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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부인 그리고 애인 ㅣ 20세기 프랑스 희곡선 4
사샤 기트리 지음, 문시연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4월
평점 :
사샤 기트리. Alexandre-Pierre Georges “Sacha” Guitry (1885~1957). 다재다능한 인물. 프랑스의 연극, 영화배우, 연극연출가, 영화 대본작가, 불르바르 극장 공연의 대본작가. 타임지에 의하면 생전 115개의 희곡과 29편의 영화 대본을 썼다. 문시연이 쓴 역자 해설엔 107개의 희곡과 30개의 영화로 나와 있다. 정오正誤는 다음으로 하고 하여튼 살면서 참 부지런히 극작에 몰두한 건 인정해야 할 거 같다. 이런 유전자는 프랑스를 이끌던 배우 루시앵 기트리를 아버지로 두어서였을까? 그렇기야 하겠느냐만 어려서부터 그런 환경에서 자랐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기회가 더 많았던 건 맞겠지. 생전 다섯 번 결혼했는데 이들 모두 당시에 떠오르는 신인 여배우였다고 하며, 이 가운데 제일 유명한 여자는 13년간 부부로 살았던 이본 쁘랭땅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거 몰라도 인생 사는데 전혀 지장없다. 잘 나가는 작가였으나 전쟁 중 비시 정부가 나치 독일에 조건부 항복을 했던 시기에 독일에 협조했다고 동포들한테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누명은 곧 벗겨졌으나 평소에 강성 애국주의자였던 기트리의 명성엔 이미 금이 가버린 후였다. 명성은 이이가 죽은 다음에야 회복되었다고 한다.
<남편, 부인 그리고 애인>이 사샤 기트리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1919년 작으로 여태 읽었던 다른 프랑스 희곡과 비교하면 아예 생소하리만큼 고전적이다. 당대를 대표하던 아방가르드와는 많이 떨어진 곳에 자리한 작품. ① 등장인물들은 노동하지 않아도 삶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 부르주아 계급이며, ② 무대 장식, 배우들의 동선 같은 지문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③ 이들의 관심은 오직 혼인의 정조와 일탈에 국한되어 있으며, ④ 스탠딩 코미디 같은 대화로 거의 모든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이 가운데 ④가 기트리가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불르바르Boulevard 연극 형식이라고 한다. 내가 읽어본 프랑스 희곡 가운데 이런 형식으로 된 것이 몰리에르 작품집과 보마르셰가 쓴 <피가로의 결혼> 정도다.
그러고 보니, 이 불르바르 연극의 경우, 대사 중심으로 관객들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을 쓰는 것은 아무래도 희극이 다른 비극, 희비극보다 훨씬 유리한 듯하다. 노골적으로 의사전달을 할 수 있으며, 만일 몸짓을 넣고 싶으면 극작과는 별개로 연출자가 얼마든지 자기 의도를 가지고 극에 삽입할 수 있을 터. 낭독회나 라디오 방송으로도 맞춤일 터이다.
연극의 내용은 별거 없다. 마흔다섯 살 먹은 프레데릭 오두앵이 남편, 이이보다 스물두 살이 적은 쟈닌이 아내. 그리고 서른세 살 총각 쟈크가 애인. 부부과 쟈크는 같은 아파트 아래위 층에 살며 남편 프레데릭과는 십 년 동안 알고 지내 너나들이하는 사이. 원래 서양 것들이 근본이 없어서 띠동갑 두 남자가 그냥 친구 먹는다. 근데 쟈크가 애인이라고 했으니 당연히 쟈닌과 쟈크는 불륜관계이며 동시에 프레데릭의 이마에는 두 개의 뿔이 돋았다. 프레데릭의 다른 친구 마르뗄 부부를 초대해 두 부부와 쟈크가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프레데릭이 보니까 가슴 깊이 파인 옷을 입은 쟈닌의 풍성한 옷섶을 우라질 쟈크 놈이 자꾸 넘보는 건데, 수컷의 속성상 보이는 거 일부러 쳐다보지 않기도 쉽지 않다는 걸 아는 처지에 그거까지는 이해한다고 해도 자기 아내 얼굴을 흘깃거리는 눈매가 영 수상쩍은 거다.
그래서 밥 먹다가 빡친 프레데릭이 주방에서 나와 따로 쟈크를 불러내, 이 순간부터 절교할 것이며 당장 집에서 꺼져달라고 요구한다. 쟈크가 순순히 물러나면 연극이 되지 않을 터라, 절교와 추방의 이유를 듣고 즉시 추방이라면 자신의 명예가 달린 문제라 용납할 수 없으니 그게 진심일 경우에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붙이겠다고 선언한다. 즉 결투를 벌이겠다는 뜻. 열두 살이나 더 먹어 (당시 기준으로) 중년에 접어든 프레데릭은 함부로 까불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한 번 뱉은 말을 다시 꿀꺽 삼킬 수 없어 주장을 계속하고, 쟈크 역시 자기가 지은 죄가 있더라도 주장을 물릴 수 없어 프레데릭의 뺨을 아주 가볍게, 쓰다듬는 정도로 살짝 건드리기만 한다. 그래도 어떻게 하나. 서로 명함을 교환해 대리인을 파견할 예정임을 알리고 쟈크가 퇴장한다.
주방에서 쟈닌과 마르텔 부부가 나와 무대로 등장해 마르텔 부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쟈닌은 여차하면 과부가 될 수도 있을까 걱정이 되어 프레데릭의 생각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설득해 화해시킨다. 이후 두 부부가 프랑스의 유명 온천지역인 엑스-레-벵으로 한 달 동안 휴가를 가면서 쟈크와 동행하기를 권하고, 그렇게 된다. 출발하기에 앞서 쟈닌과 쟈크, 불륜 커플은 잠시 만나 결별을 선언하며 적어도 앞으로 한 달, 엑스-레-벵에서 지내는 동안 서로의 정조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희극에서 이게 가능해? 처음부터 독자는 불가능성을 확실하게 알지만 이 맹세가 어떻게 깨질지는 전혀 모른다. 알면 귀신이지 사람도 아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 백작이 초야권을 이용해 쉬잔을 능욕 못 할 것을 독자가 애초부터 알지만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결론도 별로 색다르지 않다. 자연법. 그냥 사주팔자대로 사는 게 장땡이란다. 그러니 애초부터 몰리에르와 보마르셰와 비슷하다고, 몇 백 년 전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게지.