. 대인관계를 극도로 단절하고 침묵과 고독을 동반자 삼아. 하다못해 유황 속 탄소의 존재라는 위대한 발견과 증명을 학회에 보고하지도 않은 채.
  이 책이 1897년에 처음 나왔다. 첫 장면에 예술, 극작과 연극 공연을 위해 파리로 와서 성공을 거두고, 아내를 떠나보낸 다음, 다시 자연과학 실험으로 유황, 원소기호 S인 물질 속에 난데없이 탄소 C가 포함되어 있는 걸 증명했다는 얘기를 읽으며, 스트린베리가 말하는 유황은 원소번호 16번, 원자량 32를 가지고 있는 물질이 불순물이나 다른 원소와 혼합되어 있는 황 화합물일 것이란 생각과 더불어, 저절로 세기말 문학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손등이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는 역경을 무릅쓰고 납과 실리콘을 합성, 가열시켜 드디어 순수한 황금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금을 만들어낸 연금술사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대신 결과는 혹독하여 양 손을 쓰지 못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파리로 온 동족들이 모금한 돈으로 쌩 루이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금을 만든 사람이.
  이어서 옥소, 다른 말로 요오드 연구에 착수해 결과를 <르 땅 Le Temp>에 발표하고, 이 논문을 읽은 독일인 사업가가 ‘나’가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와 자신과 함께 독일로 가서 특허를 신청함과 동시에 요오드 사업에 참여해달라고, 만일 허락만 한다면 즉시 십만 프랑을 현금으로 주겠다고 제의를 했으나, ‘나’는 세기말의 위대한 연구자이자 예술가답게 과학연구를 이용하여 치부하려는 어떠한 유혹도 단호하게 물리치기로 바보 같은 결정을 하고 만다. 이런 인간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손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하지도 못했으면서.

 

  세기말 작품인데 지금까지 예술(파리에서의 공연 성공)과 과학, 특히 연금술이 나왔다. 그러면 또 하나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악마주의.
  작품의 주인공 ‘나’의 손등이 쩍쩍 갈라지고, 갈라진 틈에 코크스가 들어가 피가 철철 나는 현상은 저 먼 시절 황금제조술사들의 온몸이, 지금 상식으로 보면 틀림없이 섞어 사용했을 여러 시약들, 예를 들어 수은, 비소 등의 맹독과 재료로 널리 쓰인 납 성분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지만 그들의 온몸이 납과, 수은, 비소가 섞인 중탕그릇을 가열하면서, 열에 의하여 몸의 피부는 바짝 건조되어 조만간에 균열이 생길 것이고, 균열된 틈 사이사이에 납, 수은, 비소, 황과 질소 화합물이 꼬박꼬박 들어차, 피부색은 거무튀튀하고 두꺼운 각질도 생길 수 있으며, 부종과 염증은 급기야 숨이 넘어가야 고칠 수 있는 고질병으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중세 시대의 유명한 연금술사들이. 그걸 조금 가져온 것이 ‘나’의 손등.
  이 손등을 본 오스트리아의 곱게 늙은 장모와 장모의 여동생은 ‘나’을 성자로 생각하면서 손의 갈라진 금이 저 2천 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손에 대못이 박힐 때 생긴 성흔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그러나 현실의 ‘나’는 묵고 있는 오르피라 호텔 객실은 물론이거니와 좌우 옆방, 그리고 위층과, 바로 침대 옆에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 그것을 콕 집어서 ‘나’ 스트린베리는 악마라고 지칭한다. 곳곳에서 악마를 “느끼는” 인간을 보통의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미친놈”이라 칭하고 지금은 이렇게 부르지 않지만 역자 김인호가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유학중 만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암에 걸려 세상을 뜰 1987년엔 정신분열증이라 했고, 편집증이라고도 했었나보다. 그리하여 ‘나’는 자의에 의하여, 그리고 타의에 의하여 정신병원 구경도 하고, 악마 또는 악마와 비슷한 무엇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아구스트 스트린베리가 다른 세기말 아방가르드, 그래봤자 본격적인 세기말주의자는 위스망스 말고는 알지도 못하지만, 하여튼 위스망스와 다른 점은, 위스망스가 연금술과 흑마법, 신성모독, 잔혹행위를 날것으로 표현했다 하면, 프랑스에서 젊은 한 때를 보내 위스망스와도 친분이 있었던 스트린베리는 이런 연금술, 악마주의에서 기어이 탈출을 모색하고야 만다. 이를 위하여 작가는 단테의 신곡에서 차용한 <연옥>과 <지옥>을 각 한 장chapter으로 명명하고 이의 탈출을 위하여 자기 딸을 베아트리체로 상정한다. 그럼 결론이 어떻게 되는지 대강 짐작은 하시겠지? 맞다. 당신 생각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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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12-09 11: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과 위스망스의 소설도 읽어보고 싶어요! 폴스타프님. 마지막 단락에서 묘사하신 내용들이 궁금한데 위스망스는 어떤 작품을 읽어야 하나요?

Falstaff 2021-12-09 12:02   좋아요 4 | URL
위스망스는 총 세 작품이 번역되어 있는데, 하나는 문고판이라 작은 글 같더군요.
그를 본격적인 세기말 작가로 만든 <거꾸로>가 있고요, 세기말 퇴폐와 더불어 연금술, 흑마법, 신성모독, 잔혹엽기를 만끽하시려면 <저 아래>가 좋은데요,
문제는 위스망스 추천했다가 귀싸대기 맞은 사람이 밤하늘의 별 만큼 많다고 해서 함부로 추천하기가 겁난다는 거죠. ㅋㅋㅋㅋ 완전히 극과 극이라서요, 안 맞는 분이 읽으면 한 챕터도 힘들 겁니다.
아무쪼록 미미님과 합이 맞기를 바랍니다. 맞는다는 전제에서 마지막 문단과 지극히 어울리는 <저 아래>를 흠흠.... ^^;;

반유행열반인 2021-12-09 17:49   좋아요 1 | URL
참고로 저 위스망스 재미있게 봤고 필립 로스도…(잘 걸러내기 위원회)

Falstaff 2021-12-09 21:13   좋아요 2 | URL
오, 열반님도 그러셨군요! 반갑습니다.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12-09 21:52   좋아요 2 | URL
반갑습니다. 아직 거꾸로만 보고 저 아래는 안 본 쪼꼬미입니다…

scott 2021-12-09 12: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퐐스타프님 이책 번역 어떤가요?
미국작가 밀하우저가 스트린베리 작품 영향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

Falstaff 2021-12-09 12:38   좋아요 2 | URL
이게 1987년 번역입니다. 역자 김인호의 마지막 번역 쯤 되는데 벌써 35년쯤 묵은 것이니까 저 읽기엔 무난한데 예스런 표현도 섞여 있습니다.
그냥 무난한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